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션스8> 홍보로 이뤄진 한 인터뷰에서의 일이다. 리포터는 배우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당신들이 맡은 범죄자 캐릭터가, ‘롤모델’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요?” 이에 케이트 블란쳇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남자 배우에게도 이런 질문을 하나요? 우리가 꼭 ‘롤모델’이 되어야 하는 건가요?”

위의 인터뷰 영상, 해당 질문은 4분 38초부터 시작한다

그리하여 롤모델이든, 악당이든, 탐욕스럽든 상관없이 그 자체로 강렬한 여성 캐릭터들을 모았다. 이들이 얼마나 영악하고 진취적이며 매력적인지 탐구해보자.

※ 소개하는 영화 4편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토르: 라그나로크> - 헬라

일 년에 몇 편씩 쏟아지는 마블 영화 중 기억에 남는 여성 캐릭터를 손꼽는 건 쉽지 않다. 여성 캐릭터들은 영웅의 비서이거나, 엄마 같은 애인이거나, 감초 역할의 들러리 정도이니까. 그러나 멀리 갈 필요 없이 강렬한 악역 캐릭터가 하나 있다. 바로 <토르: 라그나로크>의 ‘헬라(케이트 블란쳇)’다.

헬라는 ‘토르’(크리스 헴스워드), ‘로키’(톰 히들스턴)와는 남매 관계로 ‘오딘’(앤서니 홉킨스)의 딸이다. 토르는 묠리르를 잃고, 아스가르드 지역은 멸망했지만 겨우 그 백성들을 구해낸 일이 있다. 로키는 변신 외에 형을 여기저기 팔고 다니는 재주가 있다. 솔직히 두 남자는 그다지 영리하지 않다. 게다가 번번이 일을 그르치고, 혼자 난관에서 벗어나지 못해 언제나 도움을 받는 처지다. 생각해보라, 토르가 아버지 오딘 없이 어찌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는가.

왜 오딘은 번영의 아스가르드를 토르에게만 물려주려 했는가. 그가 아들이고, 순수혈통이기 때문에? 오딘이 죽자 헬라는 고향에 다시 돌아와 적극적으로 왕국을 다스리고 통치하겠다고 통보한다. 왕국 정복에 동참하면 그 영광을 모두 누릴 수 있게 하겠다는 제안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모두 헬라를 무시하자, 그는 “날 보면 기뻐할 줄 알았는데”라며 진심으로 실망한다.

북유럽 신화에서 라그나로크는 최후의 종말이나 대재앙을 뜻한다. 영화 속에서 오딘과 두 아들은 헬라가 그들이 생각하는 라그나로크, 즉 대재앙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혼돈의 라그나로크를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오딘이었다. 과거 오딘의 정복 전쟁에서 헬라는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그러나 헬라의 야망이 커지자 ‘포악해지고 통제할 수 없다’라는 이유로 그를 추방하고 우리에 넣어 짐승처럼 가둬버렸었다. 그리고 당시 함께 싸우던 영웅들 역시 왕궁 지하에 묻었다.

헬라는 도움 없이 ‘혼자서’ 죽은 군대를 되찾는다. 토르와 로키가 쓸데없는 말다툼을 벌이던 동안 말이다. 마블의 세계관에서도 강력한 힘의 상징인 토르의 망치조차 유리컵 부수듯 깨뜨릴 정도로 헬라는 막강한 힘을 가졌다. 헬라 그의 방식이 다른 영웅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착하지 않으며 고분고분하게 아버지의 말을 듣는 전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왕국을 되찾다 폭도가 되는 것, 최악의 통치자란 오명을 쓰게 된 일이 모두 아버지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즉, 아버지가 원하는 통치자에게 왕좌를 물려주기 위함 때문이었다.
헬라는 남들이 씌운 영웅 놀이에 갇히지 않고, 자신의 방식으로 왕국을 되찾으려 했던 죽음의 신이었다. 헬라가 ‘엑시큐셔너’(칼 어번)에게 보인 신뢰와 통치력을 본다면, 그의 강렬한 카리스마로 만든 왕국이 궁금해질 것이다. 우리는 그를 재조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토르: 라그나로크> 예고편

 

<나를 찾아줘> - 에이미

어느 날 갑자기 ‘에이미’(로저먼드 파이크)가 사라진다. 에이미는 한 마디로 완벽한 여자였다. 뉴욕에서 태어나고 자라 세련된 취향을 가졌으며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지만 남자들 앞에서 잘난 체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질척하게 굴지도 않았다. 또한 어릴 적부터 그를 캐릭터화한 <어메이징 에이미>란 그림책의 인기로 성인이 된 이후에도 주목받는 삶을 살아왔다. 이러한 부인이 하루아침에 실종되었으니 남편 ‘닉’(벤 에플릭)은 야단법석하며 동분서주해야 할 것 같지만 어쩐지 그는 심드렁하다. 심지어 그들의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 아침에 벌어진 일인데 말이다.

