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레인 고든은 10대부터 뉴욕 클럽을 드나든 광적인 재즈팬이었다. 그러다 블루노트 레이블과 빌리지 뱅가드 소유주와 연이어 결혼했고, 재즈 비즈니스에서 두각을 보였다. 특히 무명 피아니스트 델로니어스 몽크를 발굴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래미 R&B 부문에서 세 차례 수상하며 블루노트의 간판 피아니스트로 떠오른 그는, 켄드릭 라마, 에리카 바두, 에스페란자 스폴딩과 같은 힙합, 네오소울, 재즈 장르의 스타들과 콜라보하며 음악적인 장르를 거부하고 이를 자유로이 넘나든다.
재즈 음반을 살펴보면 종종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기획들이 있다. 존 콜트레인, 빌 에반스, 조 패스와 같은 거장이 전성기 시절 인기 가수와 함께 음반을 냈다면, 반주 수준의 협연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정상의 목소리와 악기가 함께 빚어내는 음악을 들어보자.
스탠리 클락은 어린 시절 음악 수업에 늦는 바람에 당시 상대적으로 인기가 없던 악기인 베이스를 배우게 된다. 이후 그는 그래미에서 4번이나 수상하며 베이스의 위상을 한껏 끌어올린 재즈 베이스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한다.
로니 조던은 자신의 음악을 재즈와 힙합, 그리고 알앤비가 섞인 어번 재즈라 불렀다. 음반 회사들이 거절한 그의 음악은, 런던 클럽 DJ들의 플레이리스트에 올랐다. 그는 애시드 재즈 기타리스트로 주목받으며 미국에 진출했으나 건강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더운 한낮의 열기가 식을 저녁 무렵의 휴양지라면, 밝고 부드러운 색소폰 소리보다 놋쇠에서 울리는 덤덤하고 거친 질감의 트럼펫 소리가 귀에 착 감길 수도 있다. 한여름에 딱 어울리는 트럼펫 재즈 스탠더드 다섯 곡을 골랐다.
오스카 4관왕에 빛나는 영화 <버드맨>은 음악 역시 비범한데, 영화 사상 최초로 드럼 솔로로 오리지널 스코어를 구성했기 때문이다. 이냐리투 감독은 이를 위해 탄탄한 재즈 이론과 현란한 드러밍 테크닉을 겸비한 드러머를 초빙한다. 바로 팻 매스니 그룹 출신의 안토니오 산체스다.
지난 4월에 8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세실 테일러. 그는 클래식을 전공한 정통 피아니스트로 시작해 프리재즈의 거장이 되었다. 연주가 정통 재즈와 거리가 멀다며 재즈 클럽에서 해고당하기도 했던 세실 테일러는, 아픈 경험을 극복하고 새로운 장르의 길을 걸었다.
에스페란자 스폴딩은 지난해 하버드 음대 연주 교수로 임용되고, 여섯 번째 정규 음반을 실험적인 방식으로 3일 만에 제작하는 등 여러 이슈를 몰고 다녔다. 그는 얼마 전 모교인 버클리 음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며 재즈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시 한번 증명했다.
재즈 피아노와 테너 색소폰에서 걸출한 실력을 보유한 두 거장은 생전 단 두 번 콤보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들의 스튜디오 녹음은 10년 후에나 출반되었고, 그 후 유럽에서의 라이브 연주는 빛을 보기까지 20여 년이 걸렸다.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2019년, 앙드레 프레빈이 사망했다. 런던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였던 그는, 젊은 시절 잘 나가던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오스카를 4번 수상한 영화음악인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를 ‘클래식과 재즈를 잇는 교량’이라 불렀다.
스윙 시대의 악기였던 트롬본은 이제 더 이상 재즈 무대에서 보기 힘들어졌지만, 클래식을 전공한 스웨덴 출신 닐스 란드그렌은 빨간 트롬본을 들고 세계 퓨전재즈 무대에 등장했다. 그리고 특유의 수수한 음색으로 감미로운 발라드를 부르기도 한다.
