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낙서 화가, 현대 예술가, 영화감독. 무엇보다 베일에 싸인 익명의 예술가, 뱅크시(Banksy). 그는 여전히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지 않은 채 각지의 길거리를 누비며 낙서하고, 전시한다. 그렇게 허가 받지 않은 뱅크시의 행위는 온갖 ‘허’를 찌른다. 스스로도 아트 테러리스트라 부르는 뱅크시의 행적을 추적해보았다.

 

Wall and War

뱅크시의 활동은 여느 낙서 화가들처럼 아무도 신경 쓸 것 같지 않은 건물의 벽에서 시작됐다. 그는 1990년대 즈음부터 주로 영국 브리스틀을 중심으로 지역 곳곳에 그림을 그렸다. 서명도, 저작권도 없는 거리의 그림들은 잠깐 행인들의 시선을 빼앗으며 거리 예술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러나 특별한 점은, 뱅크시가 다녀간 벽에는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페인팅만이 아닌, 누가 보아도 선명하고 묵직한 메시지가 있다는 것이다. 뱅크시는 자신이 그린 낙서들을 사진 찍어 홈페이지에 소개했다. 온갖 벽 위에 뱅크시의 낙서가 하나둘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과연, 뱅크시는 누구인가?

벵크시는 여태껏 실명과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다. 명백히 범법 행위인 거리 낙서에 대한 법적 기소를 피하고자 였을 테지만, 그의 익명성은 의도했든 아니든 많은 주목을 모으는 계기가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그림이 전달하는 메시지에 대한 관심으로 향했다. 뱅크시의 벽 위에는 정치의 부정, 신자유주의 경제의 부조리, 전쟁에 관한 풍자와 조롱이 넘친다. 극명한 색감, 간결한 그림체로서 제 할 말을 다 한다. 무엇보다 유머감각은 결코 잃지 않는다.

뱅크시가 분리장벽에 그린 대표적인 그래피티
뱅크시의 대표작. 화염병 대신 ‘꽃을 던지는 사람’은 반권위, 반폭력을 향한 메시지를 고스란히 던진다

한편, 여러 가지 의미로 뱅크시의 낙서는 벽과의 전쟁이었다. 2005년경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국경에 세워진 분리장벽에는 보란 듯이 반전과 평화를 상징하는 그림을 가득 그려 넣어 전쟁의 벽과 싸웠다. 그곳 외에도 뱅크시는 종종 ‘벽(Wall)’을 매개로 ‘전쟁(War)’과 싸웠다. 2017년 3월에는 팔레스타인 베들레헴 지역에 ‘벽에 가로막힌 호텔(The Walled Off Hotel)’이라는 건물을 세우며 화제를 모았다. 최소 1년 동안 실제로 운영되는 호텔 객실 안에는 반전을 외치는 뱅크시의 작품으로 가득 채웠다. 

 

예술의 놀라운 아이러니

정체를 숨기는 뱅크시는 모두가 잠든 새벽, 재빨리 그림을 그리고 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주로 스텐실 기법을 이용하여 페인트를 빠르게 뿌리는데, 그렇다고 조형미가 허술한 것도 아니다. 흑과 백의 섬세한 명암 대비, 벽의 외관과 지형지물을 이용한 기발한 그림 수법은 뱅크시의 낙서를 오롯이 예술로 기능하게 한다.

대영박물관에 도둑전시한 벽돌 조각. 카트를 밀고 있는 원시인을 그렸다

허가받지 않은 거리의 예술가는 아이러니하게도 기성 예술의 틈에서 더욱 유명해졌다. 2000년대 초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깜짝 전시를 열던 뱅크시는 2005년경 런던의 대영박물관 및 뉴욕의 미술관에 자신의 작품을 몰래 걸어 두는, 일명 도둑전시를 감행했다. 박물관을 드나드는 수많은 사람은 뱅크시의 작품을 며칠 동안이나 눈치채지 못했고, 결국 뱅크시가 직접 언급하고 난 후에야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다. 2013년에는 자신의 오리지널 작품을 몰래 판매하는 깜짝 이벤트를 진행했다. 뉴욕 센트럴 파크의 길거리 노점에서 노인이 대신 판매한 뱅크시의 스텐실 작품은 개당 60달러에 단 몇 개만이 팔렸다. 이후 뱅크시가 사실을 공개하자 사람들이 곧장 센트럴 파크로 달려갔으나 이미 노점은 사라지고 없는 상태였다.

