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신만의 소중한 영화 리스트가 존재한다. 각자 다양한 이유로 그 리스트를 꾸릴 텐데, 남녀노소 상관없이 많은 이들이 뽑는 영화 중 하나가 <이터널 선샤인>이다. <이터널 선샤인>과 관련해서 미셸 공드리의 영상미와 짐 캐리,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를 많이 언급하는데, 사실 가장 큰 공은 찰리 카우프만(Charlie Kaufman)의 각본이 가진 이야기의 힘이 아닐까 싶다. 기억을 지우는 병원이라는 설정을 통해서 만남부터 이별까지의 사랑의 과정을 보여줬고, 관객들은 그 이야기에 공감하며 <이터널 선샤인>을 마음 안에 사라지지 않는 빛처럼 아로새겼다. 

연기 디렉팅 중인 찰리 카우프만(왼쪽)

<이터널 선샤인> 이전에 찰리 카우프만이 각본을 쓴 <존 말코비치 되기>는 배우 존 말코비치의 머릿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을 발견하는 설정으로 시작한다. 그의 상상력은 감독으로 데뷔한 이후 발표한 <시네도키, 뉴욕>과 <아노말리사>에서도 계속된다. 내면에서 갈등하는 자아에 대해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독특하게 표현해서 잊을 수 없는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찰리 카우프만의 이야기들을 살펴보자.

 

<존 말코비치 되기>

Being John Malkovich|1999|출연 존 쿠삭, 카메론 디아즈, 캐서린 키너, 존 말코비치

인기 없는 인형극을 업으로 삼는 인형 조종사 ‘슈와츠’(존 쿠삭). 동물을 관리하는 아내 ‘라티’(카메론 디아즈)의 권유로 다른 일을 찾아보고, 우연히 신문광고를 통해 한 회사에 지원하게 된다. 그는 7과 1/2층에 위치한 회사에서 서류정리 하는 일을 하게 되고, 그곳에서 ‘맥신’(캐서린 키너)과 사랑에 빠진다. 맥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고민하던 슈와츠는 우연히 사무실 벽에 뚫린 문을 발견하고, 그 문을 통해 배우 ‘존 말코비치’(존 말코비치)의 머릿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일상에서 한 번쯤 해봤을 생각을 크게 확장해서 뒤틀린 세계를 만들어버리는 게 찰리 카우프만 각본의 특징 중 하나다. <존 말코비치 되기>는 타인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보고 싶다는, 누구나 해봤을 상상을 기반으로 진행된다. 슈와츠가 평소에 인형극을 하면서 인형의 역할에 몰입하는 과정은 존 말코비치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많이 다르지 않다.

<존 말코비치 되기> 트레일러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은 것 같고, 아침의 나와 저녁의 내가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누구나 수많은 자아가 내면에서 충돌함을 느껴본 적 있을 거고, 그런 면에서 우리는 모두 <존 말코비치 되기> 속 존 말코비치와 같은 입장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머릿속으로 출입하는 문을 알지 못할 뿐, 우리는 주변에서 영향받은 것들을 머릿속으로 입장시키고 있다. 어쩌면 아이러니하게도 완전하지 못한 자신을 인정하는 게 성숙을 위한 시작점일지도 모르겠다.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2004|출연 짐 캐리, 케이트 윈슬렛, 커스틴 던스트, 톰 윌킨슨

출근길에 충동적으로 회사 대신 몬탁으로 떠나는 ‘조엘’(짐 캐리). 조엘은 그곳에서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을 만나서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사실 이 둘은 연인이었다. 다만 기억을 지우는 병원에서 기억을 지웠을 뿐. 조엘은 지워지는 기억 안에서 클레멘타인을 잊지 않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한다.

좋은 영화는 볼수록 새롭다. <이터널 선샤인>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이유도 볼수록 더 매력적인 찰리 카우프만의 각본 때문일 것이다. 조엘이나 클레멘타인뿐만 아니라 어떤 인물의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영화가 주는 감흥의 결이 다르다. 사랑은 현실에서나 영화에서나, 어떤 시점에 누구의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인다.

