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안다. 영화 뒤 감춰진 카메라의 존재를. 산타클로스도 믿지 않을 만큼 늙어버린 우리인데 어찌 모르겠는가. 저 시체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소품일 뿐이고, 저 괴물은 CG일 뿐인 것을. 진짜 사랑하는 듯 보이는 저 사람들도 실은 배우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금기된 욕망을 품는다. 카메라 렌즈 뒤편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진짜로 일어난 일은 무엇일까. 어디까지가 대본이고 어디부터가 애드립일까. 저 악역 배우는 역할만큼이나 악독할까. 그 이면의 세계를 훔쳐보고 싶어 한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스틸컷

그래서 모아봤다. 영화를 찍는 사람들을 찍은 영화들을. 물론 이 영화들 또한 영화일 뿐이다. 다큐멘터리도 메이킹 필름도 아니다. 하지만 실제보다 더 실제같이 생생하게 그 현장의 모습을 담아낸다. 아래 소개한 영화들을 보다 보면 영화와 현실 사이 모호한 경계를 넘나드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경계를 넘는 모든 경험이 그렇듯 무척이나 흥미로울 것이라 장담한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One Cut of the Dead|2017|감독 우에다 신이치로|출연 하마츠 타카유키, 아키야마 유즈키, 나가야 카즈아키, 슈하마 하루미, 마오

제목이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라니. 유치한 제목에 B급 감성의 포스터까지. 예매 버튼을 누르기 직전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결정에 도움을 받고자 찾아본 영화 리뷰에는 온통 30분만 참으라는 얘기뿐이다. 에라, 모르겠다. 덜컥 영화를 보고 나니 내가 봤던 수많은 영화 리뷰어들의 심정이 십분 이해가 간다.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은데 제대로 추천하자니 스포일러를 해야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모르고 봐야 더 재미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얘기는 하나뿐이다. “30분만 참으세요!” 혹시라도 영화의 전반부 30분 때문에 중간에 영화 보기를 그만두기라도 할까 봐 이 영화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할까 봐 안달이 난다. 아마 이 영화를 끝까지 본 관객이라면 모두 같은 마음일 것이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스틸컷

얼핏 보기에 영화는 조악한 좀비 영화처럼 보인다. 웬만한 저예산 영화에 적응이 된 관객이라도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의 퀄리티다. 좀비들의 잘린 팔다리는 가짜 티가 심하게 나고 배우들은 대사를 잊은 듯 같은 대사를 반복한다. 대놓고 카메라를 쳐다보는 배우부터, 대놓고 카메라에 튄 피를 닦는 카메라 감독까지. 오합지졸 그 자체다. 스토리가 신선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개연성도 없다. 끝없이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니는 발연기 배우만 있을 뿐이다. 게다가 이 모든 게 원테이크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하면 한숨부터 나온다. 이걸 버티고 본 스스로가 대견할 지경이다. 바로 여기까지가 모두가 참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전반부 30분이다. 사실 이 조악하기 짝이 없는 좀비 영화는 영화 속 영화다. 진짜 이야기는 그 뒤부터 시작된다.

영화의 후반부는 이 좀비 영화의 출생 비밀을 담고 있다. 이 비밀을 알고 나면 더이상 제목이 유치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허접하기 짝이 없는 그 좀비 영화 하나가 완성되기까지 카메라를 멈추지 않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스텝들을 표현하기에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만한 제목이 또 어디 있겠는가. 영화 속 스태프들에게 카메라를 멈춘다는 건, 방송사고를 낸다는 건 좀비를 맞닥뜨리는 것보다도 무서운 일일 것이다. 영화 장르가 코미디이면서 동시에 공포인 것도 그리 보면 이해가 간다.

우에다 신이치로 감독, 출처 - Huffingtonpost

이 영화의 감독이자 각본과 편집을 맡은 우에다 신이치로 감독은 약 3백만 엔, 우리 돈으로 약 3천만 원의 제작비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 신인감독과 배우들이 워크숍 형태로 영화를 제작하는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일단 배우들 출연료를 아낄 수 있었다. 로케이션으로 활용한 폐공장도 시의 소유물이라 비용이 발생하지 않았고, 피투성이 의상들은 모두 감독이 직접 가게에서 사서 피를 뿌리고 자르고 태워가며 작업을 했다. 주인공이 사는 집은 실제 감독의 집이고 대본 리딩 현장에 나타난 갓난아기는 실제 감독의 아기였다.

그렇게 간신히 완성한 영화는 84석 규모의 작은 극장에서 개봉했다. 영화는 감독의 개인 소장용 기념 작품이 되는 듯했다. 입소문을 타기 전까지는 말이다.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후, 결과는 무시무시했다. 전국 250관으로 상영관을 늘려가더니 결국에는 100만 관객을 돌파했고, 일본 다양성영화순위 1위까지 차지했다. 제28회 유바리국제판타스틱영화제 대상부터 제20회 우디네 극동영화제 관객상, 제22회 부천판타스틱영화제 아시아영화상까지 상복도 터졌다. 20대 초반 다단계에 빠졌다가 빚을 지고 노숙자가 되기도 했다는 우에다 신이치로 감독은 스물다섯 살까지 했던 수많은 실패들이 서른이 되자 이자가 붙어서 돌아온 기분이라고 했다. 감독의 인생도, 이 영화의 흥행도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을 지경이다. 영화 만드는 뒷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의 뒷이야기조차 이렇게나 흥미롭다.

