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관점으로 역사와 미술을 바라보고 생각해보게 하는 두 개의 전시가 도착했다. 시대적 배경은 비슷하다. 모두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시대상과 그 시기 활동한 여성 미술가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전시.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성화가 마리 로랑생의 국내 최초 특별전 <마리 로랑생展 - 색채의 황홀>과 한국의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등장하는 ‘신여성’을 조명한 <신여성 도착하다>, 두 전시를 통해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여성 작가들의 예술세계를 느낄 수 있다. 미술관을 찾아 여성성과 예술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마리 로랑생展 - 색채의 황홀

마리 로랑생 <자화상>(1924)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개최 중인 마리 로랑생 전시는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작가의 인생을 따라가 보는 여정이다. 1883년 태어나 1956년 생을 마감한 마리 로랑생이 20대부터 73세까지 화가로 활동했던 전 시기의 작품을 시대적 흐름에 따라 감상할 수 있다. 처음 전시관에 들어섰을 때 관람객을 맞는 것은 흑백사진들. 20세기 초, 파리의 벨에포크 시절을 살았던 작가의 모습이 담긴 사진 19점이 전시된 도입부를 지나면 그녀의 초기작이 전시된 ‘청춘시대’가 시작된다. 이 전시실에선 피카소의 초상화가 특히 시선을 끈다. 무명화가였던 마리 로랑생은 몽마르트르 지구에 있던 젊은 예술가들의 아지트, 바토 라부아르(Bateau-Lavoir, 세탁선)에 드나들며 피카소를 포함해 당대의 여러 예술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피카소의 소개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점차 입체파 화가로 변모해갔다.

마리 로랑생 <파블로 피카소>(1908)


청춘시대에 이어지는 ‘열애시대’에 접어들면 아폴리네르와의 뜨거운 사랑의 감정이 묻어나는 작품세계가 펼쳐진다. 핑크, 그린, 블루 등 마리 로랑생만의 컬러와 고유한 스타일이 발현되는 시기. 그런데 두 사람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와 헤어진 뒤 마리 로랑생은 독일 귀족 출신의 화가와 결혼했고, 아폴리네르는 1차 세계대전 참전 후 사망했다. 그다음 ‘망명시대’ 섹션에서는 그녀가 스페인으로 망명 후 작품활동에만 열중한 시기의 작품들이 이어진다. 스페인 화가 고야의 영향을 받아 그린 관능적인 지중해 남부 여성들의 그림이 주를 이룬다. 다음 전시실로 발걸음을 옮기면 바로 ‘열정의 시대’. 이 시기에 그녀는 남편과 이혼한 뒤 프랑스로 돌아와 예술세계를 꽃피웠고, 특유의 아름다운 색채감과 흐릿한 윤곽선 등 그녀만의 특징이 두드러지는 작품을 남겼다. 특히 1924년 마리 로랑생이 의상과 무대디자인을 담당한 발레 작품 <암사슴들>의 에칭 시리즈가 함께 전시돼 그녀의 다양한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콜라보레이션’ 섹션에는 북 일러스트 작업과 수채화 작품이 전시돼 있다. 그녀는 앙드레 지드, 알렉산더 뒤마, 루이스 캐럴 등 유명 작가들의 북 커버와 일러스트를 맡았다. 말년 작품들이 전시된 ‘성숙의 시대’에서는 마리 로랑생이 10년에 걸쳐 완성한 대작 ‘세 명의 젊은 여인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마리 로랑생 <세 명의 젊은 여인들>(1953)
마리 로랑생 <키스>(1927)


그 외에도 기욤 아폴리네르가 그녀로부터 영감을 받아 쓴 시집 <알코올>과 마리 로랑생이 1942년 출간한 시집이자 수필집 <밤의 수첩> 등도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짧았지만 서로의 예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12년 아폴리네르가 발표한 시 ‘미라보 다리’는 그녀와의 이별 후 겪은 자신의 상실감과 아픔을 표현했는데, 이후 이 시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시라 해도 좋을 만큼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 됐다. 그리고 마리 로랑생 또한 아폴리네르가 사망한 뒤 그를 그리는 시를 썼다. ‘진정제’라는 원제가 있는 그 시는 한국에서 ‘잊혀진 여인’이란 제목으로 잘 알려져 있다.

마리 로랑생 전시장 전경


이번 전시에서는 마리 로랑생을 ‘피카소를 그린 화가, 샤넬을 그린 여자’라는 수식어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전시를 관람하고 나면 굳이 피카소와 샤넬이라는 거대한 이름과 연결시키지 않더라도 그녀의 작품세계가 충분히 깊고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리 로랑생 고유의 색채와 정서를 통해 그녀가 고뇌하던 아름다움에 대해 답을 찾아보는 것은 뜻깊은 경험이 될 것이다. 전시는 3월 11일까지 계속된다.

