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영화감독 린 램지는 친절하게 설명하는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서사에 있어서 모호한 지점이 많고, 음악을 통해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무엇 하나 명확하게 정의하기 힘든 린 램지의 영화지만, 굳이 공통점을 뽑자면 과거의 상처에 계속해서 시달리는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거다.

친구를 죽여서, 아들이 저지른 일 혹은 어릴 적 당한 폭력 때문에 상처 입은 인물들은 분명 살아있음에도 죽음과 가까워 보인다. 과거의 상처가 너무 커서 현재를 삼킬 것만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린 램지 감독의 작품을 살펴보자.

린 램지 감독

 

<쥐잡이>

Ratcatcher|1999| 출연 토미 플래너건, 맨디 매튜스, 윌리엄 이디, 린느 뮬렌

스코틀랜드의 재개발지역에 사는 소년 ‘제임스’(윌리엄 이디). 환경미화원들의 파업으로 제임스의 집 근처는 쓰레기로 가득하다. 제임스는 친구인 ‘라이언’(토마스 맥테서트)과 더러운 개천에서 놀다가 라이언을 물속으로 밀어버린다. 예상치 못하게 라이언은 익사하게 되고, 제임스는 죄책감을 느끼지만 자신을 둘러싼 환경은 좀처럼 나아지질 않는다.

죽음을 목격하고 제임스는 내내 죄책감을 느낀다. 피부병을 유발하는 개천, 도시를 가득 채운 쓰레기, 바글거리는 쥐, 자신에게 무심한 아버지까지 제임스는 의지할 곳이 없다. 그런 제임스가 의지하는 건 다른 소년들에게 성추행과 놀림을 당하는 ‘마가렛’(린느 뮬렌), 우연히 버스를 타고 종점에 갔다가 발견한 신축 중인 건물이다.

<쥐잡이> 트레일러

제임스는 마가렛의 집 욕조에서 마가렛을 씻겨주고, 신축 건물 욕조에 몸을 눕혀본다. 제임스의 집에는 없는 욕조 속에서 안락함을 느낀다. 그러나 제임스는 마가렛을 다른 소년으로부터 구할 힘이 없고, 신축 집은 자기 가족의 형편으로는 꿈도 못 꾸는 곳이다. 안락함과 상처를 몸으로 깨닫지만, 안락함은 허락되지 않고 상처는 계속 안고 가야 하는 상황에서 제임스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과연 몇 가지나 있을까.

 

<모번 켈러의 여행>

Morvern Callar|2002| 출연 사만다 모튼, 캐슬린 맥더모트, 돌리 웰스, 린다 맥과이어

동네 슈퍼마켓에서 일하고 있는 ‘모번 켈러’(사만다 모튼)는 자살한 남자친구의 시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따로 신고하지 않고 주변에 남자친구가 사라졌다고 말한다. 남자친구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소설을 출판사로 보내 달라고 남겼는데, 모번 켈러는 소설의 작가명을 자신의 이름으로 바꿔서 출판사로 보내버린다. 소설을 보낸 뒤에 남자친구가 남긴 돈으로 친구인 ‘라나’(캐슬린 맥더모트)와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난다.

모번 켈러의 행동은 관객들의 예상을 빗나간다. 자살한 남자친구를 신고하지 않고, 남자친구가 남긴 장례비용으로 친구와 여행을 가고, 남자친구가 쓴 소설을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사에 보낸다. 게다가 막상 친구와 간 스페인 여행에서는 친구와 다투고 각자 갈 길을 간다. <모번 켈러의 여행>은 모번 켈러의 마음을 명확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모번 켈러의 여행> 트레일러

모번 켈러의 남자친구 이름은 ‘제임스 길레스피’로 <쥐잡이>의 소년과 동일하다. <쥐잡이>의 제임스는 죽음을 접하지만 도망갈 곳이 없어 정체되어 있고, <모번 켈러의 여행> 속 모번 켈러는 남자친구 제임스의 죽음을 계기로 여행을 떠난다. 슬픔에 취해있기보다 당장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했고, 어쩌면 그 선택이야말로 삶을 더 극적으로 바꿀 수 있는 계기일 거다. 위태로워 보일지언정 본인이 행복하다면 지지하는 게 최선이므로, 모번 켈러의 남은 여행을 응원한다.