출처 – mirror media 

100년 후에 봐도 재미있는 영화를 만드는 게 모토라는 우에다 신이치로 감독의 말은 어불성설이다. 100년까지 기다릴 것도 없을 것 같다. 이렇게 재미있는 영화라면 당장 내일이라도 다시 보고 싶다. 이번에는 앞의 30분을 참아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장면 하나하나에 담긴 뒷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덧붙여 올해 8월 국내 개봉한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몇몇 극장에서 막바지 상영 중. 이 기상천외한 영화를 큰 화면으로 볼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예고편

 

<망각의 삶>

Living In Oblivion|1995|감독 톰 디칠로|출연 스티브 부세미, 캐서린 키너, 더못 멀로니

그런 꿈을 꿀 때가 있다. 시험날 아침, 알람시계가 울리지 않아 울면서 시험장으로 달려가는 꿈. 면접을 보러 왔는데 아뿔싸, 옷을 안 입고 왔다는 걸 깨닫는 꿈. 군대에 다시 끌려가는 꿈은 기본.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것들은 꿈의 모습을 하고 밤마다 우리를 찾아온다. 꿈은 이렇듯 내면의 불안을 비추는 거울 같다. <망각의 삶>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 전체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꿀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악몽이다. 배우들의 연기합이 기가 막힌 찰나, 촬영감독이 화장실에 간 바람에 기가 막히게도 그 장면을 놓친다. 배우가 배역에 완전하게 몰입하는 순간 붐 마이크가 화면 안으로 빼꼼 존재감을 드러내고, 모든 세팅이 완벽하다 싶으면 배우가 대사를 까먹는다. 연기 내뿜는 기계는 연기를 내뿜다 못해 불에 활활 타오르고, 어디선가 알 수 없는 삐삐 소리에 촬영은 모두 엉망이 되어버리고 만다. 마지막에 결국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는 감독 ‘닉 레브’(스티브 부세미)가 진짜로 미쳐버린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망각의 삶> 스틸컷
<망각의 삶> 스틸컷

영화 <망각의 삶>은 총 세 부분으로 나뉜다. 감독 닉 레브(스티브 부세미)의 꿈, 배우 ‘니콜’(캐서린 키너)의 꿈 그리고 실제 상황. 하지만 꿈은 지독하게 현실 같고, 현실은 꿈만 같다. 내용상으로도 그렇지만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흑백과 컬러를 섞고 16mm 필름과 35mm 필름과 섞기도 하면서 현실과 꿈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그래서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어떤 것이 실제로 벌어진 것인지 확신하기 힘들다. 그리고 그 모호함이 영화 특유의 매력이 된다.

영화의 매력은 그뿐이 아니다. 캐릭터들도 범상치 않다. 영화 속 캐릭터들은 저마다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이상하다. 예민함으로 똘똘 뭉친 감독 닉, 카리스마가 지나친 조감독 ‘완다’(다니엘 폰 제르넥)와 마초 같은 겉모습과는 달리 여리고 감수성 풍부한 촬영감독 ‘울프’(더못 멀로니),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남자 주인공 ‘채드’(제임스 러그로)까지. 영화라는 하나의 목표로 모여든 온갖 인간군상들의 동상이몽. <망각의 삶>의 진짜 재미는 바로 여기에서 온다.

톰 디칠로 감독(좌)과 스티브 부세미(우), Photo by Jeff Vespa

이 영화를 만든 톰 디칠로 감독은 사실 미국 독립영화계 거장인 짐 자무쉬 감독의 촬영감독이었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에서 자신이 쓴 시나리오로 작품을 찍고 싶어 남자 주인공에게 시나리오를 건네려고 안달 내는 스텝의 모습에서 묘하게 톰 디칠로 감독이 겹쳐진다. 어쨌든 <천국보다 낯선>(1984), <커피와 담배>(2003)의 촬영감독으로 이미 실력을 입증한 그였기에 배우들은 그의 영화에 무료로 출연하는 걸 넘어 십시일반 제작비를 모으기까지 했고, 덕분에 5만 불의 제작비로 16일 만에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완성된 <망각의 삶>으로 1995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각본상은 물론 스톡홀름영화제 심사위원상, 도빌영화제 관객상 등 7개의 트로피를 가져가며 톰 디칠로 감독은 배우들의 신뢰에 부응한다. 감독과 배우들의 상호신뢰의 좋은 예가 아닐 수 없다.

