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20년을 맞은 그가 친한 동료 뮤지션을 초청하여 잡담을 나누고 즉흥적인 듀오 음악을 선보였다. 초청을 받은 뮤지션들이 누구이며 어떤 음악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1950년대 중반 비밥 재즈와 알앤비(R&B)에 심취한 뮤지션들의 강한 비트의 음악을 하드 밥이라 불렀다. 10여년 동안 흑인 음악의 대세로 자리은 하드 밥 장르 다섯 곡을 선정해 보았다.
그는 피아노로 시작했지만 곧 하몬드 오르간에 푹 빠졌다. 음악은 재즈와 소울, 그리고 팝의 경계선을 넘나들었고, 자신은 아티스트가 아니라 쇼비즈니스의 엔터테이너라고 여겼다.
뉴욕으로 건너와 단 한 장의 정규 음반을 남긴 독일의 재즈 피아니스트 유타 힙의 일생은 베일에 쌓여 있었다. 나치 치하의 가난과 무대공포증으로 고생한 그는 뮤지션 대신 고독하고 평범한 삶을 선택했다.
그는 주로 사이드맨 트럼펫 연주자로 활동하며 명성을 얻었지만, 수입 면에서는 디지나 마일스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프로듀서 크리드 테일러의 CTI와 손잡고 음악의 극적인 변화를 모색했다.
올해 80주년을 맞은 블루노트의 1960년대 전성기에는 조 헨더슨과 같은 하우스 색소포니스트가 있었다. 하지만 그가 수상한 4회의 그래미상은 모두 50대 후반에 들어 버브와의 계약으로 출반한 음반에서 나왔다.
1950년대 하드밥을 대표하던 피아니스트가 있다. 하지만 너무 이른 31세 나이에 마약의 희생자가 되었고, 그의 음악은 컬트로 남았다. 빌 에반스는 친구였던 그의 이름 알파벳 순서를 바꾸어 ‘NYC’s No Lark’이란 곡을 바쳤다.
그는 건강이 악화하자 틈틈이 자신의 인생을 노란색 노트패드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만약 완성하지 못하고 죽게 되면 이를 출간해달라고 아내에게 특별히 당부했고, 아내는 30여년 만에 그 약속을 지켰다.
데뷔 전 뉴욕의 카페에서 50달러를 받고 노래하던 그는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었다. 데뷔 음반이 1백만 장 팔렸을 때, 블루노트의 브루스 룬드발 사장에게 이제 음반을 그만 판매하면 안 되냐고 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재즈 곡명에는 유독 ‘Nica’라는 이름이 자주 나온다. 그는 로스차일드 가문 출신으로 2차대전에 참전했고, 뉴욕으로 이주해 열렬한 재즈 후원자가 되었다. 그가 살던 호텔 스위트에서 찰리 파커가 사망하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1985년 2월 22일. 이 날은 올드보이의 퇴진과 함께 고사 상태에 빠진 재즈 레이블 블루노트가 재기의 신호탄을 쏜 날이다. 블루노트의 뉴보이 브루스 런드발은 30여명의 정상급 재즈 뮤지션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로레인 고든은 10대부터 뉴욕 클럽을 드나든 광적인 재즈팬이었다. 그러다 블루노트 레이블과 빌리지 뱅가드 소유주와 연이어 결혼했고, 재즈 비즈니스에서 두각을 보였다. 특히 무명 피아니스트 델로니어스 몽크를 발굴한 일화는 유명하다.
1960년대 후반 재즈의 전성기가 지나가며 빌보드 차트는 갈수록 록과 소울, 그리고 디스코로 채워졌다. 하지만 캐논볼 애덜리는 경쾌한 업템포의 연주 스타일과 청중과 소통하는 입담으로 정상의 인기를 얻으며 빌보드에 끊임없이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1939년에 설립된 신생 재즈 레이블 블루노트 레코드는 신예 뮤지션들을 공격적으로 등용하면서 비밥과 하드밥의 현장을 기록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뮤지션들은 블루노트를 창업자 두 사람의 성을 따서 ‘늑대와 사자의 왕국’이라 부르기도 했다.
<Velvet Underground & Nico>나 롤링스톤즈의 <Sticky Fingers>와 <Love You Live>의 앨범 재킷은 앤디 워홀의 작품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앤디 워홀의 앨범 재킷 디자인은 그보다 훨씬 더 많다. 어느 캐나다 아트 큐레이터는 12년 동안 그의 재킷 디자인을 찾는 노력을 기울였고, 마침내 51개의 작품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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