마리 로랑생 展 포스터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일시 2017.12.9~2018.3.11. 1월 29일(월)과 2월 26일(월) 휴관
시간 11:00~19:00. 3월은 20:00까지 운영
홈페이지 

 

 

신여성 도착하다

천경자 <조부(祖父)>(1943), 종이에 채색, 153×127.5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4월 1일까지 열리는 <신여성 도착하다>전은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등장하는 ‘신여성’의 이미지를 여성적 관점에서 다시 본다. 근대적 지식과 문물, 이념을 체현한 여성들을 일컫는 신여성이란 단어는 1890년대 이후 등장해 191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1890년대 영국의 ‘New Woman’ 열풍에서 시작해 다른 나라로 퍼져나간 새로운 여성성의 아이콘을 뜻한다. 남성의 보살핌을 받는 존재에서 벗어나, 근대적 지식을 쌓고 소비와 유행을 이끌며 주체적으로 새로운 가치와 태도를 추구한 여성이다.

이번 전시는 이런 신여성을 어떻게 조명했을까. 전시장을 둘러보면 우선 그 방대한 자료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회화, 조각, 자수, 사진, 잡지 표지와 삽화, 포스터, 영화, 대중가요 등 500여 점의 다양한 전시 작품이 등장해 신여성에 대한 다각적 접근을 시도했다. 특히 플로리다대학의 한 미술관(Harn Museum of Art)이 소장한 김은호 작가의 ‘미인승무도’(1922)와 일본 조시비미술대학(여자미술대학)이 소장한 박래현 작가의 ‘예술해부괘도(1) 전신골격’(1940)은 한국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작품이다. 또 정찬영 작가의 ‘공작’(1937)은 1972년 이후 45년 만에 전시된 작품.

박래현 <예술해부괘도 (1) 전신골격>(1940), 종이에 채색, 142x61.5cm, 조시비미술대학 역사자료실 소장
정찬영 <공작>(1937), 비단에 채색(4폭 병풍), 173.3x250cm, 유족 소장


먼저 1부 ‘신여성 언파레-드’에서는 신여성에 대한 개념을 자세히 보여준다. 시대적 배경이 물씬 풍기는 개화기 소설의 표지나 신문의 상품 광고 등 흥미로운 자료들이 가득하다. 창작자들은 주로 남성 예술가들. 대중문화 속에 드러난 여성의 이미지를 통해, 변화의 물결이 일던 당시 상황에서 신여성이라는 존재가 어떤 사회적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는지 엿볼 수 있다.

1부 ‘여성잡지 섹션’ 전경
<부인>(표지화 - 노수현), 개벽사, 1922.7. 권진규미술관 소장
<여성> 창간호(표지화 - 안석주), 조선일보사, 1936.4., 권진규미술관 소장


다음 전시실로 이동하면 2부 ‘내가 그림이요 그림이 내가 되어: 근대의 여성 미술가들’ 섹션에서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이 펼쳐진다. 정찬영, 이현옥, 김능해, 원금홍, 나혜석, 이갑향, 나상윤, 박래현, 천경자, 전명자, 박을복 등 국내에서 남성 작가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여성 작가들과 기생 작가, 유학파 작가 등 여성이 주체적으로 예술창작가로서 활동한 결과물들이다. 다른 전시에서 만나기 힘든 귀한 작품들이 많고, 그 유명한 나혜석의 ‘자화상’(1928 추정)도 바로 이곳에서 감상할 수 있다. 당시 여성 예술가로서의 고뇌가 담긴 이 작품에서 나혜석 작가는 스스로를 양장을 하고 짧은 머리를 한 근대적 여성으로 그렸다.

나혜석 <자화상>(1928추정), 캔버스에 유채, 88x75cm,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소장
2부 전경


3부 ‘그녀가 그들의 운명이다: 5인의 신여성’은 신여성 다섯 명의 작품을 집중 조명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화가 나혜석, 문학가 김명순, 여성운동가 주세죽, 무용가 최승희, 대중음악가 이난영이 그 주인공으로, 기존 사회 통념에 도전해 지탄을 받았던 그녀들의 활동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현재 활동하고 있는 여성 작가들 5명이 그들을 오마주한 현대미술 작품을 선보였는데, 당시 신여성들이 추구한 가치를 새로운 관점에서 살펴본 작업이 함께 전시돼 흥미롭다. 약 100여 년 전,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고 발현하기 위해 적극적인 발걸음을 내디뎠던 여성들의 움직임은 어땠을까? 그 강렬한 활동을 2018년, 현재의 시점에서 돌아보고 생각해볼 수 있는 전시다.

신여성 도착하다 展 포스터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일시 2017.12.21~2018.4.1.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휴관
시간 화~금/일요일 오전 10시~오후 7시. 수/토 오전 10시~오후 9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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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잡지사 <노블레스>에서 피처 에디터로 일했다. 사람과 문화예술, 그리고 여행지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에세이 <마음이 어렵습니다>, <회사 그만두고 어떻게 보내셨어요?>, 여행서 <Tripful 런던>, <셀렉트 in 런던>이 있다.
안미영 네이버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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