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새로운 매체의 등장은 전통적 회화에 있어서 아주 커다란 위험이었다. 그 존재 가치가 흔들릴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오늘날 회화는 여전히 건재하고, 나아가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소위 ‘우울한 낭만주의’를 회화로 실천하는 신 라이프치히 화파(Neue Leipziger Schule)가 있다.
우울과 낭만은 서로를 감싸기에는 꽤 먼 개념이다. 하지만 신 라이프치히 화파로 불리는 이들의 회화 작업을 두고 ‘우울한 낭만’ 혹은 ‘낭만적인 우울’을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우울과 낭만이 만드는 역설적인 공간 사이에서 부유하는 공허함, 무력함 그리고 차분함을 살펴보자.

Neo Rauch, <Ordnungshüter>, Öl auf Leinwand, 250 x 300cm, 2008, 출처: Galerie EIGEN+ART 홈페이지

독일 중부에 위치한 라이프치히는 예로부터 물류 교통의 중심 도시로서 안정적인 경제력을 자랑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라이프치히에서는 일찍이 음악, 미술 그리고 문학이 발달했다. 그러나 세계 2차 대전을 겪으며 도시는 침체되었고, 이후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한 국가 정책에 따라 예술은 그 자유로움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분위기는 오늘날 라이프치히 화파가 존재하고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억압하는 사회 구조 속에서 갈망하는 개인의 자유를 작가들은 화폭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양상은 독일 미술 대학교 특유의 교수 사사 제도를 통해서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Tim Eitel, <Shadows>, Öl auf Leinwand, 60 x 60cm, 2012, 출처: Galerie EIGEN+ART 홈페이지

라이프치히 화파는 라이프치히 미술 대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하고 작업 활동을 한 작가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1989년 독일 통일을 기준으로 라이프치히 화파와 신 라이프치히 화파로 구분되는데, 이는 화파 내부 세대를 구분하는 용어임과 동시에 새로운 라이프치히 회화의 탄생을 이야기한다. 1세대와 2세대 라이프치히 화파의 명맥을 이은 신 라이프치히 화파는 오늘날 회화의 한 축을 담당할 정도로 그 영향력이 크다. 이들은 앞선 세대가 그랬듯이 전통적 매체인 회화를 고집하며, 새로운 매체의 등장과 최신 기술이 적용되는 현대 미술에서 과연 물감과 캔버스를 사용한 작업이 여전히 통용될 것인가라는 의구심을 향해 회화의 건재함을 보인다.

동시대 회화를 대표하는 신 라이프치히 화파의 대표 작가인 네오 라우흐(Neo Rauch), 팀 아이텔(Tim Eitel) 그리고 틸로 바움게르텔(Tilo Baumgärtel)은 동시대 회화의 명맥을 이어가는 신 라이프치히 화파의 대표 작가이다. 이들의 작업에는 라이프치히 회화의 특징과 더불어 오늘날 회화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네오 라우흐(Neo Rauch)

1960년 출생으로 신 라이프치히 화파로 가장 널리 알려진 작가이다. 그는 혼란스러웠던 1980~1990년대에 라이프치히 화파 2세대이자 신 라이프치히의 선구자로 불리는 아르노 링크(Arno Rink)로부터 회화를 배웠다.

Neo Rauch, <Fremde>, Öl auf Leinwand, 250 x 300cm, 2016, 출처: Galerie EIGEN+ART 홈페이지

그의 작업에는 자신이 경험했던 사회, 정치 그리고 사상의 혼란함이 냉소적으로 담겨있다. 무엇보다도 뚜렷하게 구분되는 공간 및 인물의 구성과 함께 강렬하게 대비되는 색채는 특유의 긴장감을 유발한다. 냉전의 시대가 막이 내리고, 동독으로 자본주의가 유입되며 급격하게 변화하는 주변 환경으로부터 느낀 불안함이 잘 드러난다.

Neo Rauch, <Der Former>, Öl auf Leinwand, 200 x 150 cm, 2015, 출처: Galerie EIGEN+ART 홈페이지

한편 추상이 아닌 구상 회화를 고집하며, 캔버스 위에 다양한 인물을 등장시킨다. 작가는 그림 속에서 인물을 가만히 세워 놓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화려한 움직임을 선보이는 것도 아니다. 인물의 절제된 움직임을 통해서 그림 속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이들은 서로가 관계하며 지난 역사적 모티브를 떠나서 새로운 서사를 생산한다.

 

팀 아이텔(Tim Eitel)

팀 아이텔은 지난 2011년과 2017년 국내의 학고재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지며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다. 특유의 색채는 물론이고 사색적인 풍경과 그 속에 담긴 인물의 신비로움이 빚어내는 조화로움으로 국내의 미술 애호가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1997년부터 라이프치히 미술 대학교에서 아르노 링크로부터 회화를 배웠다. 미술을 접하기 이전에는 슈투트가르트 대학교에서 문학과 철학을 전공했는데, 당시 습득한 인문학적 사고방식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후 작가의 작업 주제와 접근 방식에 많은 영향을 줬다.

