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끝에 닿는 바람이 점점 매서워지는 계절. 그럴수록 자꾸만 따뜻한 것들을 찾게 된다. 이를테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음료나 갓 구운 빵, 그리고 하야시 아키코의 그림책 같은 것들을.

출처 - 한림출판사, <병원에 입원한 내 동생>
<은지와 푹신이>

만약 그의 이름이 낯설다면 일단 그림부터 들여다보자. 한국에서는 <달님 안녕> 등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하야시 아키코는 일본의 대표적인 일러스트레이터이자 그림책 작가다. 그의 그림에는 통통한 얼굴에 발그스레한 뺨을 가진 아이들이 등장하는데, 색감이며 느낌이 꼭 밀가루 반죽처럼 부드러워서 보고 있자면 기분까지 몽글몽글해진다. 너무 흐릿해져서 기억하려면 한참을 되짚어야 하지만 떠올리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러니까 유년 시절을 떠올릴 때처럼 말이다.

출처 - 그림책박물관, <순이와 어린 동생>
<은지와 푹신이>
출처 - scaffale basso

그의 세계는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소소한 일들로 채워져 있다. <이슬이의 첫 심부름>의 ‘이슬’이는 혼자서 첫 심부름 길에 오르고, <순이와 어린 동생>의 ‘순이’는 엄마가 외출한 사이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동생을 돌봐주게 된다. <은지와 푹신이>의 ‘은지’는 여우 인형 푹신이가 낡고 해지자 터진 곳을 꿰매줄 할머니를 찾아간다. 대단한 사건 하나 벌어지지 않지만, 이런 일들이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또 다른 무게를 가진다는 것을 하야시 아키코는 안다.

출처 - flickr, <순이와 어린 동생>
출처 - flickr, <이슬이의 첫 심부름>
출처 - flickr

잠깐 사이에 동생이 사라져 버린 골목길은 컴컴한 동굴 속처럼 아득해지고, 엄마 손을 잡고 지나다니던 길은 혼자가 되자 출구 없는 미로처럼 낯설어진다. 그런가 하면 아무리 낡고 꼬질꼬질해졌어도 아기 때부터 함께한 인형에는 반짝반짝한 새 인형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포근한 추억들이 깃들어 있다. 손목 위에 살랑 내려앉은 낙엽의 무게처럼 미묘해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어른들은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는 섬세한 세계. 하야시 아키코는 바로 그런 것을 담아내고, 우리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어린아이를 토닥토닥 깨워낸다. 한 모금 두 모금 머금을수록 빠져들게 되는 홍차처럼 심심한 듯 은은한 그의 그림에 빠져들게 되는 건 그래서다.

출처 - pinterest
출처 - 그림책박물관, <목욕은 즐거워>
출처 - flickr

일상의 틈으로 때로는 판타지가 깜짝 선물처럼 펼쳐지기도 한다. <숲 속의 숨바꼭질>에서는 아파트 단지가 낙엽이 바삭거리는 황금빛 숲으로 변하고, 피터 팬을 닮은 숨바꼭질 요정이 동물들과 함께 숨바꼭질을 한다. <목욕은 즐거워>에서는 물보라 이는 욕조 속에서 펭귄이며 물개, 하마가 나타나 수증기 낀 목욕탕을 작은 바다로 만든다. 해리포터처럼 어마어마하지는 않지만 한 사람의 세계 정도는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고, 소박하지만 내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것 같아 더 정감 가는 판타지들이다.

출처 – flickr
<순이와 어린 동생>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자리한 아이 한 명까지도 표정과 행동 모두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유명한 그의 표현력 뒤에는 어릴 때부터 이어져 온 관찰력이 숨어있다. 유난히 수줍음 많고 늘 스케치북 뒤에만 숨어 있는 꼬마였지만 그런 와중에도 한번 무언가에 눈길을 사로잡히면 관찰하느라 꼼짝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는 하야시 아키코. 어른이 된 후, 그는 자신이 포착한 아이들의 행동을 기억으로만 남겨두는 대신 사진으로 기록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작업실 한 편에 사진을 보관하는 서랍장이 따로 있을 정도다. 아이들의 세계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어른이 아니라 무릎을 굽히고 같은 높이에서 바라보는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덕분이었다.

출처 - 인터파크, <은지와 푹신이>

소매 사이로 파고드는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따뜻한 것들을 떠올려 본다. 무엇을 떠올리든 그 끝에는 늘 똑같은 것들이 있다. 어린 시절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열었을 때의 풍경, 집안에서 풍겨 나오던 따뜻한 냄새와 환하게 켜진 불빛, 나를 맞아주는 가족들. 어쩌면 마음이 추울 때처럼 몸이 추울 때에도 우리는 은연중에 유년 시절을 그리워하는지 모른다. 유독 이맘때 하야시 아키코의 그림책이 떠오르는 것도 그래서가 아닐까. 모든 것이 아늑하던 그때 그 시절처럼, 언제든 찾아가 몸을 누일 수 있을 것 같으니 말이다.

출처 - 한림출판사, <우리 친구하자>

 

하야시 아키코 공식 홈페이지 

 

메인 이미지 하야시 아키코, <은지와 푹신이>(좌), 소야 키요시 글 하야시 아키코 일러스트레이션 <A House of Leaves>(우)

 

 

Writer

언어를 뛰어넘어, 이야기에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마음속에 새로운 씨앗을 심어주고, 새로운 세계로의 통로가 되어주니까. 그래서 그림책에서부터 민담, 괴담, 문학, 영화까지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있다. 이렇게 모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중. 앞으로 직접 이야기를 만들기도 하며 더 풍성하고 가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나가기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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