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기 열강의 식민 지배부터 민주화와 독재 정권까지 필리핀을 관통하는 시간의 줄기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필리핀 현대 영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라브 디아즈(Lav Diaz) 감독은 지난 역사의 상흔과 동시대 현실 풍경을 긴 러닝 타임 속에 천천히 녹여낸다. 감독은 제73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 사자상을 수상한 <떠나간 여인(The Woman Who Left)>을 통해서 자신이 추구하는 영화의 시간을 대중에게 선보였다. 그러나 상업 영화의 압축적 형태와 드라마적 요소가 지배적인 오늘의 풍경 속에서 10시간에 이르는 장대한 서사의 흐름과 내부의 덤덤한 목소리는 이질감을 넘어 반항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라는 장르와 매체가 우리 삶 속 희락의 순간을 담아내는 훌륭한 거울이라면, 감독이 창조한 서사의 길이는 터무니없이 짧다. 천천히 오래 씹어야 소화도 잘된다는 정설을 떠올리며, 라브 디아즈가 선사한 새로운 영화의 시간 속에 이성과 감각을 맡겨보자.

Photo by Gerhard Kassner - © Gerhard Kassner/Berlinale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의 다투 파글라스 출신인 그는 마닐라의 모웰펀드 영화원에서 수학했다. 시나리오 작가로서 본격적으로 영화에 뛰어들기 이전에는 잠시 음악 잡지사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뿐만이 아니라 그는 영화를 공부하기 이전에는 경제학을 전공하기도 했다. 지난 각각의 경험은 서로 멀찍이 거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감독은 결이 다른 경험을 자신이 창조한 영화의 시간 구조 속에 잘 녹여낸다. 1998년 <콘셉시온 구역의 범죄자(Criminal of Barrion Conception)>를 통해서 첫 장편 데뷔를 했다.

 

필리핀을 담은 시간

<웨스트 사이드 키드> 포스터

첫 장편에서 전통적인 서사극 형식과 비교적 단순한 시간 구성을 선보였던 감독은 필리핀 3부작의 첫 번째 작품인 <웨스트 사이드 키드(Batang West Side)>(2001)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자신의 영화 색깔을 드러낸다. 영화는 미국 뉴저지의 한 길거리에서 총격을 당해 사망한 필리핀 10대 소년의 죽음에 관한 수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개인의 죽음을 둘러싼 가족과 주변 친구의 이야기와 모습을 통해서 점차 미국 속 필리핀 커뮤니티 내부의 문제가 드러난다. 개인과 사회의 이면을 향한 감독의 시선과 탐구는 315분에 달하는 러닝 타임 위에서 펼쳐진다.

<필리핀 가족의 진화> 포스터

이어서 두 번째로 선보인 <필리핀 가족의 진화(Evolution of A Filipino Family)>(2004)에서 감독은 필리핀의 어두운 현대사를 담았다. 장장 10시간 30분에 달하는 영화는 1971년부터 87년까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독재 정권 시기를 배경으로 다룬다. 화면 위에는 그치지 않는 혼란과 폭력의 흐름 속에서 점차 무너지는 한 가족의 모습이 보인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 생계를 꾸려가는 갈라도 가족은 국가와 사회의 혼돈으로부터 물리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듯하지만 결국 독재와 폭력의 국가적 분위기에 휩쓸린다. 감독은 영화 속에서 국가와 사회가 가족이라는 한 단계 아래 규모의 공동체에 끼치는 영향뿐만이 아니라 가족을 구성하는 개개인의 모습을 비추며 국가-사회-가족-개인이라는 구조적 연결고리를 완성한다.

<필리핀 가족의 진화> 스틸컷

한편, 영화는 660분이라는 기념비적인 러닝 타임과 더불어 약 9년의 제작 기간을 가졌다. 이는 경제적 여건을 고려한 선택이기도 하지만(참고 텍스트), 16년간의 독재 역사를 관객에게 보다 현실감 있게 보이기 위한 감독의 제작 방식으로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롱테이크 촬영 기법과 함께 긴 호흡의 시간 구조를 완성한다.

<에레미아스, 1권> 포스터

필리핀 3부작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영화 <에레미아스, 1권(Heremias Book One: The Legend of the Lizard Princess)>(2006)에서도 그는 540분, 즉 9시간에 달하는 시간 속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에레미아스‘라는 이름을 지닌 한 행상인의 여정과 그 속에서 휘말리게 되는 범죄(혹은 도난) 사건은 영화를 이끌어가는 서사의 중심이다. 이를 두고 주인공이 마주하는 각각의 인물을 통해서 감독은 다시금 필리핀 사회의 어두운 면과 내부에 자리 잡은 불가항력적인 권력 구조의 모습을 스크린 위로 끌어 올린다.