수사가 계속될수록 닉은 불리해져만 간다. 그도 그럴 것이, 닉은 에이미의 친구 관계에 무지하고 에이미가 평소 여가시간에 무엇을 하는지, 아는 것이 하나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닉은 나이 어린 애인까지 숨겨두고 있었다. 천천히 과거를 반추할수록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실직 후, 닉의 고향인 뉴저지로 이사했다. 닉의 어머니가 아프다는 이유였지만 모두 핑계처럼 느껴지는 일이었다. 게다가 에이미는 자신이 닉과 닉의 가족에게 초대받지 못한 것처럼 느꼈다. 에이미는 읊조린다. “그가 실수로 챙겨 온 짐이 된 기분이다. 필요 없으면 가차 없이 버릴 수 있는 그런 짐.”

에이미는 더 이상 닉에게 특별한 여자가 아니고, 뉴저지는 에이미를 특별하게 만들어주지 못한다. 게다가 닉이 집을 비우는 횟수는 잦아졌고, 그는 에이미에게 “다른 여자들처럼 질척하게 굴지 말라”고 종용한다. 아이를 원치 않았던 그는 절박한 상황 속에 빠지자 임신이 이 고난을 해결해주지 않을까 잠시 고민한다. 에이미가 끝끝내 놓지 않으려 했던 자신의 신념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던 것이다.

사실 에이미는 이 실종의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는 철두철미한 계획의 실행자였다. 닉에게 줄 형벌의 실행자. 에이미는 이렇게 독백한다. “닉은 내가 연기한 여잘 사랑했다. 쿨하고 핫한 여자. 그런 여자는 잘 맞춰주고, 재미있고, 화내지도 않아. 사랑스럽게 웃으며 남자 거시기에 입을 맞추지. 원한 대로 해줬어. 전부 다 맞춰줬다고.” 에이미는 닉이 원하는 여성이 되고자 헌신했다. 하지만 결국 ‘사랑’이라고 여겼던 것까지 배반당했을 때, 그는 연극적인 자아를 소멸시킨다. 그러니 다소 과격하긴 하지만, 에이미가 자신에게서 닉을 지우는 과정은 자아를 되찾는 모험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이 모험은 굉장히 흥미롭고 통쾌하다.

닉이 만든 자아에서 해방된 새로운 에이미는 그 어느 때보다 사람들에게 많은 주목을 받는다. “에이미가 남자를 조종하려 든다”라며 꺼림칙해 하던 남자들도 결국 에이미의 알 수 없는 매력에 붙들린다. 그것은 누가 뭐라 하든 뻔뻔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에이미의 ‘진취적인’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나를 찾아줘> 예고편

 

<언더 더 스킨> - 로라

미스터리한 여자 ‘로라’(스칼렛 요한슨). 한눈에 봐도 아름다운 외모의 그는 온종일 거리를 돌아다니며 남자를 찾는다. 어떤 남자를 찾는지 전혀 알 수 없지만 거리에서 만난 불특정의 남자들 중 혼자 사는 남자들에게만 집요한 질문을 던지고, 그의 차에 동승한 남자들은 곧 거리에서 사라진다.

길거리에서 ‘괜찮은 상대’를 물색하는 모습에 ‘헌팅’이라는 표현을 쓴다. 마치 대상을 끊임없이 찾는 과정이 사냥과 같기 때문일 거다. 영화 속에서 로라는 정말로 남자들을 사냥한다. 의심 없이 로라의 커다란 트럭에 덜컥 오르는 남자들은 그에게 거리낌 없이 사생활을 털어놓는다. 외부인에 대해 무감각할 정도로 위험을 느끼지 못한다. 로라가 위험한 시선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는 여성 관객들은 금세 아연실색할 것이다. 이 수상한 사냥에서 남자들은 죽음을 마주할 때까지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로라가 끊임없이 남자들의 캣콜링을 듣고, 겁탈당하려는 상황에 빠진다.

