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저장, 삭제. 이 세 가지 명령만으로도 필기가 용이한 디지털 방식은 더 혁신적인 방법으로 계속 진화하고 있다. 신속 정확하며 수정까지 편리한 디지털 방식이 여기저기서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연필로 쓰기를 고수하는 사람들이 있다. 연필로 쓴다는 게 어디 연필 한 자루만 들고 다니면 되는 일인가. 지우개나 연필깎이 등 부수적인 준비물은 얼마나 번거롭던가. 막 떠오른 영감이 사라지지 않도록 빨리 적으려 했을 때, 뒤늦게 부러진 흑심을 보며 얼마나 허망했던지(이미 영감은 떠난 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연필로 쓰기를 고집하게 되는 것일까.

사실 이 남다른 고집은 꽤 많은 사람들이 고수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파버카스텔사의 롤프 시퍼런스 대표는 한 인터뷰에서 역설적으로 필기구 시장은 점점 커지고 있으며, 필기구 시장이 약 200억 달러를 넘어설 거라고 예측한 바 있다. 결국 불편함은 더 큰 매력으로 느껴지는 요소일 뿐이다.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빠져나올 수 없다는 연필의 세계를 엿보자.

 

연필이란 ‘감각’

연필 마니아들은 왜 연필을 고집하는 것일까? 저작활동시 항상 스테들러 연필을 사용한다는 소설가 김훈은 “연필로 글씨를 쓸 때 느껴지는 몸의 힘과 살아서 움직이는 육신의 확실성이 있을 때, 즉 온몸으로 쓰는 것이 진정한 글쓰기라고 믿는다”라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손에 쥐고 쓰는 손글씨의 감각은 자판을 치고 모니터에 띄워지는 것을 확인하는 일보다 더 실체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데이비드 리스의 ‘연필 깎는 법’

연필을 다루기 위해선 가장 먼저 연필 깎기가 필요하다. 연필 깎기의 고수인 데이비드 리스는 연필 깎는 사업가다. 연필 깎기로 사업을 한다니, 몇몇 사람들은 그를 재미있는 모험가라고 여길지 모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반쯤 미친 사람이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만의 깊은 철학을 가지고 있다.

데이비드 리스의 책 <연필 깎기의 정석>, 출처 – 땡스북스 홈페이지 

어떤 사람들은 과거 유물처럼 치부하는 연필. 그러나 데이비드 리스는 그 연필이 누군가에겐 새로운 아이디어가 막 떠올랐을 때, 미술 작품을 그려 나갈 때, 세계적인 건축 작품을 스케치할 때, 위대한 문학 작품을 만들어 나갈 때 등 자신만의 세계를 탄생시킬 때 반드시 필요한 용병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데이비드 리스는 그가 쓴 책 <연필 깎기의 정석>에서 상황에 필요한 연필 깎는 방법을 다양하게 알려주기도 하지만, 사실 연필 깎는 행위를 다룬 이 책을 저술한 그의 본래 의도는 자신의 일을 더 완벽하게 해내고 싶은 사람들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연필을 깎는 것이 작업을 시작하기 전 마음을 다잡는 명상의 시간이 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다양한 글씨 쓰는 소리 ASMR, 유투버 ASMR Suna

연필을 사용하는 이유 중에는, 바로 ‘사각사각 거리는 소리’가 있다. 체중을 실어 종이 위에 내 몸을 새기듯 글을 쓸 때는, 종이 위에 흑연이 갈리는 것을 피부 위로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이런 감각도 상당히 중요하지만 또 그만큼 청각을 자극하는 이 ‘사각사각’ 소리의 매력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연필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안정이 되고 정서적으로 좀 더 유연해짐을 느낀다. 실제로 집중력이 높아져 학습효과에 좋다는 반응이 많다.

ASMR 잠이 솔솔 마성의 연필 깎기 소리, 유투버 asmr soupe

단연 연필 깎는 소리 역시 특별하다. 연필들끼리 부딪힐 때, 가볍고 텅 빈 듯한 소리가 맑게 울리는 것에 귀 기울여 보라. 고요하고 내밀한 ASMR을 찾는다면 이 연필 깎기 소리를 추천한다.

 

사실 연필은 정말 다양하다!

연필도 종류가 다 다르다?, 유투버 바드의 원데이 아트워크

연필 세계는 사실 놀랄 만큼 넓다. 현대 연필심은 흑연과 점토를 혼합해 만들어 낸다. 이때 혼합 비율에 따라 연필심의 강도와 진하기가 달라지는데 보통 그 정도를 H(Hard), B(Black), 혹은 F(Fine Point)로 나눈다고 한다. H는 연필심에 점토가 많이 첨가돼 색이 연하고 단단하다. 뒤에 붙는 숫자가 커질수록 색은 더 연해지고 강도는 강해진다. B는 연필심에 흑연이 많이 첨가돼 H와 반대가 된다. 연필의 등급은 10H에서 10B까지, 잘 쓰이지 않는 F까지 포함해 총 22단계가 존재한다고 한다. 보통 필기용으로는 HB(3B부터 H까지 다양한 취향에 따라 갈리기는 하지만 보통 HB를 가장 즐겨 쓴다), 미술용으론 주로 4B, 2B가 쓰인다. 속기용으로는 2B나 3B, 설계나 작도용으로는 4H나 2H 등을 쓴다고. 물론 제조사에 따라 연필은 진하거나 강도에 차이가 있다. 결국 제조사에 따라서도 각 연필의 강도와 진하기도 무수히 많아진다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연필을 주로 쓰는가?