 

필리핀의 초상과 휴머니즘

단순히 영화의 길이만 길었다면, 언젠가 그 형식적 측면에 있어서 매너리즘이라는 한계를 맞이했을 것이다. 하지만 라브 디아즈의 영화는 품고 있는 그 내용이 영화의 구조와 형식에 아름다움과 깊이를 더한다. 앞서 언급한 필리핀 3부작에서는 감독만의 시간 구조 위에 필리핀 사회의 모습을 펼쳤다면, 2007년 베니스 영화제 오리종티 다큐멘터리 부문에서 특별 언급된 <엔칸토에서의 죽음(Death in the Land of Enchantos)>(2007)은 필리핀 사회의 초상 속에서 담긴 휴머니즘을 주목한다.

<엔칸토에서의 죽음> 포스터

역시나 540분이라는 거대한 러닝 타임의 구조를 지닌 영화는 필리핀의 시인 벤자민 아구산이 러시아에서 자신의 고향 파당(Padang)을 방문하는 이야기를 담는다. 자연재해로 변해버린 풍경이지만 곳곳에서 지난 아픈 역사를 마주하는 주인공은 괴로워하고 힘들어한다. 하지만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두 친구와 자연재해를 극복하려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시대의 아픔을 딛고 생의 의지를 다지는 인간의 모습을 나열한다.

<엔칸토에서의 죽음> 스틸컷

한편, 영화는 실제로 2006년 필리핀을 강타했던 태풍 두리안으로부터 시작했다. 막대한 피해를 입은 필리핀의 현실적 풍경을 픽션과 함께 보여주며, 재앙을 극복하는 인간의 강인한 의지를 더욱 극적으로 전한다.

<멜랑콜리아> 포스터

2008년 베니스 영화제 오리종티상을 받은 <멜랑콜리아>는 보다 인간 내면의 감정에 더욱 다가간다. 450분이라는 시간 속에서 ‘알베르타‘, ‘줄리안‘ 그리고 ‘리나‘ 세 주인공은 각자에게 닥친 지난 과거의 슬픈 경험을 되새김질하며, 그들 앞에 놓인 각기 다른 운명과 정체성을 수용한다. 그 과정 위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내적 갈등의 모습은 인간의 행복과 불행 그리고 슬픔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한 괴롭고 처절한 무언의 싸움이다.

 

새로운 형식의 실험

라브 디아즈는 필리핀의 지난 역사와 사회 그리고 정치 상황에 대하여 자신의 미적 언어로 관객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걸어왔고, 자신이 마련한 대화의 시간으로 초대해왔다. 흑백의 영상과 나른한 서사의 행렬은 그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한 특유의 미장센이다. 최근 그는 영화의 형식과 요소에 변화를 가했다.

<악마의 계절> 포스터

68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상영작으로 처음 선보인 <악마의 계절(Season of the Devil)>(2018)은 기존의 10시간에 가까운 러닝 타임에서 벗어나 234분의 다소 짧은(?) 시간 구조를 지닌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것은 무엇보다도 그 형식이다. 다큐와 픽션의 혼재된 이미지를 나열하던 감독은 이번에 뮤지컬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영화에 삽입한다. 덕분에 스크린 속 인물들은 대사가 아닌 노랫말로 각자의 이야기를 전달하며 대화를 이어간다. 부드러운 형태의 운율적 대화는 흑백의 영상으로 날카롭게 비치는 암울한 시대 배경의 이미지와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악마의 계절> 트레일러

1970년대 후반 반체제 공산주의자 토벌을 위해 결성된 민병대가 주어진 권력으로부터 비롯한 악마성을 펼치는 가운데 아내의 실종을 밝히기 위한 한 시인 남성의 이야기를 담는다. 필리핀의 지난 역사뿐만이 아니라, 내부에 자리 잡은 공포와 인간으로서 마주하는 고민을 다층적으로 표현한다.

라브 디아즈. 출처 – IMDB 

필리핀의 과거와 오늘이라는 거대한 타임라인을 다루는 라브 디아즈의 태도는 솔직하며, 그의 영화는 진솔하다. 필름의 압도적 길이는 느림의 미학을 실천하며 영화를 대하는 태도의 새로운 담론을 제시한다. 그 특유의 시간적 구조에 담긴 그의 시선은 우리의 곁에 느리지만 오래 머무를 것이다.

 

 

라브 디아즈 공식 홈페이지

 

 

Writer

DNA Berlin 갤러리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를 역임했다. 이후 독립 큐레이터이자 프로그램 기획자로서 활동하며 독일 베를린을 기반으로 매달 한 명의 작가와 함께하는 <KUNST TALK>를 기획하여 운영했다. 현재는 국내의 오프라인 지면과 온라인 플랫폼에 시각 및 공연 예술을 주제로 한 글을 기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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