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있는 그 노랠 찾아서
내가 살고 싶은 그 집을 찾아서
내가 사랑할 그 사람을 찾아서
내가 되고 싶은 가족을 찾아서

이건 뭔가 되게 크게 잘못된 것 같아
이건 뭔가 되게 크게 잘못된 것 같아
이건 뭔가 되게 크게 잘못된 것 같아
잘못된 것 같아

위는 이랑이 부른 ‘가족을 찾아서’의 가사 일부를 따온 것이다. 이 노래 속 화자는 현재 속한 가족에게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끼며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꾸리고 싶어 한다. 이런 화자의 마음은 ‘가족’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우리가 원하는 가족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오랜 시간 동안 관습화 되며 굳혀진 ‘가족’이란 개념은 이제 각 구성원을 보듬는 따뜻한 울타리보다, 각자에게 정해진 역할을 부여하고 굴레를 씌우는 존재로 변질되고 있다. 그렇기에 이제 자신의 가족을 꾸릴 기로에 선 현대 2030 세대는 그런 관습을 이어가기보다 자신이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찾아 나가고자 하고 있다.

이랑 ‘가족을 찾아서’

전통적인 핵가족 형태를 벗어나 새로운 가족을 일구길 바라는 청춘들에게 실마리가 되어줄 작품이 있다. 자신을 이끌어줄 ‘어른/부모님’이란 존재 없이도 서로 싸우고 부딪히고, 또 위로해주다 함께 성장하는 청춘들의 대안 공동체가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그들이 일궈 나간 공동체는 언제라도 없어질 듯 위태위태하고 취약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가족이란 굴레 없이 서로를 진심으로 채워주기에 안정감을 안겨주는 울타리가 되기도 한다. 아래 작품들을 통해 청춘들이 자신에게 위안을 주지 못했던 가족을 벗어나 새롭게 꾸려낸 공동체가 가질 가능성을 가늠해보자.

 

<프렌즈>

미국의 1990년대를 휩쓸었던 TV 드라마 <프렌즈>는 우리 사회 속 2~30대 청년이라면 누구나 겪는 커리어, 사랑, 관계 등에 대한 고민을 유머러스하게 담은 시트콤 명작으로 꼽히고 있다. <프렌즈>가 많은 사랑을 받은 건 당대 청년들의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뤄서이기도 하지만 6명의 ‘프렌즈’들이 우정으로 똘똘 뭉쳐 붙어 다니는 모습이 많은 이들에게 위안을 안겼기 때문이다. <프렌즈> 속에 나오는 6명의 주인공은 밤이든 낮이든, 출근하는 날이든 쉬는 날이든 항상 일상을 함께 보낸다. 그들은 주로 ‘센트럴 퍼크(Central Perk)’라는 카페나 모니카의 집에 모여들기 때문에 <프렌즈>의 배경 역시 이 두 공간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프렌즈’들에겐 서로의 집을 넘나들며 일상을 함께 보내는 게 너무나도 자연스럽기 때문에 모니카의 집 문이 잠겨 있는 일도 거의 드물다.

매일 만나는 카페에 여느 날처럼 모여 수다를 떨고 있는 주인공들

<프렌즈> 속 주인공들은 매일 붙어 다니는 단짝을 넘어서 인생의 굴곡을 함께 맞는 인생의 동반자로 거듭난다. 그들은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설날과 같이 중요한 명절뿐만 아니라 직장에서 승진 혹은 해고됐을 때, 아이를 임신한 소식을 접했을 때, 결혼을 결심한 순간 등 인생의 중요한 시기가 닥칠 때마다 언제나 함께 한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 가족보다도 더욱 진심으로 서로의 기쁨을 축하하고 슬픔을 위로한다.