<망각의 삶> 스틸컷

1995년도 작품이라는 사실에 이 영화를 보는 걸 망설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자칫 촌스럽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작품이면 러닝타임만큼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망설임은 접어두어도 좋다. <망각의 삶> 속 생생한 현장감은 시대를 초월한다. 2018년의 영화 촬영 현장이라고 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다. 오히려 1995년도 영화라서 얻을 수 있는 큰 이점도 있다. 신인 시절의 풋풋한 스티브 부세미와 캐서린 키너를 볼 수 있다는 거다. <저수지의 개들>과 <판타스틱소녀백서>, <파고>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스티브 부세미가 젊고 예민한 독립영화 감독 역할도 꽤나 멋지게 해냈다는 것도, <겟아웃>, <어댑테이션>, <존 말코비치 되기>의 캐서린 키너에게도 이렇게나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것도 <망각의 삶>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테니까.

<망각의 삶> 예고편

 

<시저는 죽어야 한다>

Caesar Must Die|2012|감독 파올로 타비아니, 비토리오 타비아니|출연 살바토레 스트리아노, 지오반니 아르쿠리, 코시모 레가

영화는 연극으로 시작해서 연극으로 끝난다. 연극은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 연극 내용이야 우리가 익히 아는 그 내용이다. 연극의 수준도 상당히 높고 배우들도 열연을 펼친다. 특별할 건 없어 보인다. 배우들이 로마 교도소의 재소자라는 사실만 빼면 말이다. 이 영화는 노장의 형제 감독 파올로와 비토리오 타비아니 감독이 로마의 레비비아 교도소에서 교화프로그램으로 진행하는 재소자들의 연극을 보고 감명을 받아 만들게 된 것이다. 그들이 봤던 연극과 동일하게 교도소의 재소자들을 출연시켜서 말이다.

<시저는 죽어야 한다> 스틸컷

연극을 다루다 보니 앞의 두 영화와는 조금 다르다. 이 영화는 연극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찍은 영화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는 아니다. 연극을 준비하는 자신을 영화 속에서 연기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일종의 페이크 다큐인 셈. 이런 형식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모호하게 만든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어디부터가 연극인지 어디까지가 실제인지 그 경계가 점점 희미해진다. 배우들이 손에 쥔 대본이 보인다거나 대사를 까먹는 모습을 볼 때 비로소 ‘아, 이 사람들이 지금 연기연습을 하는 거지’싶을 정도다. 이런 모호함은 연극의 내용에 몰입해 점점 자신과 배역을 혼동하는 재소자들의 심리 상태와도 묘하게 겹쳐진다. 시저나 브루투스의 대사임에도 어쩐지 배역을 맡은 재소자 개인의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하고, 재소자의 사적인 이야기가 <줄리어스 시저>의 일부처럼 들리기도 한다.

<시저는 죽어야 한다> 스틸컷

그렇게 한 시간 넘는 러닝타임 동안 재소자들이 교도소 곳곳을 무대로 연기 연습을 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들이 하는 연극을 보게 되면 첫 장면에서 이미 봤던 연극임에도 전혀 다르게 보인다. 공연 끝났을 때의 환희가, 무대 위에서의 그들의 자유로움이 다시 보이는 것이다. 연극이 끝난 후 각자의 감옥으로 돌아가 문이 닫힐 때는 첫 장면에서와 다르게 그들과 함께 갑갑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때 “예술을 알고 나니 이 작은 방이 감옥이 되었구나”라는 대사에 비로소 깊은 공감을 하게 되는 것이다.

타비아니 형제, 출처 – Europa press 
<시저는 죽어야 한다> 스틸컷

재소자를 캐스팅해 교도소에서 영화를 찍는다는 도전은 성공적이었다. 감독에게도 재소자에게도 말이다. 타비아니 형제는 2012년 베를린영화제에서 금곰상을 거머쥐면서 자신들의 건재함을 알리는 데 성공했고, 재소자들은 팜 스프링스 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으면서 재소자 신분으로는 최초로 수상에 성공했다. 심지어 조직 관련 범죄로 14년 8개월 형을 받고 복역하다 사면 출소한 ‘브루투스’ 역의 살바토레 스트리아노는 출소 후 연기자로 변신해 마테오 가로네 감독의 <고모라>(2008)로 영화계에 데뷔하는 데 성공하기까지 한다. 영화로서도 교화 프로그램으로서도 역할을 톡톡히 해낸 셈이다.

<시저는 죽어야 한다> 예고편

 

안타깝게도 우리가 영화를 볼 때 볼 수 있는 건 오직 결과물뿐이다. 영화 한 편이 나오기까지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누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 길이 없다. 그래서 영화를 찍는 사람들을 찍은 이런 영화들은 의미가 있다. 진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물고 우리로 하여금 영화 속으로 한 발 더 들어가게 만든다. 영화라는 매력에서 더더욱 빠져나오기 힘들게 말이다.

 

 

Writer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카피 쓴다는 핑계로 각종 드라마, 영화, 책에 마음을, 시간을 더 쓰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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