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한 분위기의 카페와 갤러리,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길과 플리마켓, 시끌벅적한 술집과 강연 모임이 서로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마구 침투해 새롭게 탄생하는 세상이다. 그 가운데 남들보다 조금 이른 시작을 맞아 11년을 빼곡하게 채운 ‘통의동 보안여관(BOAN 1942)’이 있다.
갤러리가 ‘여관’인 이유
정확히 말하자면 11년보다 더 오랜 시간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서울 경복궁 근처 길가에 자리한 통의동 보안여관은 총 두 개의 건물로 이뤄져 있는데, 그중 오래된 건물이 1942년에 지어져 2004년까지 여관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유명한 문인 서정주, 김동리가 최초의 문학 동인지를 만들었던 장소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억들을 소중히 여긴 새 주인의 신념 덕분에, 이곳은 2009년 갤러리로 탈바꿈하여 새로이 문을 열 당시에도 이름을 바꾸지 않고 옛 간판을 그대로 가져다 사용하게 되었다. 전시 공간이 되는 내부에도 옛 모습이 살아 있다. 공간의 쓰임새가 달라지더라도 공간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켜켜이 쌓여간다는 사실만은 변함없다. 칠이 벗겨진 벽에 페인팅을 하는 것처럼 새로운 이야기를 덧씌워가는 전시가 이곳에서 줄곧 기획되고 있다.
책과 술, 어묵이 함께하는 곳
바로 옆 건물에서는 훨씬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다.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새로운 이야기의 ‘파격’을 꿈꾸는 탓이다. 지하 3층, 지상 4층으로 이뤄진 이곳은 책도 팔고 술도 팔고 무려 어묵탕도 파는 ‘보안책방’과 ‘B_Bar’, 조용함이 흐르는 카페 겸 가게 ‘33마켓’, 게스트 하우스인 ‘보안스테이’ 등으로 채워져 있다. 특히 보안책방과 B_Bar는 한 공간의 낮과 밤 같은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데, 여러 강연, 토크 모임이 시도 때도 없이 열리면서 일종의 현대판 살롱 문화를 창출하고 있기까지 하다. 예컨대 아티스트 이랑의 낭송-낭독회가 열리는가 하면 대형 스크린으로 프레디 머큐리의 환상적인 라이브를 감상하는 이벤트가 열리는 식이다. 다품종 소량생산을 지켜가는 농부들의 마켓(‘세.모.아. 파머스 마켓’)이 정기적으로 열려 건강과 사회를 염려하는 사람들의 발길까지 놓치지 않는다.
이 글을 읽고 통의동 보안여관에 관심이 생겼다면, 오는 11월 25일까지 이 공간에서 열리는 특별한 전시를 눈여겨보자. 개관 11주년을 기념한 전시와 강연, 토크, 산책 스케줄이 준비되어 있다. ‘산책’이 하나의 이벤트로 기획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랄 것 없다. 인왕산 자락 어딘가에서 보안여관까지 아티스트 이소요 등과 정다운 산책을 즐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으로, 두 개의 공간에서 벗어나 주변 이웃, 골목길, 풍경까지 끌어안는 보안여관의 역량에 감탄하게 될 테니까. 필자는 식민지 지식인의 고민과 오늘날 창작자들의 고민을 겹쳐놓고 바라본 이택광 연구자의 강연을 들으러 가볼 계획이다.
통의동 보안여관에서 더 이상 잠들지 않아도 좋다. 이곳이 만들어내는 시끌벅적함은 좁은 공간과 짧은 시간의 경계를 모두 넘어선다.
<BOAN11: AMOR FATI>
일시 11월 1일~11월 25일
시간 12:00~18:00, 매주 월요일 휴관
장소 통의동 보안여관 전체 층
문의 02-720-8409
(본문, 메인이미지 ⓒ통의동 보안여관, 출처 통의동 보안여관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