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말, 대충, 영혼이 없지는 않은, 거절하는, 얄밉견, 휙!던지는 말, 풉!닝겐, 무심씨의 대답… 시비 거는 것이 아니다. 최근 나온 카카오톡 이모티콘 이름들이다. 모두 대충 그린 그림체에 냉소적인 말투다. 여러 SNS에서도 ‘누가누가 대충 만드나(feat.카카오톡)’라는 게시물로 이러한 이모티콘, 즉 ‘대충티콘’이 화제였다.

이모티콘이 본래 소통을 돕는 수단임을 생각한다면, 대충티콘의 인기는 독특한 현상이다. 몇 년 전 엉덩국, 마음의 소리로 대표되는 ‘병맛’ 이모티콘들은 뜬금없거나 못생겼어도, 대충이나 냉소가 부각되지 않았다. 특히 대충티콘은 10~20대에서 두드러진 트렌드로, 30~40대 이상의 ‘행복하세요’ 류의 긍정형과 대조된다.

 

‘냉소하는 아이’의 등장

대충티콘은 기존 이모티콘의 퇴행된 형태다. 이모티콘만의 장점인 움직임 효과, 다양한 색채와 감정 모두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2초 만에 그렸거나, 하나의 그림을 Ctrl+C, V(복사, 붙여넣기)한 상품이 다수다. 대사도 2~3글자 넘지 않고 모음(ㅋ, ㅇ)에 그치거나 그마저도 생략된다. 무엇보다 캐릭터들의 화자가 ‘아이’다. 동물이더라도 아기 동물의 얼굴이거나 아이가 그린 모양새, 단순한 대사, 딱히 소통을 바라지 않는 자폐적 말투들이 그렇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보통의 아이 이미지처럼 귀엽다기보다 ‘싫어, 별로, 시러시러’라며 냉소한다. 그렇다고 아예 반항하지도 않는다. 왜 대충티콘 속 아이들은 냉소할까? 무엇보다 왜 아이의 모습일까? 대충티콘의 원형에서 가늠해 볼 수 있다.

 

대충티콘의 원형, 흙수티콘과 케장콘

대충티콘의 원형은 ‘흙수티콘’과 ‘케장콘’이다. 우선 흙수티콘은 ‘흙수저+이모티콘’으로, 이모티콘 구입이 어려운 사람들이 기존 이모티콘을 따라 대충 그린 ‘짤’이다. 흙수티콘은 엉성한 모양새, 자체제작 할 수밖에 없는 ‘웃픈’ 상황에 맞물려 널리 쓰였다. 심지어 대충티콘의 흙수티콘 버전도 등장했는데, 더 대충 만들어져 웃픈 정서가 부각됐다. 결국 ‘대충 그림체’는 흙수저라는 열악한 환경에서 탄생한 것이다.

또 케장콘은 ‘케로로장재미슴’이라는 디씨인사이드 유저가 만든 이모티콘으로, 디씨 등의 커뮤니티나 텔레그램 등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케장콘 역시 아이 캐릭터에 ‘심해어’로 불리는 어눌한 말투로 ‘크~~~고건 몰랏내~~’, ‘알고싶지않은데스’로 냉소한다. 특히 ‘저언하아아!!!아무도 여쭙지 않았사옵니다!!’, ‘우와정말대단해’, ‘예 축하드리구요’라며 무언가 내세우는 상대, 특히 어른에 대한 조롱이 두드러진다.

 

대충티콘, 세상에 대한 냉소

결국 대충티콘은 흙수저처럼 열악한 현실 인식(케장콘 대사에도 ‘아 세상 참 흉흉하여라’가 있다), 기성세대에게 기대하지 않는 마음을 반영한다. 귀여움은 보호 본능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아랫사람들의 효과적인 생존전략이었다. 그 대신 냉소한다는 것은, 더 이상 기성 세계가 보호해주지 못함을 깨달은 것일지 모른다. 그들이 혼내지도 못하게 얄미움까지만 주고, 간섭하지 말라며 등 돌리는 것이다.

이는 30~40대 이상에서 쓰는 긍정형 이모티콘과 대조된다. 흥미롭게도 이 중 기독교 이모티콘을 10~20대가 일부러 쓴다. 기독티콘에는 긍정 태도가 종교와 만나 더욱 증폭돼 있다. 젊은이들은 무한긍정을 대충티콘의 한 부류로, 우스운 것으로 소비한다. 결국 대충티콘에는 이 세상을 긍정하지 못하며, 자신의 상황도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는 자조가 배어 있는 것이다.

‘대충-냉소하기’는 병맛과도 구별된다. 2000년대 허무개그의 흐름에서 나타난 병맛은 주로 허무의 감정이었다. 기-승-전-결이라는 기존 서사가 작동되지 않고, 기-승-전 다음 ‘병(뜬금없는 결말, 인물)’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취업-내집마련-결혼-출산’이라는 서사가 끊긴 영향도 있을 것이다. 그 허무의 다음이 냉소로 나타난 것이다.

 

잔인함, 냉소 다음의 트렌드?

얼마 전 카카오에서 출시한 이모티콘 ‘니니즈’가 잔인성 논란이 있었다. 귀여운 동물 캐릭터지만 스토킹하거나, 얼굴에 멍들어 있는 등 폭력적 콘셉트 때문이었다. 논란과 별개로 니니즈는 병맛-냉소 다음을 ‘잔인’으로 암시한 것일지도 모른다. 냉소는 타인과의 단절이다. 그 단절이 커지고, 경쟁도 극심해진다면? 디즈니 주인공들이 마약이나 성폭행하는 영상물 ‘엘사게이트’의 등장, 만화 <스펀지밥>이 점점 잔인해진다는 지적들은 그 전조증상일지 모른다.

 

Writer

지리멸렬하게 써 왔고, 쓰고 싶습니다. 특히 지리멸렬한 이미지들에 대해 쓰고 싶습니다. 사진이나 미술 비평처럼 각 잡고 찍어낸 것이 아닌, 그 각이 잘라낸 이미지들에 대해. 어릴 적 앨범에 붙이기 전 오려냈던 현상 필름 자투리, 인스타그램 사진 편집 프레임이 잘라내는 변두리들과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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