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곡명에는 유독 ‘니카(Nica)’라는 여성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니카는 비밥의 대모 또는 남작부인(The Bebop Baroness)으로 불리며 비밥 음악의 열성적인 후원자였던 파노니카 드 퀴닉 스와터(Pannonica de Koenigswarter)의 애칭이다. 그는 세계적인 금융재벌 로스차일드 가문의 자손으로 태어나 외교관인 프랑스 남작과 결혼하였고, 2차대전 중에는 남편과 함께 드골 망명정부(Free France)를 위해 헌신했다. 하지만 종전 후인 1947년 뉴욕에 들렀다가 우연히 델로니어스 몽크의 ‘Round Midnight’을 듣고 인생의 행로가 뒤바뀐다.

몽크의 재즈 스탠더드 ‘Pannonica’는 니카의 이름에서 땄다. ‘Pannonica’는 나방의 한 종류로, 은행가이자 곤충학자이던 그의 아버지가 붙여주었다.

남편과 결별하고 뉴욕으로 이주한 니카는 5번가에 있던 스탠호프(Stanhope) 호텔의 스위트를 영구 임대하여 수십 마리의 고양이를 키우며 홀로 살았다. 비밥 재즈 뮤지션들은 그의 스위트에서 자유롭게 연주를 했고, 그의 벤틀리 자동차를 타고 공연장으로 향하기도 했다. 니카는 델로니어스 몽크, 찰리 파커와 각별히 친하게 지냈는데, 1955년 3월 12일 찰리 파커가 그의 집에서 사망하면서 언론의 집중적인 취재에 시달리게 되었다. 결국 그는 호텔 측의 요청에 따라 거주지를 옮겼다.

“비밥의 왕이 상속녀의 아파트에서 죽다”라는 선정적인 제목으로 보도한 신문

니카는 재즈에 빠져들며 남편과 이혼하게 되고, 로스차일드 가문은 그의 상속권을 박탈한다. 주위에서는 니카의 급격한 변화의 원인을 전쟁으로 돌리기도 했다. 그는 남편과 함께 망명정부의 전사로 일하며 아프리카 콩고에서의 치열한 전투를 경험했고, 드골정부를 위해 암호해독, 운전, 라디오 방송까지 해냈다. 프랑스 정부가 후일 그에게 중위 계급을 수여할 정도였다. 전쟁 중 생사를 오가는 치열한 삶을 경험한 니카는, 부유하고 안락한 귀족부인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호레이스 실버의 재즈 스탠더드 ‘Nica’s Dream’(1956)

파커 사후, 세상에 남은 몽크와 니카의 우정은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니카는 몽크의 음악을 ‘세계의 불가사의’라 부르며 그를 위해 발벗고 나섰다. 그의 앨범을 발매하는데 자금을 지원하거나 기사나 평론을 쓰기도 했다. 한번은 몽크가 소량의 마리화나를 소지하고 니카의 차를 타고 가던 중 경찰의 수색에 발각되자, 니카는 자신의 마약이라 주장하여 법정에서 3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후 로스차일드 가문이 2년 간의 법정 투쟁을 지원하면서 이 사건은 유야무야 종료되었다.

Gigi Gryce Quartet ‘Nica’s Tempo’(1955)

1970년대 후반, 몽크의 정신병 증상이 심해져 더 이상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워지자 니카는 그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면서 보살폈다. 몽크 역시 찰리 파커처럼 니카의 집에서 생을 마감했다. 몽크의 장례식에는 부인 넬리(Nellie)와 니카가 나란히 서서 조문객을 맞으면서 다시 한번 언론의 조명을 받기도 했다. 이 때가 1982년이었고, 그로부터 6년 후 니카 역시 74년이라는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Kenny Drew Trio ‘Blues for Nica’

작가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조카 한나 로스차일드가 가족 중 유일하게 뉴욕에 살던 니카를 방문하면서 미디어의 관심을 받았다. 조카는 니카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책을 출간했고, 니카와 몽크의 우정과 행적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다큐멘터리 <The Jazz Baron>을 제작하여 BBC에 방송하였다. 이후에도 <Three Wishes>, <Nica’s Dreams>와 같이 그의 생을 조명한 서적 출간이 이어졌다.

한나 로스차일드 <The Baroness: The Search for Nica, the Rebellious Rothchild> 표지
Tommy Flanagan ‘Thelonica’(1982)

재즈 오리지널 약 80여곡에 니카의 이름이 남았고 두 재즈 거장 파커와 몽크가 그의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은, 재즈 역사에 니카가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했는지를 반증한다. 18세에 스포츠카를 몰았고 21세에 자신이 소유한 비행기를 조종한 귀족 가문의 일원이었지만, 전쟁이 벌어지자 최전선에 나섰다. 종전 후에는 처음 들어본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에 매료되어 가족과 가문을 뒤로 하고 뉴욕의 재즈와 남은 생을 함께 했다. 남작 부인과 재즈 거장의 우정, 어느 소설에 등장하는 소재가 아니라 실제 뉴욕에서 있었던 일이다.

BBC에 방송된 다큐멘터리 <The Jazz Baroness>
뉴욕의 재즈카페 파이브 스폿(Five Spot) 앞에서 몽크와 함께 한 니카
수십 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살았던 니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