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New York> 1972년 1월 10일 자 커버를 장식한 이디스 부비에 빌의 사진. ‘리틀 이디’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다큐멘터리 포스터에도 쓰였다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Jaqueline Kennedy Onassis, 1929~1994)의 인생을 다룬 영화 <재키(Jackie)>(대런 아르노프스키, 2017)가 한국에서 개봉했다. 짧지만 강렬했던 젊은 영부인 생활을 끝낸 후에는 ‘재키 오(Jackie O)'라 불리며 미국인들의 애정과 증오를 독차지했던 세기의 아이콘이자 이미지 메이킹의 천재로 알려진 여성. 그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호기심은 때로 더 달아오를 때는 있어도 무관심의 나락으로 떨어진 적은 없었다. 그가 케네디와 오나시스라는 성을 얻기 이전의 이름은 재클린 리 부비에(J Jaqueline Lee Bouvier)였다. 케네디만 명망가의 자손이었던 것은 아니다. 일찍이 부비에 일가는 부와 명예를 손에 쥔 뉴욕 사교계의 일원이었다. 그런데 재클린 말고도 부비에라는 이름을 세간에 각인한 이들이 또 있었으니, 바로 ‘이디스’라는 같은 이름의 두 여성이다.

2008년 출간한 책 <Edith Bouvier Beale of Grey Gardens: A Life in Pictures>(Eva Marie Beale)의 표지를 채운 젊은 시절의 ‘리틀 이디’

‘빅 이디(Big Edie)’로 불리는 이디스 유잉 부비에 빌(Edith Ewing Bouvier Beale, 1895~1977), 그의 딸로 ‘리틀 이디(Little Edie)’라 불리운 이디스 부비에 빌(Edith Bouvier Beale, 1917~2002)은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의 고모와 사촌이다. 이들은 <New York> 매거진의 1972년 1월 10일 커버 기사 ‘그레이 가든스의 비밀(The Secret of Grey Gardens)’과 1975년 다큐멘터리 <그레이 가든스(Grey Gardens)>로 유명세를 얻었다. 이런 매체들을 통해 폭로된 것은 쇠락한 명망가 여성들이 살아가는 기이한 풍경이었다. ‘올드 머니(Old Money)’라 불리는 전통적 부자들의 동네로 유명한 롱아일랜드의 이스트 햄턴(East Hampton) 지역, 고상하고 단정하게 꾸민 저택들 사이에 있는 온통 덤불로 뒤덮이고 허물어져 가는 낡은 저택. 화려한 스카프와 모피 코트 차림이지만 전통이나 격식, 부유함과는 멀어 보이는 뚱한 표정의 중년 여성. <New York> 매거진이 세상에 공개한 두 이디스의 초상은 이들이 사는 저택의 열악함, 지저분함, 괴짜 같은, 몰락한, 화려한 과거 따위가 마구 뒤섞인 충격적인 비주얼로 사람들을 만났다.  

2015년 <그레이 가든스(Grey Gardens)> 미국 재개봉 트레일러

 

‘빅 이디’는 어려서부터 노래와 피아노 연주, 춤을 좋아했다. 그의 보헤미안적인 성격은 아버지와 남편을 비롯해 사교계에서도 지탄받았다. 그는 세간의 평가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재능을 갈고닦아 선보였다. 결국, 그를 이해하지 못했던 남편과 아버지는 그를 버렸다. 자식들도 그를 떠났다. 하지만 세 자녀 중 외동딸이었던 ‘리틀 이디’는 어머니의 성향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리틀 이디’ 역시 아름다웠고, 엄마처럼 춤과 노래를 사랑했다. 발랄하고 아름다운 그에게 케네디가의 청년, 차기 내무부 장관, 하워드 휴즈 같은 유명 인사들이 구애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거절하며 시간은 흘렀다. 모델, 배우, 가수가 꿈이었던 그는 뉴욕으로 가 5년을 버텼지만 결국 자금난으로 그레이 가든스로 돌아갔다. 그때부터 두 모녀는 함께 살기 시작했다. 세간은 점차 줄었고 고용인들은 내보냈다. 두 사람은 넓은 저택을 방치하기 시작했다. 고양이와 벼룩, 너구리가 집 안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함께 생활했다. 이들의 집을 방문하는 손님들은 ‘리틀 이디’가 헐값으로 처분하는 유산을 ‘쇼핑’하기 위해 한동안 드나들었지만, 팔 물건이 바닥나자 아무도 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레이 가든스에 고립되어 크래커와 통조림, 아이스크림으로 연명하며 살아간다. 1973년 앨버트와 데이빗 메이즐 형제(Albert, David Maysles)가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기 시작했을 때 ‘리틀 이디’의 나이는 56세, ‘빅 이디’는84세였다.