<이터널 선샤인> 트레일러

<이터널 선샤인>에서 기억을 지우는 병원의 직원들은 ‘망각은 축복’이라는 니체의 말을 언급한다. 사랑 때문에 상처받고 슬퍼도 우리는 다시 사랑을 꿈꾼다. 우리가 잠들어 있는 동안 기억을 지워주는 병원에서 주기적으로 조치를 해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망각 덕분에 우리는 아팠던 순간을 잊고, 행복을 위한 사랑을 시작한다. <이터널 선샤인>을 통해 만남부터 이별까지로 정리되는 사랑의 과정에 생략된 ‘망각’을 발견한다.

 

<시네도키, 뉴욕>

Synecdoche, New York|2007|출연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캐서린 키너, 사만다 모튼, 미셸 윌리엄스

죽음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사는 ‘케이든’(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은 연극연출가다. 그의 아내인 화가 ‘아델’(캐서린 키너)는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딸과 함께 떠난다. 아내가 떠나고 케이든은 극장직원인 ‘헤이즐’(사만다 모튼)에게 관심을 가지지만 관계는 진전되지 않고, 자신의 연극에 출연하는 배우 ‘클레어’(미셸 윌리엄스)와 결혼하지만 헤어진다. 삶에 대한 회의가 커지는 와중에 케이든은 큰 규모의 연극을 할 기회를 얻고, 자신의 삶을 연극으로 연출하려고 한다.

찰리 카우프만의 연출 데뷔작인 <시네도키, 뉴욕>의 제목에 쓰인 시네도키(synecdoche)는 상위개념과 하위개념을 서로 바꾸어 말하는 제유(提喩)를 뜻한다. <시네도키, 뉴욕>의 가장 대표적인 제유라면 삶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연극이 삶이 된다는 거다. 케이든은 자신의 삶이 진행됨에 따라 연극에 똑같이 삶의 장면을 추가한다. 어느 순간부터는 연극이 삶을 재연하는 건지, 연극을 위해 삶을 사는 건지 의구심이 든다.

<시네도키, 뉴욕> 트레일러

케이든은 삶에서 가치가 주객전도 되는 순간들을 돌아보게 만드는 캐릭터다. 죽음에 대해 걱정하느라 살아있음에도 죽은 이들보다 죽음에 더 가까워 보이는 인물이고, 옆에 사랑하는 이가 있음에도 과거에 사랑했던 이에게 미련을 가져서 현재의 사랑을 놓친다. 불행한 미래나 과거에 대한 미련이 케이든을 현재에 머물지 못하게 만들고, 그의 삶이 이렇다 보니 연극도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삶을 연극으로 압축해서 보여주는 작업은 중요한 기억을 선별하는 작업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시네도키, 뉴욕>은 결국 자신의 삶을 연극으로 올린다면 어떤 장면을 고를지에 대한 물음을 여운으로 남긴다.

 

<아노말리사>

Anomalisa |2015

고객서비스 관련 권위자인 ‘마이클 스톤’은 강연을 위해 신시내티에 간다. 그는 여러 사람을 모두 동일인으로 인식하는 프레골리 망상에 시달리고 있다. 신시내티의 호텔에 머무는 마이클은 외로움에 옛 애인에게 연락을 하고 만나지만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다. 그러던 중 호텔의 다른 객실에 투숙 중인, 남들과 다른 특별한 목소리를 가진 ‘리사’를 보고 첫눈에 반한 마이클은 그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찰리 카우프만의 두 번째 연출작인 <아노마리사>는 찰리 카우프만이 각본을 쓰고 코엔 형제가 연출한, 목소리만으로 진행되는 극을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이다. 제목인 ‘아노말리사’는 이례적, 변칙적이라는 뜻의 ‘아노말리(Anomaly)’와 마이클이 사랑에 빠지는 ‘리사’의 합성어다. 마이클은 프레골리 망상이기 때문에, 리사를 제외한 남녀노소 모든 캐릭터의 목소리는 동일하다. 그러므로 리사의 목소리가 남들과 똑같이 들리는 순간은 마이클의 마음이 식었음을 뜻한다.

<아노말리사> 트레일러

사랑의 시작은 늘 특별하다. 끝이 났기에 특별하지 않다고 판명된 지난 사랑과 비교도 안 될 만큼 비범하게 느껴지기에 사랑은 시작된다. 그러나 영원히 특별할 것 같던 사랑도 설렘이 떠나고 나면 지난 연애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특별함을 발견했다가 잊어버린 건 나 자신인데, 상대의 매력을 탓하기도 한다. 마이클도 만들어낸 특별함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평범함에서 사랑을 느낄 때 사랑도 지속 가능하지 않을까.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