 

<케빈에 대하여>

We Need to Talk About Kevin|2011| 출연 틸다 스윈튼, 에즈라 밀러, 존C라일라, 애슐리 게라시모비치

‘에바’(틸다 스윈튼)는 자유분방하게 살아왔지만, 아들 ‘케빈’(에즈라 밀러)이 생기면서 힘들어한다. 가장 힘든 점은 케빈이 계속해서 자신에게 반항하고 삐딱하게 군다는 거다. 자신에게만 반항하고 남편 ‘프랭클린’(존 C 라일라)에게는 살갑게 구는 케빈 때문에, 에바의 스트레스는 점점 커진다. 시간이 흘러 학교에 들어간 케빈은, 에바의 삶을 망가뜨릴 만한 사건을 저지른다.

<케빈에 대하여>는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 묻게 한다. 과연 내게 케빈과 같은 아이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에바는 딱히 아이를 가지고 싶은 생각도 없이 케빈을 낳았고, 케빈은 태어나 보니 엄마가 무심한 사람이었다. 말 잘 듣는 아들과 사랑이 넘치는 엄마는 이들에게 해당 사항이 없다. 서로 원하는 지점이 다른 둘은 어긋나기 시작한다.

<케빈에 대하여> 트레일러

사람의 동력은 긍정적인 감정만은 아니다. 케빈과 에바는 아이러니하게도 서로에게 부정적인 감정이 있기에 모자(母子)의 정을 이어나갈 수 있다. 케빈은 에바를 괴롭힘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받고, 에바는 가족이라는 당위성에 시달리면서 케빈을 돌본다. <케빈에 대하여>의 마지막 장면에서부터 세월이 좀 더 흐른 뒤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우린 케빈에 대하여 좀 더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

You Were Never Really Here|2017| 출연 호아킨 피닉스, 예카테리나 삼소노프, 주디스 로버츠, 알렉스 마넷

유년기에 당한 폭력과 전쟁 참전으로 인해 생긴 트라우마로 고통스러워하는 ‘조’(호아킨 피닉스). 살인청부업자인 조는 자신의 ‘어머니’(주디스 로버츠)를 극진하게 챙기지만. 자신이 맡은 일에 있어서는 한없이 잔인한 사람이다. 그는 상원의원 ‘알버트’(알렉스 마넷)의 부탁으로 그의 딸인 ‘니나’(예카테리나 삼소노프)를 구하는데, 사건에 연루된 이들로부터 쫓기게 된다.

조는 내내 폭력을 저지르는 동시에, 트라우마로 인한 고통으로 죽고 싶어 한다. 조는 폭력을 당하거나 목격한 순간 때문에 힘들어하고, 자신이 직접 폭력을 저지르는 순간을 통해 스스로를 죽어 마땅한 사람으로 정의하는 듯하다. 누군가를 죽이면서 자신도 죽어가는 듯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 트레일러

조가 구해준 니나는, 조의 눈에는 자신과 비슷한 상처를 가진 채 클 인물로 보였을 거다. 시간이 지나도 지워질 상처가 아니라 삶에 깊이 박혀서 육체와 함께 더 커질 상처. 조를 구원해주는 건 늘 늙은 엄마나 어린 니나 같은, 그보다 물리적으로 약하지만 상처를 공유할 수 있는 대상이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결국 사람으로부터 치유 받아야 한다는 말이 부디 참이기를 바라면서 조와 니나의 여정을 지켜보게 된다.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