’피비’의 임신 소식을 듣고 함께 기뻐하는 친구들

사실 각 캐릭터는 자신의 가족에게 큰 유대감이나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거리감을 느끼는 편이다. ‘모니카’는 어릴 적부터 집에서 오빠와 비교를 당해왔고 ‘챈들러’는 에로 소설을 쓰는 엄마와 드래그 퀸인 아빠 사이에서 정체성의 회의를 느끼며 냉소적으로 변했다. ‘레이첼’은 가부장적인 아빠, 세상 물정 모르는 엄마, 자매들 사이에서 독립성 없이 컸으며 ‘피비’는 함께 자라온 가정이 없는데 유일한 혈육인 쌍둥이 언니에게조차 무시를 받는다.

추수감사절을 모니카의 집에서 함께 보내는 친구들. 매해 명절을 자신들의 가족들 아니라 6명의 친구들끼리 함께 보낸다

가족으로부터 독립한 주인공들은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불안정한 격동의 20대를 함께 보낸다. 서로 머리채를 잡고 싸우고, 철없고 장난도 치는 치기 어린 시기를 보내지만, 결국엔 서로의 관계를 통해 더욱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한다. 모두가 불안정하고 위태롭기에 서로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무슨 일이든 서로 응원해주기에 공동체 안에서 주인공들은 가족과 함께할 때보다도 더 자유롭고 강인하게 자신의 인생을 설립해 나간다. 함께 놀러 다니며 시간을 때우는 무리였던 ‘프렌즈’는 서로에게 진정한 소속감과 성장의 기회를 안겨주는 공동체로 거듭난 것이다.

<프렌즈>의 마지막 장면. 모니카와 챈들러가 교외로 이사하게 되며 매일을 함께 보내던 집을 비우는 순간이다

드라마 후반, 30대 중반이 된 주인공들은 각자 가정을 꾸리고 그 삶에 정착하며 친구들과의 시간은 우선순위 뒤쪽으로 밀려난다. 그렇게 나이를 먹고 변하는 모습은 우리네 현실을 일깨워줘 씁쓸함을 안긴다. 그렇지만 그들이 10년의 세월 동안 함께 쌓아왔던 끈끈한 유대는 시간이 흘러도 결코 사라지지 않기에 <프렌즈>를 지켜보는 우리들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된다.

 

<렌트>

<프렌즈>가 사회 속 보편적인 청년들이 만든 유대를 보여줬다면 다음 소개할 작품은 사회에서 소외됐던 아웃사이더들이 모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함께 직면하는 공동체를 만드는 이야기를 다룬다. <렌트>는 1990년대 오프-브로드웨이에서 개막한 뮤지컬로 당시 극장의 관습을 깨고 마약, 동성애, 에이즈 등 사회적 이슈를 전면으로 내세워 큰 반향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2000년을 앞두고 혼돈이 가득한 뉴욕 뒷골목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렌트>는 그 안에서 살아가는 젊고 가난한 예술가들의 고통, 희망, 사랑과 그들이 함께 맞이하는 ‘오늘’에 대해 노래한다.

2005년 개봉한 뮤지컬 영화 <렌트>의 대표곡 중 하나인 ‘Seasons of Love’를 부르는 장면

<렌트> 속 주인공들은 집세와 난방비도 못 낼 정도로 가난한 청년들이다. 그리고 주요 캐릭터 중 절반은 HIV 양성 반응자로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는 불투명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사회 변두리로 쫓겨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이들은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오늘’을 함께 모여 자본가에게 저항하고, 사랑을 나누고 축제를 벌이며 뜨겁게 살아간다.

뮤지컬 <렌트> 1막의 마지막 장면. 등장 인물들이 다 같이 ‘Viva La Vie Boheme!(보헤미안의 삶을 살라!)’라고 외치고 있다

흥미로운 건 작품 중간 중간에 주인공들의 가족이 잠깐씩 나오는데 그들은 온전한 캐릭터로서 등장하지 않고 일인다역을 펼치는 앙상블의 연기 속에서 스쳐가듯 등장한다. 오로지 전화 응답기 소리로 등장하는 그들은 모습은, 주인공의 삶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아끼기보단 사회의 관습을 강요하고 딱딱한 잔소리를 퍼붓는 귀찮은 소음의 형태에 가깝다.