알고 보면 로라는 외계인이었고, 그에게는 사냥을 집행하도록 주도하는 외계인 남자가 있다. 그는 로라에게 밀착해 끈질기게 행동을 감시하고 사냥하도록 명령한다. 한편 로라는 인간들을 만나는 동안 무의식 속에서 인간적인 연민을 키우고 있었다. 따라서 사냥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로라는 이 긴 사냥에서 도망친다.

이 공허한 사냥에서 로라가 도주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그가 사회에서 소외당하는 안면기형의 남자를 만났을 때다. 그를 만났을 때 로라는 이 사회적 ‘소수’로부터 동질감을 받았을 것이다. 끝내 로라는 아무도 없는 깊은 숲에 다다른다. 도와줄 이도, 목격자도 없는 곳에서 로라는 낯선 남자를 만난다. 외계인의 특별한 능력도 잃은 로라는 남자를 먹잇감으로 삼지 못하고 위기에 처한다. 로라를 착취하던 외계인 남성도 이러한 폐곡선의 방식에서 결코 로라를 구해내지 못하리라.

로라가 단 한 번의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최후를 맞이할 때, 스크린 속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외로움과 공포는 여성이자 사회자 약자들이 죽을 때까지 위협받는 일상의 것과 닮았다. 이 영화는 사회를 하이퍼리얼리즘적으로 투영하고 그 모순까지 건드린다.

<언더 더 스킨> 예고편

 

<델마> - 델마

대학에 막 입학한 새내기 ‘델마’(에일리 하보)는 아버지와 속마음 이야기까지 나눌 정도로 긴밀한 사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한창 독립을 꿈꾸고 부모의 참견을 못마땅하게 여길 나이인데 스스로 외톨이가 되려는 것을 보면 좀 이상하다. 약간의 술도 허용하지 않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란 점에서 이 아이가 조금 특별한 경우인가 싶다. 그러던 중 델마는 독서실에서 ‘아냐’(카야 윌킨스)를 만나게 되고 급작스러운 발작을 겪는다. 이 발작은 초현실적인 사건과 동시에 벌어지는데, 그때마다 델마 곁에 아냐가 있었다.

델마는 아냐를 향한 강렬한 이끌림이 명확해질수록 자신을 압박하는 죄의식과 싸운다. 이 죄의식은 종교적 죄의식에 가깝다. 동성 친구인 아냐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는다는 것 외에도 종교가 인간에게 처음 씌운 원죄가 그것이다. 자신의 욕망 자체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죄의식, 창조주이자 절대자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도록 종교가 인간에게 씌워 놓은 ‘억압’ 말이다.

몇 번의 발작을 겪은 후, 델마는 뇌 검사를 한다. 그 과정에서 놀랍게도 병원 검사를 통해 죽은 줄로 알았던 할머니가 생존해 있으며, 델마와 같은 증상을 겪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의사는 덧붙여 수많은 여성들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었을 때, 할머니 그리고 델마와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고 말한다. 델마가 찾아간 병원에서 할머니는 비밀리에 감금돼 조용히 죽어가고 있었다.

델마는 어렴풋이 잊혔던 옛 기억을 되찾는다. 어린 동생이 생긴 델마는 자신이 부모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자 동생이 사라지기만을 속마음으로 바란다. 하지만 이 일은 현실로 벌어지고, 의사인 아버지는 독한 약물을 어린 델마에게 먹여 의식을 없애려 했었다. 그러나 할머니에게 한 것처럼 약물을 오래 주입하지 못하게 되자, 종교심으로 트라우마를 심어줘 델마를 통제했던 것이다. 델마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특별한 힘’을 잠재우기 위해 다시 독한 약물을 삼키고, 벽에 머리를 찧으며 신에게 고백한다. 그러나 델마는 자신의 죄의식 때문에 사라진 아냐를 되찾는 일이 이 방식으론 절대 불가능함을 깨닫는다. 심지어 어머니로부터 경멸의 시선을 느낀 후, 델마는 깊은 꿈을 꾼다. 그 꿈에선 짓눌려 있던 모든 욕망이 이뤄지고, 곧 꿈은 모두 현실이 된다.

델마가 억압했던 아버지를 죽이고 아냐와 사랑을 나누는 과정은 스산하고 기괴하지만 아름답다. 세상이 ‘마녀’라 일컫는 방식의 삶, 특별한 욕망과 특별한 힘을 제멋대로 펼치는 삶, 누군가 만들어 놓은 방식이 아닌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사는 것. 영화는 그 모습이 얼마나 눈부시고 찬란한지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모두 ‘마녀’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델마> 예고편

 

 

Writer

나아가기 위해 씁니다. 그러나 가끔 뒤를 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