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현대미술을 어렵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 속에 담긴 메시지를 이해하려 애쓰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기존의 미술 영역을 넘어선 개념미술가들의 자유로운 작업 중에는 작가가 표현하려는 메시지가 단번에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 흔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텍스트를 활용한 작품은 조금 다르다. 잘 알려진 설치 미술가들 중에서도 텍스트를 통해 생각을 직접적으로 표현해낸 이들이 있다. 바바라 크루거, 크리스토퍼 울, 제니 홀저, 브루스 나우먼 등의 작가들은 텍스트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명료하게 드러내거나, 불특정 다수인 관람자들과 소통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또 작업의 재료로 텍스트를 활용하기도 한다. 최근 눈에 띄는 몇몇 아티스트들의 텍스트 작업을 소개한다. 그들은 세상을 향해 어떤 메시지를 내놓았을까?

 

트레이시 에민, “I Want My Time With You”

트레이시 에민, <The Last Great Adventure Is You>, 2014년 화이트 큐브 갤러리 전시 작품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은 회화, 드로잉, 비디오, 설치, 사진 등 다양한 매체를 이용해 작업하는 영국 아티스트. 그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자신이 실제로 사용하던 침대를 옮겨온 설치 작품이지만 세계적 아트페어에는 패브릭을 이용한 자수 작품과 네온을 이용한 텍스트 작품도 종종 등장해 거래된다. 네온 작품에 쓴 문구로는 ‘You Touch My Soul’, ‘The Last Great Adventure Is You’, ‘I Kiss You’ 등 로맨틱한 텍스트도 많다.

킹스크로스역에 설치된 트레이시 에민의 네온 작품, <I want my time with you>

그가 지난 2018년 4월 런던 킹스크로스역에 설치한 것은 <I want my time with you>라는 20m 길이의 거대한 네온 작품. 그는 이 작품을 간단하면서도 물음표가 붙는, 열려 있는 메시지라고 설명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기차역이므로 가족이나 애인 등 사랑하는 이들을 향한 로맨틱한 메시지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킹스크로스역이 유로스타가 도착하는 영국의 관문 중 한 곳이므로 트레이시 에민이 브렉시트를 비판하며 유럽 사람들에게 전하는 따스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시계 아래에 자리한 핑크 컬러가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다.

 

제니 홀저, “STUDENTS WERE SHOT”, “MEN DON'T PROTECT YOU ANYMORE”

Jenny Holzer, Tate Modern, London, 2018 © 2018 Jenny Holzer, member Artists Rights Society (ARS), NY Photo: Jack Hems

뉴욕을 기반으로 작업하는 미국 아티스트 제니 홀저(Jenny Holzer)는 추상미술을 하다 1970년대 후반부터 개념미술로 전환했다. 자신이 직접 쓴 문장이나 문학가의 텍스트에서 차용한 문장을 LED로 작업하거나, 프로젝션으로 건물 외벽에 투사한 공공미술 작품을 선보이는 등 텍스트 아트를 활발하게 작업하고 있다. 그는 난민과 테러리즘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내놓았으며, 2018년 2월 플로리다주에서 총기 난사 사건으로 17명의 학생들이 사망하자 “STUDENTS WERE SHOT”을 비롯해 총기에 반대하는 여러 강렬한 메시지를 붙인 트럭을 미국 곳곳에 보내기도 했다. 또 ‘소년과 소녀를 같은 방식으로 키워라(RAISE BOYS AND GIRLS THE SAME WAY)’, ‘남성은 더 이상 당신을 지켜주지 않는다(MEN DON'T PROTECT YOU ANYMORE)’ 등의 직설적인 텍스트를 통해 사회활동가이자 페미니스트로서의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제니 홀저는 세계 곳곳에서 전시를 이어오고 있는데, 지난여름부터 런던의 테이트 모던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망라한 전시 <Artist’s Rooms: Jenny Holzer>가 개최 중이며, 이 전시는 2019년 7월 31일까지 계속된다.

Jenny Holzer, Tate Modern, London, 2018 © 2018 Jenny Holzer, member Artists Rights Society (ARS), NY Photo: Jack Hems

 

마틴 크리드, “EVERYTHING IS GOING TO BE ALRIGHT”

마틴 크리드, <Work No. 203: EVERYTHING IS GOING TO BE ALRIGHT>, 1999년 공공미술 작품으로 제작됐다가 2018년 테이트 모던 10층에 다시 등장했다.

마틴 크리드는 2001년 영국의 현대미술상인 터너상 수상자로 잘 알려진 미술가이자 음악가. 당시 그의 설치 작품 <Work No. 227: The lights going on and off>는 텅 빈 갤러리 공간에 불이 5초 간격으로 꺼졌다 켜졌다 반복하는 작품이었다. 당시 이것이 무슨 미술 작품일 수 있냐고 항의하는 관람객도 있었지만, 관람객들의 기대를 무너뜨린 그의 작업은 미술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에 충분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미술을 선보인 그가 네온을 활용한 텍스트 작업을 통해서는 비교적 선명한 메시지를 내놓는다는 것이다.

마틴 크리드, <Work No. 232: the whole world + the work = the whole world>

2000년 발표한 <Work No. 232: the whole world + the work = the whole world>는 런던 테이트 브리튼 외관에 설치한 가로 15.5m 길이의 작품. 예술의 포괄성에 대한 메시지다. 또 13m 길이의 <Work No. 203: EVERYTHING IS GOING TO BE ALRIGHT>은 해크니 지역의 공공미술 작품으로 제작된 것으로, 1999년 그의 첫 번째 공공미술 작업이자 첫 번째 네온 작품으로 공개됐다. 최근 이 두 작품이 실내 공간에 다시 등장했다. 각각 테이트 모던의 휴식공간과 엘리베이터 위 벽면에 작품답지 않은 작품으로 설치된 것. 현대적인 갤러리 공간과 잘 어울리며, 전시실 내부에 설치된 것은 아니지만 쉽고 긍정적인 메시지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메인 이미지 트레이시 에민 <I want my time with you>, 출처 – GO LONDON 

 

 

Writer

잡지사 <노블레스>에서 피처 에디터로 일했다. 사람과 문화예술, 그리고 여행지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에세이 <마음이 어렵습니다>, <회사 그만두고 어떻게 보내셨어요?>, 여행서 <Tripful 런던>, <셀렉트 in 런던>이 있다.
안미영 네이버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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