Tim Eitel, <Untitled(Stuff)>, Öl auf Tafel, 22,9 x 22,9cm, 2009, 출처: Galerie EIGEN+ART 홈페이지

그는 현실 사회의 풍경을 화폭에 무덤덤하게 담아낸다. 특히 사회에서 외면당하는 이들이 남긴 공간의 흔적에 관심을 가진다. 인물이 부재한 채로 흔적만이 조용히 남아있는 풍경은 관객에게 지나쳐온 주변 풍경을 다시 한번 돌아보기를 권한다. 이를 통해 재현적 능력을 뛰어넘어 공감과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회화의 사회적 능력을 선보인다.

Tim Eitel, <Mountains>, Öl auf Leinwand, 310 x 220cm, 2018, 출처: Galerie EIGEN+ART 홈페이지

또한, 작가는 사색적인 풍경과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을 함께 배치하여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공허함이 감도는 배경 속에 위치한 인물은 고개를 돌리거나, 숙이거나 혹은 반만 보이는 등. 그 정체를 감춘 채로 존재한다. 따라서 그림 속 인물은 특정인을 지칭하지 않으며, 이를 접하는 그 누구든지 스스로의 자아를 화폭에 이입할 수 있다. 작가는 이러한 장치를 통하여 현대인이 스스로를 돌아보며 사색할 수 있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틸로 바움게르텔(Tilo Baumgärtel)

라이프치히와 멀지 않은 도시인 드레스덴 출신의 틸로 바움게르텔 또한 라이프치히 미술 대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1994년부터 98년까지는 본격적으로 아르노 링크 교수에게 전통적 회화를 사사했고, 졸업 이후 작가는 옛 방직 공작을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한 라이프치히의 슈피너라이(Spinnerlei)에 작업실을 두고 활발히 활동 중이다.

Tilo Baumgärtel, <Albis>, oil on canvas, 50 x 70cm, 2013, 출처: Galerie Kleindienst

그의 회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몽환적 색채와 분위기이다. 화폭을 가득 채우는 몽환적인 색채와 그 조합은 서로를 감싸며 경계를 허문다. 이는 전반적인 그림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며 마치 추상 회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전통 회화의 구상적 특징을 그림은 분명히 한다.

Tilo Baumgärtel, <Long Island Sound>, oil on canvas, 150 x 180cm, 2011, 출처: Galerie Kleindienst

그림 속에 담긴 인물 혹은 물체는 경계가 희미한 배경 속에서도 그 존재감을 뚜렷이 선보인다. 덕분에 작가의 작업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빚어진 이야기는 선형적인 구조가 아닌 비선형적 형태로 그림 속에서 돌아다니게 된다. 결과적으로 작업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또한, 그의 그림 속 초현실적이고 유동적인 분위기는 시간과 공간의 정적인 개념을 무색하게 만든다. 일정하게 흐르는 시간도, 고정적인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작가가 경험한 지난 역사의 경험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시공간의 변화와 적응을 요구하는 사회상에 대한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시각을 작가는 공간과 시간의 경계를 초현실의 단계로 끌어올리며 그 의미를 무색하게 만들어 버린다.

Tilo Baumgärtel, <Azorka >, oil on canvas, 210 x 290cm, 2018, 출처: Galerie Kleindienst

낭만 속의 우울함과 우울 속의 낭만을 자신의 회화적 언어로 화폭에 담아낸 이들의 작업은 단순히 역사 속 혼란스러웠던 개인의 경험을 재현하는 것으로 남아있지 않는다. 신 라이프치히 화파의 회화는 현대 사회의 척박한 분위기와 급변하는 사회의 모습에 무리하게 요구되는 적응에 지친 이들의 모습이 투영된다. 이들이 선보이는 우울과 낭만은 새로운 맥락 위에서 회화의 또 다른 가능성을 선보인다.

 

 

메인 이미지 (왼쪽부터 차례로) Tim Eitel <Blue Bag>(2017) <Mountains>(2018) <Repetition>(2016)

 

 

Writer

DNA Berlin 갤러리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를 역임했다. 이후 독립 큐레이터이자 프로그램 기획자로서 활동하며 독일 베를린을 기반으로 매달 한 명의 작가와 함께하는 <KUNST TALK>를 기획하여 운영했다. 현재는 국내의 오프라인 지면과 온라인 플랫폼에 시각 및 공연 예술을 주제로 한 글을 기고 중이다.
이정훈 페이스북 
이정훈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