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노동요는 ‘부르는’ 음악이었다. 일의 지루함을 잊고 능률을 높이기 위해 흥얼거리는 노래를 뜻했던 노동요는 이제 일을 하며 ‘듣는’ 음악으로 그 의미가 확장됐다. 당신의 작업 능률을 높여줄 노동요 9곡을 인디포스트의 시각으로 골랐다.
에디터 최은제
노래를 찾는 사람들 ‘사계’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은 민중가요의 일종인 노동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팀이다. 1987년 첫 앨범을 발표해 1994년 4집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일반 대중들이 생활 속에서 느끼고 따라 할 수 있는 노래들을 많이 만들어 보급했다. 그중에서도 대중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라면 ‘광야에서’, ‘그날이 오면’, ‘오월의 노래’ 같은 굵직한 곡들이 수록된 2집을 꼽을 수 있다. 경쾌하고 단순한 건반 연주가 돋보이는 ‘사계’도 2집 수록곡. 당시 고단했던 공장 노동자들의 삶을 표현한 가사는 씁쓸하고 애잔하지만, 그런 건 잠시 제쳐 두고 경쾌한 멜로디에 집중해 들어보자. 박나래가 예능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해 이 노랠 틀어 놓고 신나게 재봉틀을 돌렸듯이, 노동의 능률을 돋우기에 더할 나위 없는 선곡이다.
<싱 스트리트> OST
1980년대 아일랜드 더블린을 배경으로, 그 당시 유행했던 신스팝, 디스코 등 음악 장르를 한껏 녹여낸 영화 <싱 스트리트>의 관전 포인트는 단연 사운드 트랙이다. 듀란듀란, 아하, 모터헤드, 더 잼 같은 1980년대를 주름잡았던 전설적인 브리티시 팝부터 영화를 위해 새롭게 만든 ‘Drive It Like You Stole It’, ‘The Riddle Of The Model’, ‘To find you’ 등 주옥 같은 메들리가 작업 텐션을 단번에 끌어올려 준다.
incise <Circuts>
단순노동이 아닌 과제나 업무를 집중해서 해야 할 때는 가사가 있는 노래보다 잔잔한 인스트루멘탈이 제격이다. 캐나다 출신의 재즈힙합 뮤지션 incise가 2015년 발매한 <Circuts>는 이런 상황에 재생하기 딱 좋은 음반. 멜로우하고 재지한 그루브뿐 아니라 앨범 전체에 질벅하게 깔린 일렉트로닉, 엠비언트 사운드가 분위기를 더욱 짙고 풍성하게 만든다. 작업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중간중간 듣는 재미를 충족시켜주는 앨범.
에디터 김유영
엑소 ‘EXODUS’
귀찮은 일을 즐겁게 하려고 듣는 노래가 노동요라면, 그 리스트에서 아이돌 음악을 뺄 순 없다. 아이돌 음악만이 가지는 개성은 듣는 사람의 혼을 쏙 빼놓으며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이게 한다. 명곡이야 무수히 많지만, 이번엔 엑소의 정규 2집 <EXODUS>(2015) 수록곡 ‘EXODUS’를 소개한다. 이 노래는 아이돌 음악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을 다 가졌다. 다양한 국적의 작곡가 세 사람이 만든 멜로디는 비장하면서도 우아하며, 가사는 ‘날 파괴할 만큼 매혹적인 대상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모습’을 직관적인 언어로 그려낸다.
넌 투명한 유리의 성벽 보석처럼 빛나다
네 안에 나를 가둬
네 달콤한 품, 난 나약한 King
너 아닌 모든 걸 전부 잃었으니
날 가둔 네 품, 저 너머의 길
그 빛을 향해 난 너를 탈출하리
Exodus Exodus, It's my Exodus
‘EXODUS’ 가사 가운데
한 편의 판타지 소설처럼 서사를 품은 가사는 아이돌 음악이 갖는 또 다른 매력이다. 그러나 이 장르를 끝내 완성하는 건 잘 짜인 세계관을 체득하고 무대에서 구현해내는 가수다. 그런 면에서 엑소는 훌륭한 아티스트다. 덧붙여 ‘EXODUS’ 무대에선 도입부의 디오와 마지막 후렴부 춤추는 카이를 놓치면 안 된다(이 안무에서 그 유명한 ‘지갑 찾는 카이’ 짤이 탄생했다!).