 

다양한 취향을 골라 쓰세요

이제 사람들은 연필을 ‘실용적인 목적’으로 산다고 말할 수 없다. 감성적이고 창의적인 이유 때문에 산다고 말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연필을 쥐고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면서 마음의 긴장을 풀고 좀 더 자신과 내밀한 시간을 갖기 위함이다. 자신만의 취향을 골라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아주 은밀한 기쁨을 찾고 싶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손글씨를 즐기는 사람들은 남들과 다른, 남들은 모르는 자신만의 취향으로 더 까다롭게 연필을 고르게 되고, 더 아름답고 좋은 제품을 찾는다.

 

빈티지 연필 스토어, 흑심

출처 – 흑심 인스타그램
E + M Pencil Extender Made in Germany, 출처 – 흑심 인스타그램
출처 – 흑심 인스타그램

‘흑심’은 디자인 스튜디오 땅별메들리가 운영하는 곳으로 빈티지 연필 판매를 전문으로 하고 있다. 주인장들이 오래전부터 수집해온 제품과 어렵게 공수해온 제품들이 다수다. 빈티지 연필의 정수를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흔하지 않은 컬렉션과 이제는 생산을 중단한 제품들도 볼 수 있다. 또 흑심은 빈티지 연필이 나올 때 함께 포장되어 있었던 빈티지 종이 상자에 연필을 함께 담아 판매한다. 고전의 특별함과 희귀성에 흠뻑 빠질 수 있을 것이다.

주소 서울 마포구 동교로 266, 3층
영업시간 화~토 14:00~19:00
인스타그램 

 

문구샵, shop oval

출처 – oval 인스타그램
<collected by oval> Giant Novelty Pencil: JUST FOR FUN(Circa 1920-1930s) by Eagle Pencil Co. 출처 – oval 인스타그램
<collected by oval> Flat Pocket Pencils(sterling silver / solid silver pleated), 출처 -oval 인스타그램 

‘Oval’은 디자인 스튜디오 빌리브라운과 함께 문을 연 문구점이다. Oval의 제품은 귀엽고 예쁜 문구들보다는 문구 본연의 쓰임을 잊지 않고 소재의 정서를 단단히 품고 있는 제품들이 많다. 또 심플하면서도 여백이 있는 제품들이 다수다. 연필뿐만 아니라 연필 깎기, 연필 케이스 등 다양한 문구제품들을 함께 판매하며 Oval 역시 빈티지 제품들을 다수 취급하고 있다. 문구 덕후들에겐 최적의 숍이 되어줄 것이다.

주소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 29길 48-29
영업시간 목~일 13:00~20:00
인스타그램 

 

문구 디자인 스튜디오, 소소문구

출처 – 소소문구 인스타그램 
출처 – 소소문구 인스타그램 
소소문구 2019년 달력, 출처 – 소소문구 인스타그램 

‘소소문구’는 소소한 일상에서 필요한 문구 제품들로 채워져 있다. 다양하고 보편적인 연필 제품에서부터 그런 필기도구를 사용하기에 적합한 노트들까지 ‘소소함’이란 콘셉트에 맞는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소소문구만의 특색이다. 트렌드를 따라가기보다 책상 위에 소소하게 사용할 수 있는 문구들이 몇 년이 지나더라도 아름다워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소소문구. 그들은 단지 예쁜 문구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환경과 유통까지 함께 고민한다고 한다.

주소 서울 마포구 망원로 33. 2층
영업시간 월~금 14:00~20:00, 토요일 영업은 인스타그램 참고
인스타그램

 

손글씨-연필로 글쓰기-는 생각에 비해 늦은 글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끔 글쓰기에 강하게 몰입했을 때, 자신이 무엇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게 손에 쥔 연필이 앞서 나가는 일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쓰인 글을 또다시 느린 템포로 되짚으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일은 본의 아니게 창의적이고 논리적인 글을 만들어낸다.
손글씨는 글이란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쓴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경험이 아닐까. 하얀 백지를 펴고 내가 창조한 세계를 탄생시키려고 할 때, 가장 적합한 것이 ‘연필’이라는 것을 누군가는 가슴 깊이 느껴 봤을 것이다.
속 터지는 구식 필기구, 시대에 뒤쳐진 연장, 이제는 유물이 된 연필. 사각거리는 연필은 우리들의 무의식과 아주 희미해진 기억들 속에서 빛나는 글감들을 끄집어내곤 한다. 그것을 고수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몸의 자유로움에 자신을 맡긴 채 리듬을 타고 살아갈 줄 아는 사람들이다.

 

 

메인 이미지 Vintage Tombow No.9900 4B Before the late 1990s / Made in Japan, 출처 - 흑심 인스타그램 

 

 

Writer

나아가기 위해 씁니다. 그러나 가끔 뒤를 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