앙상블들이 중간 중간에 연기하는 부모님의 모습. 매번 전화 응답기로 할 말을 전한다
2008년 브로드웨이에서 마지막으로 한 공연을 녹화한 실황. ‘What You Own’을 부르는 장면이다

What was it about that night?
Connection
In an isolating age
For once the shadows gave way to light
For once I didn't disengage

- <렌트> 속 ‘What You Own’ 가사 중

‘What You Own’은 <렌트>의 주요 인물들인 ‘로저’와 ‘마크’가 극 후반부 거의 마지막 장면에서 부르는 노래다. 그들은 새로운 2000년이 시작되기 직전 미국에서 죽어가고 있는 자신들의 상황에 대해 노래한다. 위의 가사에서 그들은 그토록 혼란스럽던 날들 중 자신들이 우연히 모여들었던 ‘그날 밤’을 떠올리고 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가난과 외로움으로 고립되어가던 중 서로 마주치고, 어두운 밤을 함께 보내며 서로에게 작은 불빛이 되어준 그 순간 말이다. 그들에겐 서로의 따듯한 온기, 우정과 사랑이 위태로운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유일한 이유다. 이처럼 <렌트>는 젊은 예술가들이 처했던 어두운 현실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면서도 그 어느 작품보다도 희망, 사랑과 공동체의 힘에 대해 절실하게 부르짖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경계가 다 찢겨 나가고 있는 이 위험천만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매일 죽음의 얼굴을 직면하며 사는 이들에게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20세기 말 삶의 공포에 질린 우린 이렇게 숨어 있지 말고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며,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 <렌트>의 작곡가이자 극작가인 조나단 라슨이 남긴 메모

위는 <렌트>를 창조해낸 조나단 라슨이 죽기 전에 자신의 컴퓨터에 남긴 메모라고 한다. 조나단 라슨은 예술을 위해 안정된 삶을 뒤로한 채 뉴욕 옥상 집에서 최소한의 생계비로 사는 삶을 택했다. 동시에 에이즈에 걸린 친구들이 죽는 것을 매일 지켜봐야 했던 그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삶을 살아가는 자신과 그 친구들의 삶을 <렌트>에 고스란히 투영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렌트>가 세상에서 빛을 보기 직전, 동맥류 혈전으로 갑작스럽게 쓰러지며 30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렇기 때문에 <렌트> 속 주인공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에게 더더욱 살아있는 존재처럼 다가온다.

뮤지컬 <렌트>를 탄생시킨 조나단 라슨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서로에게 손 내밀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오늘을 함께 살아가자고 했던 조나단 라슨은 20년이 지난 오늘날의 청년들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그의 말처럼 어딘가에 숨어서 살고 있는 우리들 역시 조금씩은 손을 뻗어, 삶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만들어나가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도 조금은 더 뜨거운 오늘을 살아갈 수 있지 않겠냐고 <렌트>(그리고 <렌트>에 자신의 삶을 바친 조나단 라슨)는 열렬히 외치며 막을 내린다.

<렌트> 속 연인들

 

필자 소개
Jude (김유영)
텅 빈 무대와 백 스테이지, 사람들 간의 복작거림이 좋아 오랫동안 무대 근처에서 머물고 싶은 아마추어 연출가입니다. ‘아마추어’의 어원은 Amor(사랑)에서 비롯됐다는데, 그 애정 어린 시선을 간직해 공연, 영화, 책 등 다양한 작품을 소개할 수 있는 문화예술 큐레이터를 꿈꾸고 있습니다.

 

Writer

소소한 일상을 만드는 주위의 다양한 것들을 둘러보길 좋아합니다. 무엇보다 ‘이야기’들엔 사람들의 일상을  단단하게 지켜주는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믿음을 갖고 공연, 영화, 책 등 여러 장르의 작품을 소개해, 사람들의 일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문화예술 큐레이터가 되길 꿈꾸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