Lykke Li ‘I Follow Rivers’
2013년 개봉한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무한한 애틋함을 남긴 어떤 사랑을 보여준다. 머리칼을 파랗게 물들인 ‘엠마’(레아 세이두)는 모두의 시선을 끌 만큼 신비로운 인물. 그에 비해 ‘아델’(아델 엑사르코풀로스)은 평범하고 솔직한 소녀다. 런닝타임 180분 동안 둘의 감정을 좇는 영화는 섬세한 장면으로 가득하지만, 특히 잊을 수 없는 신이 있다. 그중 하나가 아델의 생일 파티 장면. 사랑에 빠진 데다 언제나 순간에 충실한 소녀는 누구보다 자유롭게 춤춘다. 이때 깔리는 노래가 스웨덴 뮤지션 Lykke Li의 ‘I Follow Rivers’다. 둔탁한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단순한 가사가 인상적인 곡은 사랑만을 원하는 아델의 모습과 더할 나위 없이 맞아떨어지며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래 남는다. 반복적이고 지겨운 일을 할 때 목청껏 따라 부르기 좋은 노래.
나플라 ‘gra gra (feat. loopy)’
지금 가장 뜨거운 래퍼는 단연 나플라와 루피다. 탄탄한 실력, 따라 하기 어려운 개성, 온몸으로 뿜어내는 스타일리시함까지 갖춘 이들이 이제야 제대로 주목받는 것은 오히려 늦었다고 말해야 한다. 나플라와 루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을 지녔으면서도 함께할 때 시너지가 엄청나다. 두 래퍼의 매력을 모두 느낄 수 있는 트랙 중 에디터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나플라의 정규 1집 <ANGELS>(2017)에 수록된 ‘gra gra’. 아무 생각 없이 틀었다가도 흥이 올라 뭐든 하고 싶어지는 노래라서다. 특히 중반부 나플라의 훅이 끝나자마자 치고 들어오는 루피의 벌스는 극도의 쾌감을 선사한다. 이 노랠 들으면 ‘걸려오는 전화 안 받’고 그냥 나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어진다.
에디터 정병욱
로베르트 슈만 ‘피아노 협주곡(Piano Concerto in A minor, Op. 54)’
글을 쓰거나 문서를 작성할 때 매번 노동요를 재생하지는 않는다. 백색소음은 괜찮지만 음악은 집중에 방해될 때가 더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씩 노동요가 필요한 순간 몇 가지 제한 조건에 따라 음악을 고르기도 한다. 가사가 없는 곡, 업무에 활기를 주기 위해 밝고 평화로운 곡, 그렇다고 너무 화려하거나 경박하지는 않은 곡, 익숙해서 귀를 자세히 기울이지 않아도 되고, 그럼에도 오래 들었을 때 지루하지 않은 곡. 19세기 작곡가 슈만(Robert Schumann)이 남긴 단 하나의 피아노 협주곡인 이 곡은 위의 조건에 딱 들어맞는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조화가 아름답고 무게감도 적당해서 결코 일을 방해하지 않는다.
잠비나이 ‘Grace Kelly’
음악을 듣는 일 자체가 노동이 될 때가 있다. 듣고 싶은 음악을 골라서 듣는 게 아닌 좋든 싫든 특정한 음악을 반드시 들어야만 하는 순간. 특히 감상 노동이 연속으로 3번, 4번 이상 이어질 때는 중간쯤 다음 노동을 위한 일종의 준비 시간을 갖는다. 이때는 음악을 안 듣거나 고요한 음악을 듣기보다 소음에 가까울 만치 시끄럽고 꽉 찬 사운드를 찾아 듣게 된다. 이전의 감상이 이후 감상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감정의 퍼즐을 초기 상태로 섞어 놓는 것과 같다. 잠비나이 데뷔 EP에 수록된 ‘Grace Kelly’가 적당하다. 3분가량의 길지 않은 러닝타임 동안 짧고 굵게 몰아치는 소리의 폭풍이 마음의 방을 말끔히 청소해준다.
텐거 ‘Ollim’
집에서 가사 노동을 할 때는 유난히 잡념이 많이 생긴다. 그렇다고 다른 일과 생각을 병행하여 허투루 해서는 집안일을 잘 해낼 수 없다. 이때의 적당한 타협점 중 하나는, 텐거(Tengger)의 음악을 듣는 것이다. ‘경계 없는 큰 하늘’이라는 뜻의 팀 이름처럼 다양한 예술은 물론 일상의 삶과도 경계 없이 어울리는 텐거의 음악은 반복되는 작업 때 틀어 놓기에 제격이다. 가사나 평범한 멜로디 구간 하나 없이 천천히 꿈처럼 부유하는 음악이 무념무상에 빠지게 해 노동에 더욱 몰두할 수 있게 해준다. 때로는 기도하는 심정이 되어 노동을 마치고 나면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복잡하고 힘든 감정들을 떨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메인 이미지- <리틀 포레스트>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