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무언가 보고 듣는 걸 즐긴다면 이재민의 작품이 눈에 익을 것이다. 그래픽 디자이너 이재민과 그가 함께하는 스튜디오 fnt는 스쳐 지나도 뇌리에 남는 작품을 만든다. 이재민의 스펙트럼은 규모가 큰 전시의 포스터 등을 비롯한 아이덴티티나 기업의 브랜딩부터 음반 재킷, 아기자기한 문구류까지 가닿는다.

마일드하이클럽 내한공연 포스터
9와 숫자들 <수렴과 발산>
7회 서울레코드페어 포스터
서울시립미술관 <Highlights: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소장품 기획전> 전시 포스터

 

이재민의 홈페이지에서는 차곡차곡 정리된 작업물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작품이 세기 힘들 만큼 많은데 지루한 건 하나도 없다. 그의 디자인에선 단순한 도형이 모여 정확한 의미를 그려내고, 복잡하게 엉킨 선들이 명료한 심상을 만든다.

국립민속박물관 <하늘과 땅을 잇는 사람들, 샤먼> 전시 포스터
백남준미술관 <점-선- 면-TV> 전시 포스터


머릿속에 떠다니는 생각을 낚아채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드는 일이 디자인이라면, 디자이너의 머리와 마음은 결코 메말라 있지 않을 테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창조하는 자의 사적 취향은 어떠할까. 디자이너 이재민이 오랜 시간 쌓아온 취향의 조각을 건네주었다.

 

Lee Jaemin Says,

“20대는 대학에 다니거나 사회활동을 시작하면서 갑자기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고, 그 때문에 여러 새로운 자극에 노출된다. 외골수 같은 친구가 있는가 하면, 항상 아는 척하고 싶어 하는 선배들도 있다. 또 이 시기엔 인생의 어느 때보다도 술자리가 많다. 그렇게 수많은 만남 속에서 무작위로 흡수된 음악과 영화, 소설 따위에 대한 자극이 긴 시간 동안 나이테처럼 켜켜이 쌓여간다. 이것은 결국 단단한 취향으로 자리 잡아 점차 좋고 싫은 것을 가리게 된다. 그렇게 인간이 취향이라는 견고한 껍질을 형성하는 동안, 그 옆에는 부산물처럼 여러 편린 역시 쌓여간다. 서랍을 뒤져 사물에 새겨진 오래된 추억을 떠올리듯 몇 편의 영상을 주섬주섬 챙겨보았다.”

 

1. Miles Davis ‘So What’

마일즈 데이비스의 유명한 앨범 <Kind of Blue>가 발매한 직후 제작된 영상으로, 1959년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앨범을 녹음했던 연주자들은 그대로지만 알토 색소폰의 ‘캐논볼’ 애덜리가 빠져 있으며, 피아노는 빌 에반스가 아닌 윈튼 켈리가 연주하고 있다. 눈알을 부라리며 연주하는 마일즈 데이비스와 젊은 시절의 콜트레인, 폴 챔버스 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영상이다. 진부한 연출이긴 하지만, 잘 차려입고 솔로 파트를 마친 후 담배를 태우며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시대의 여유 비슷한 것이 느껴진다.

 

2. Geoff & Maria Muldaur ‘Brazil’

명곡 ‘Brazil’은 여러 쟁쟁한 버전이 존재하지만, 제프 & 마리아 멀더 부부가 부른 버전이 가장 인상적이다. 이 곡은 테리 길리엄 감독의 영화 <브라질>(1985)의 주제곡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 부부가 연주하여 녹음한 ‘Brazil’에서는 남미의 도시보다 폴리네시아 지역의 어느 외딴 섬이 연상되기도 한다. 마이타이나 블루 하와이 같은 칵테일을 마시면서 들으면 가장 잘 어울린다. 그만큼 이 곡은 느긋하고 여유로운데, 디스토피아를 그린 SF 영화 <브라질>에 과감하게 삽입되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3. R.E.M. ‘Imitation Of Life’ MV

20대 초반에는 R.E.M.을 좋아했다. (아마도 마이클 스타이프가 주도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들의 아트워크나 영상들은 항상 멋져 보였다. 그렇지만 20대의 취향이란 것은 변덕이 심하기 마련. 내가 마지막으로 구입했던 이들의 앨범은 <Reveal>으로 2001년 발매되었다. 앨범의 타이틀곡 ‘Imitation of Life’의 뮤직비디오는 전체를 한 번에 촬영한 후 줌인을 통해 세부적인 이야기를 비추고, 다시 줌아웃으로 큰 그림을 보여주는 구성을 취한다. 원본의 촬영 시간은 아마 30초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치밀하게 계산하고 거칠게 촬영한 것이 더욱 매력적이다. 뮤직비디오에서 결국 난장판이 되고 마는 군상의 풍경은 조금씩 서로의 삶을 모방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비슷한 것 같다.

 

4.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임(The World's Hardest Game) 1 로복 공략’ 편

꽤 오래전부터 마음이 심란할 때마다 찾아보는 영상이다. 한 게임 방송 BJ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임’이라는 이름의 게임을 공략하는데, 룰은 단순하지만 실제로 플레이해보면 매우 어렵다. 나는 3단계도 제대로 클리어하기가 어려웠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화면과 색감, 좋은 BGM, 편안한 목소리를 통해 여러 가지 것들을 잠시 망각할 수 있다.

 

5. 山口百恵(야마구치 모모에) ‘さよならの向こう側’ 고별방송 영상

 “Last song for you. 눈물도 없는 이별입니다. 뒷모습을 바라보지 말아 주세요.”

1970년대 일본 최고의 아이돌이자 가희였던 야마구치 모모에는 십 년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모든 것을(사랑까지) 거머쥔 후 1980년 은퇴를 선언한다. 당시 그의 나이 21살. 이 링크는 아마도 그가 은퇴 시점에 여러 가지 활동을 정리하며 후지TV의 음악방송 <夜のヒットスタジオ(밤의 히트 스튜디오)>에 마지막으로 출연했던 것을 녹화한 영상인 것 같다. 야마구치 모모에는 여기서 시종 울먹이기 때문에 노래를 평소처럼 제대로 부르지는 못한다. 다만 노래를 마칠 때까지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다. 깊고 처연한 눈빛과 중후한 저음, 감정의 처리가 갓 스무 살을 넘긴 자의 것이라곤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역시 스타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사진 ‘정유진’

 

디자이너 이재민은?

그래픽 디자이너. 서울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했고, 2006년 설립한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fnt를 기반으로 동료들과 함께 인쇄 매체와 아이덴티티 등 다양한 분야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국내외 다양한 전시에 참여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국립극장, 서울레코드페어 조직위원회 등의 클라이언트와 함께 문화 행사와 공연을 위한 작업을 진행해왔다. 2011년부터는 정림문화재단과 더불어 건축, 문화, 예술 사이에서 교육, 포럼, 전시, 리서치 등을 아우르는 프로젝트를 통해 건축의 사회적 역할과 도시, 주거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서울시립대학교에서 가르치며, 2016년부터는 AGI(Alliance Graphique Internationale)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이재민 홈페이지 
이재민 인스타그램
스튜디오 fnt 홈페이지 

 

메인 이미지(왼쪽부터)
마일드하이클럽 내한공연 포스터 / 7회 서울레코드페어 포스터 / KCDF <공공디자인 10년: 방향과 가치> 전시 포스터

 

Editor

김유영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