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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빙 하바나>에서 앤디 가르시아가 산도발 역을 맡았다

2018년 서울재즈페스티벌을 찾은 재즈 트럼페터 아르투로 산도발(Arturo Sandoval)의 젊은 시절은 영화 <리빙 하바나>(원제: For Love or Country: The Arturo Sandoval, 2000)를 통해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쿠바의 수도 하바나에서 트럼펫을 연주하고 노래를 하던 인기 음악인이었지만, 혁명 정부의 음악에 대한 간섭에 염증을 느끼고 재즈 음악을 하고 싶어 위험을 무릅쓰고 망명을 감행한다. 미국에 정착한 그는 10회의 그래미상, 6회의 빌보드상 그리고 에미상까지 거머쥐며 자신이 그토록 염원하던 월드 재즈 스타가 되었다.

영화 <리빙 하바나> 예고편

 

 

디지 길레스피와의 파란만장한 인연(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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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로 산도발과 디지 길레스피

그는 쿠바의 혁명정부에서 금지한 미국 라디오 방송 VOA(Voice of America)를 몰래 들으며 재즈를 동경했다. 이 사실이 발각되며 젊은 시절 4개월간 감옥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러던 1977년 그의 우상 디지 길레스피가 카리브해 연주 여행 중 쿠바에 잠시 들리자, 자신의 고물차로 마중 나가 그에게 하바나 시내와 쿠바의 민속 음악을 소개했다. 하지만 자신이 뮤지션이며 디지처럼 트럼펫을 연주한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뒤늦게 이를 알게 된 트럼펫 레전드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두 사람은 이내 친해져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해외로 함께 공연하러 다니기도 했다. 디지는 평생 후원자 역할을 자임하면서, 그가 UN 오케스트라에 입단할 수 있도록 적극 주선했다.

디지 길레스피와 함께 연주한 아르투로 산도발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하다(1990)

그는 쿠바 혁명정부의 억압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자유로운 음악 인생을 살기 위해 망명을 계획했다. 디지 길레스피의 초청으로 이탈리아에서 공연 중, 쿠바 정보당국이 자신의 계획에 대한 낌새를 느끼고 런던에 머물던 가족을 송환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를 알게 된 디지는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다름 아닌 미국 부통령 댄 퀘일(Dan Quayle)의 명함이었다. 디지는 바로 백악관으로 전화를 걸었고, 산도발과 그 가족이 유럽에서 안전하게 머물다가 미국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이로부터 8년 후 그는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디지에게 바치는 헌정 앨범 <Dear Diz(Every Day I Think of You)>(2013)는 그래미를 수상하였다

 

 

월드 트럼펫 스타로 부상하다

망명 후 그는 쿠바의 로컬 스타에서 월드 재즈 스타로 발돋움했다. 쿠바의 혁명정부 하에서는 검열로 인해 창작이 제한되었지만, 이제 그는 고향의 맘보와 미국의 재즈를 접목하여 독창적인 연주 스타일을 개척하게 되었다. 아르투로 산도발은 활발하고 명랑한 ‘쿠바 재즈’라는 새로운 장르의 기수가 되었고, 고음이 강점인 그의 트럼펫 연주는 인기를 얻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30여 장의 앨범을 출반하였고, 열아홉 번이나 그래미 후보에 오르며 이 중 10회 수상했다. 빌보드 어워즈에서는 6회 수상하였다. 클래식 연주, 발레 공연을 위한 작곡, 영화음악으로도 보폭을 넓히며, 젊은 시절 그를 옥죄던 창작의 제한을 보상받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영화 <맘보 킹>에 수록하여 그래미 후보에 오른 ‘Mambo Caliente’

그는 쿠바 독재자 카스트로의 전제 정치를 증오하였다. 오바마 대통령이 관계 개선을 위해 쿠바를 방문할 때는 백악관으로 전화를 걸어 조심하라고 당부하였으며, 2016년 피델 카스트로가 사망했을 때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쿠바의 독재자가 죽었다, 다행히! 그를 화장한다고 하니 쿠바의 토양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라 다행이다’라는 글을 남기며 그에 대한 여전한 증오심을 숨기지 않았다.

 

 

아르투로 산도발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