영화 촬영 당시 눈에 띄는 파스텔 톤의 벽지 색 등 정비의 흔적이 보인다. 이웃의 신고로 위생국으로부터 한 차례 퇴거 명령을 받고 곤경에 처한 그레이 가든스 소식을 들은 재클린 케네디가 집을 고치는 데에 재정적 도움을 주었다. 이는 어려움에 처한 가족을 돕지 않는다는 재클린 케네디 본인에 대한 비난을 무마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얼마나 흥미로운 광경이었을까. 이 몰락의 이야기에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소들이 듬뿍 들었다. 아름답고 재능 있는 두 여성, 부유한 가문과 사교계의 중심, 영부인의 친척, 자유분방함, 비극, 뒤이은 가난과 고난, 꿈의 좌절, 독신 여성, 신경증, 갈망 같은. 특히 미국 사회, 올드 머니가 지배하는 철저한 계급 질서 속에서 그들의 몰락과 가난이 전시되는 모습은 비극적이고도 신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들이 아름답고 화려한 젊음이 박제된 낡은 사진을 보여줄 때면, 대비되는 노쇠한 여성의 현재는 더욱 초라하고 극적인 효과를 자아내는 것 같았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현실 감각을 잃어버린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달링”이라 달콤하게 부르면서도 고성을 지르며 때로 싸우고, 의지하며 회한을 나눈다. 많은 이들이 이 이야기에 열광하면서도, 동시에 두 사람을 밀착 취재한 감독들을 비난했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가련한 두 여성”을 속여 가십거리로 소모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장면들에 시각적인 활기를 불어넣는 것은 노년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활기찬 “달링”, ‘리틀 이디’다. 스웨터, 스카프, 때로 천 조각을 머리에 터번처럼 둘러 금빛 브로치로 장식하고 수영복에 하이힐을 매치한 채 노래하고 춤추는 패션은 그의 성격처럼 명랑하고 독특하다. 치마를 거꾸로 입고, 해진 스타킹을 신은 그는 자신감이 넘친다. ‘리틀 이디’가 자신을 찾는 이들을 상냥하고 경쾌하게 대하는 태도는 여전히 우아하다. 키 큰 잡초로 우거진 그레이 가든스의 정원을 돌아보며 매무새를 가다듬는 그의 모습은 ‘믹스 앤 매치’가 일반화된 요즈음 패션계에서도 자주 회자된다. 번영과 몰락의 이미지는 라나 델 레이(Lana Del Rey)가 부풀려진 화려함과 부의 이미지를 회고적으로 읊으며 허무를 노래하는 정서와 똑 닮았다. 그러나 ‘리틀 이디’는 허무와 내내 싸운다. 한때는 고급이었던 색색의 낡은 옷을 창의적으로 몸에 걸치며, 구멍 난 선베드에 수영복 차림으로 누워 태닝을 하면서, 자신의 삶이 부끄럽지 않다고 온몸으로 항변하는 듯 보인다. 영화 출연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동경했던 모녀에게 일생일대의 사건이었다. 열과 성을 다해 노래하고 춤추는 이들을 구성하는 것이 오로지 비참함 뿐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두 이디스의 자유분방함은 두 사람이 사회로부터 철저히 고립되는 빌미가 되었을 뿐, 이들의 자유로운 기질 때문에 그들 스스로의 인생을 망가뜨렸다는 평가는 온당하지 않다.

고양이와 너구리들이 제집처럼 드나들었지만, 후에 고양이 75마리의 이름을 적은 리스트도 발견되었다. 고양이들은 두 이디스가 함께 기르며 애정으로 보살폈다. 집 공사와 ‘빅 이디’의 사망을 거쳐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리틀 이디’는1978년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카바레에서 마침내 데뷔 공연을 연다. 단 5일간의 짧은 공연 후, 그는 그레이 가든스로 다시 돌아갔다. 그레이 가든스를 매각하고 2002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 말년의 몇 년간, 그는 플로리다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매일 수영을 했다고 전해진다. 두 이디스가 40년이 지나도 창조적인 스타일 아이콘으로 회자된다는 것을 안다면 분명 기쁨을 숨기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은 있는 그대로 많은 이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아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2006년에는 이들을 소재로 뮤지컬이 제작되었고, 2009년에는 HBO에서 동명의 TV 영화를 제작했다. 배우 드류 배리모어(Drew Barrymore, ‘리틀 이디’ 역)와 제시카 랭(Jessica Lange, ‘빅 이디’ 역)이 출연해 열연을 펼쳤다. 2007년에는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가 ‘리틀 이디 백(Little Eddie bag)’을 만들어 선보였다. 그 밖에 여러 드라마와 쇼, 영화와 패션, 노래들에 이들의 이야기와 정서, 스타일이 담겼다. 굽히지 않는 강건함과 독창적인 스타일이 혹시 유전자로 존재한다면, 부비에 가 여성들에게 유독 많이 전달되었던 것은 아닐까.

2009년 HBO 영화 <Grey Gardens> 트레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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