1960년대 후반 재즈의 전성기가 지나가며 빌보드 차트는 갈수록 록과 소울, 그리고 디스코로 채워졌다. 하지만 캐논볼 애덜리는 경쾌한 업템포의 연주 스타일과 청중과 소통하는 입담으로 정상의 인기를 얻으며 빌보드에 끊임없이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유아 시절부터 부모님의 영향을 받으면서 천부적인 재능을 드러낸 신동들이 재즈계를 놀래우고 있다. 이들은 온라인에서 일찍이 발견되어 매스컴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십 대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음반으로 음악 시상식의 수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한다.
1939년에 설립된 신생 재즈 레이블 블루노트 레코드는 신예 뮤지션들을 공격적으로 등용하면서 비밥과 하드밥의 현장을 기록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뮤지션들은 블루노트를 창업자 두 사람의 성을 따서 ‘늑대와 사자의 왕국’이라 부르기도 했다.
쿠바의 트럼펫 연주자 아르투로 산도발은 혁명 정부에 의해 금지된 재즈 방송을 듣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도 그의 열정을 막을 순 없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우상이자 멘토인 디지 길레스피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망명하였고, 월드 스타의 길을 걷게 된다.
장고의 사망으로 한동안 대중에게서 잊혔던 집시 스윙은 1960년대 중반부터 다시 살아났다. 그의 이름을 내세운 페스티벌과 추모 콘서트가 파리와 뉴욕에서 잇달아 열리며 유행처럼 번져나간 집시 스윙. 현재 활동하는 집시 스윙 밴드를 만나보자.
듀크 엘링턴은 반 세기 동안 빅밴드를 운영하면서 무수한 명곡을 남겼으며, 자신의 솔로이스트들을 형제처럼 대했다. 특히 알토의 자니 호지스, 테너의 폴 곤살브스, 바리톤의 해리 카니는 듀크 엘링턴과 평생 함께하며 역사를 만들었다.
퀸시 존스는 1950년대엔 재즈 어레인저로, 1960년대에는 영화음악가로, 1980년대엔 마이클 잭슨의 프로듀서로 29개의 그래미를 수상한 레전드다. 올해 86세인 그는 지난해 인터뷰에서 동료 연예인들을 험담해 구설에 올랐으나, 다섯 뮤지션에게는 찬사를 보냈다.
이반 린스는 화학을 전공한 후 제약회사에서 일했다. 그 와중에 부업으로 만든 곡들이 미국 일류 뮤지션들에게 리메이크되며 유명해졌다. 내성적인 성격을 극복하고 전업 싱어송라이터로 나선 그는 조빙을 잇는 브라질의 로맨틱 라틴 팝 대표 뮤지션으로 자리매김했다.
1940년대 중반의 인기 빅밴드 우디 허먼 오케스트라에는 네 명의 걸출한 색소포니스트가 있었다. 이들을 위한 맞춤곡인 ‘Four Brothers’는 재즈 스탠더드로 널리 퍼졌고, 그 위에 가사를 얹은 맨하탄 트랜스퍼의 아카펠라로도 유명하다.
1930년대의 스윙재즈에 일렉트로닉 비트를 접목한 일렉트로 스윙이 유럽 전역에서 여전히 인기다. 나팔꽃 모양의 그라모폰, 빅밴드 시절의 관악기 트롬본, 빈티지 스타일의 메탈 마이크로 상징되는 인기 일렉트로 스윙 밴드를 살펴보았다.
리 릿나워, 팻 매스니, 조지 벤슨 등 많은 재즈 기타리스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웨스 몽고메리. 재즈 음악이 찰리 파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면, 재즈 기타는 웨스 몽고메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정상에 오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18년 3월 30일 내한공연을 가진 그는 천부적인 음감을 보유하여 많은 음반사들이 조언을 구하는 음악산업의 튜터로 유명하다. 와인과 함께 로맨틱한 분위기를 돋우거나 정서적인 힐링에 좋은 그의 전성기 시절 스무드 재즈곡들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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