모두 현대 예술의 허례허식을 비판하기 위한 뱅크시의 행위 예술이다. 콧대 높은 예술가와 소비자들은 돈을 매길 수 없는 익명의 예술로부터 제대로 허를 찔린 셈이다. 한편, 또 아이러니한 점은 뱅크시가 이런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거듭할수록 그의 작품은 더욱 유명해지고 가격이 올라가 결국 콧대 높은 예술가들에게 소비된다는 것이다. 이 점을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뱅크시가 허를 찌르는 힘은 변하지 않았다.

 

뱅크시의 남다른 선물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 예고편

2005년 직접 쓴 책 <Banksy: Wall and Piece>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친절하게 소개하기도 했던 뱅크시가 2010년에는 영화를 통해 대중 앞에 나타났다. 물론,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말이다. 영화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Exit Through The Gift Shop, 2010)는 뱅크시가 연출한 유일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영화는 내용상 거리미술 다큐 감독을 꿈꾸는 티에리 구에타에 의해 시작하지만, 결국 그러한 티에리를 바라보는 뱅크시의 시선으로 전복된다. 뱅크시의 권유로 거리미술을 시작하게 된 티에리를 되려 촬영하게 된 뱅크시,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작품으로 단숨에 스타 예술가가 되는 티에리의 과정이 펼쳐진다. 뱅크시는 그렇게 영화라는 예술 도구를 통해 그간 스스로 해온 질문을 또다시 던진다. 과연 예술이란 무엇인가.

디즈멀랜드 홍보영상

2015년에는 60여 명의 예술가과 함께 디즈니랜드를 패러디한 '디즈멀랜드'를 만들어 기막힌 광경을 선사했다. 영국 브리스틀 근처 해안의 야외수영장에 마련한 디즈멀랜드에는 디즈니 캐릭터를 괴기스럽게 패러디한 설치물을 비롯해 도시의 풍경을 음울하게 표현해 놓았다. 현실은 동화처럼 낭만적이지 않다는 기조로 우리 사회를 우스꽝스럽게 뒤집은 것이다. 디즈멀랜드는 2015년 8월 21일부터 9월 27일까지 운영한 뒤 해체되었고, 이후 남은 자재들은 프랑스 칼레 지역 난민 수용소를 짓기 위해 보내졌다.

 

뱅크시라는 의미

뱅크시가 공개한 본인 사진

뱅크시의 행적을 쭉 훑어본 우리는 과연 뱅크시의 질문에 제대로 이해하고, 답할 수 있을까? 뱅크시의 정체에 대해선 여전히 잘 알려진 바 없지만, 궁극적으로 그러한 익명의 존재 자체가 사회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체를 숨긴 뱅크시는 앞으로도 계속 부조리한 사회와 예술의 허를 찌르는 아트 테러를 벌일 것이다. 마침 뱅크시 전시회가 국내에서 열리고 있다. 물론 뱅크시가 직접 개최한 건 아니다. 브리스틀 지역에서 뱅크시의 행적을 연구하고 기록해온 큐레이터 마틴 불(Martin Bull)에 의해 구성된 전시다. 이로써 뱅크시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갤러리의 상업 전시에 또 한차례 흡수되었다. 어찌 됐든, 이제 뱅크시가 누구인지 추리하는 일은 중요치 않다는 점만이 분명해진 셈이다.

이미지 출처- 뱅크시 홈페이지 www.banksy.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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