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잭 블랙을 안다. 몸매라는 핸디캡을 딛고 쿵푸를 하게 된 팬더 ‘포’이자 정규과목 대신 락스피릿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괴짜 락커, 무한도전 멤버들과 위화감 없이 어울리는 외국인, 얼굴만 봐도 웃음부터 나오는 천상 코미디 배우. 우리나라에 이만큼 잘 알려진 할리우드 배우가 또 누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우리는 모두 잭 블랙을 모른다. 그의 시끌벅적한 코미디 영화들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그가 펼쳐온 진지한 연기들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스쿨 오브 락> 스틸컷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다 보면 놀라게 된다. 흔히 알려진 코미디 영화 사이사이로 거장 감독들의 이름이 보이기 때문이다. ‘비포’ 시리즈의 리처드 링클레이터, <반지의 제왕>으로 유명한 피터 잭슨, <프란시스 하>와 <위아영>으로 알려진 노아 바움백, <인턴> <왓 위민 원트>의 감독 낸시 마이어스는 물론 미셸 공드리까지.

여기 그의 영화들이 있다. 한 번쯤 봤던 영화일 수도 있다. 이미 알고 있는 영화 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곳에 잭 블랙이 있었음을 상기해본다면 우리는 결코 그 영화를, 잭 블랙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킹콩>

King Kong ㅣ2005ㅣ감독 피터 잭슨ㅣ출연 나오미 왓츠, 잭 블랙, 애드리언 브로디

<킹콩>의 줄거리를 굳이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1933년 처음 등장한 이래로 킹콩은 한순간도 유명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킹콩이 올라탄 장면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보다 더 유명할 정도. 굳이 정의하자면 괴수 영화의 조상님 같은 존재. 이 영화에 완전히 매료되었던 한 아홉 살 꼬마는 유명 감독이 되어 <킹콩>을 리메이크하기에 이르는데 그가 바로 피터 잭슨이다. 2005년의 <킹콩>은 1933년 작에 비하면 기술의 무궁한 발전 덕에 킹콩의 움직임도 표정도 더 디테일해졌다. 하지만 더 디테일해진 건 따로 있다. 다름 아닌 캐릭터. 수많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조차 어느 캐릭터 하나 허투루 만들지 않았던 피터 잭슨답다. “어떤 인물들이 등장하건 피와 살과 뼈가 있는 살아있는 인물로 만들겠다”는 그의 철학은 <킹콩>에서도 어김이 없다. 아무튼 그 덕분에 잭 블랙이 맡은 ‘던헴’ 캐릭터도 원작에 비해 한층 세밀해졌다.

잭 블랙이 맡은 던헴에게서 그나마 잭 블랙스러운 면을 찾자면 ‘뻔뻔함’ 하나뿐이다. 던헴은 결코 웃기는 캐릭터가 아니다. 던헴 한 명 때문에 죽어 나간 등장인물의 숫자를 세어보자면 그는 웃기기는커녕 웃기지도 않는 인물이다. 던헴은 야비하고 무책임하고 무모한 데다 비겁하기까지 하다. 내 주변에도 있을 것 같은 악역이지만 주변에 있다면 절대 곁에 두고 싶지 않은 인물. 온갖 위험천만한 계획은 모두 그의 아이디어인데 그 계획 때문에 동료가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그의 역할이 이뿐이라면 던헴은 영화를 극적으로 이끌기 위해 등장하는 흔하디 흔한 악역일 수도 있다.

하지만 던헴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의 무모한 행동들은 모두 영화를 찍겠다는 일념 하나에서 비롯된다. 그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손에서 카메라를 놓지 않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어떤 숭고한 열정까지 느껴질 지경이다. 열정이 지나쳐 무모해진 악역, 순수함이 과해서 야비해진 악역. 이런 이중적인 모습을 잭 블랙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코믹함은 모두 걷어내고서.

사실 피터 잭슨의 영화에 출연하는 것은 잭 블랙의 오랜 꿈이었다고 한다. <킹콩>에 캐스팅되기 몇 개월 전, 피터 잭슨과 영화를 찍게 해달라고 에이전트에게 농담 아닌 농담을 했을 정도(이에 에이전트는 “피터 잭슨과 영화를 찍고 싶어 하는 배우가 한둘이 아닐 텐데요.” 라고 답했다고….). 그랬던 그에게 피터 잭슨은 ‘건방진’ 영화감독 역할을 찾고 있다며 연락을 해온다. 당연히 잭 블랙은 오랜 꿈을 이룰 이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동안 자신이 해오던 연기를 모두 벗어던지는 도전을 해야 했음에도 말이다.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였기에 잭 블랙은 애드립과 즉흥연기는 모두 배제한 채 철저히 디렉팅에만 의존해 연기한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잭 블랙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익히 알고 있던 <킹콩>의 이야기 속에서 말이다.

<킹콩> 트레일러

 

 

<로맨틱 홀리데이>

The Holidayㅣ2006ㅣ감독 낸시 마이어스ㅣ출연 케이트 윈슬렛, 잭 블랙, 카메론 디아즈, 주드 로

잭 블랙과 로맨틱 코미디라니. 잭 블랙 본인조차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캐스팅 제의를 거절하려던 그는 케이트 윈슬렛과 함께한다는 얘기에 덜컥 오케이를 해버린다. 로맨틱 코미디의 남자 주인공을 한다는 게 불안했다고, 실은 자신이 없었다고 잭 블랙은 이야기하지만, 그의 불안이 무색하게 <로맨틱 홀리데이>의 ‘마일스’(잭 블랙)는 그 어떤 배우로도 대체가 불가능하다. 이건 분명 로맨틱 코미디 전문 배우도 해내지 못할 일이다.

<로맨틱 홀리데이>에는 두 남자 주인공이 있다. LA에서 온 연애 초짜 ‘아만다’(카메론 디아즈)에게 사랑을 일깨워주는 ‘그레엄’(주드 로)과 나쁜 여자에게 퍼주다 상처만 남은 영화 음악 감독 ‘마일스’(잭 블랙)가 그들이다. 사랑에 상처를 입은 두 여자가 연휴 동안 서로의 집을 바꿔 생활하다 새로운 사랑을 만난다는 다소 비현실적인 설정의 이 영화에서 주드 로가 판타지를 담당한다면 내게도 일어날 것만 같은 현실성을 부여하는 건 다름 아닌 잭 블랙이다.

그렇다고 잭 블랙이 이 영화에서 ‘잘생김’을 연기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 잭 블랙은 잭 블랙을 연기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잭 블랙의 키가 더 커 보인다거나 잭 블랙의 외모가 주드 로와 비슷해 보인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잭 블랙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매력적이다. ‘아이리스’(케이트 윈슬렛)와 DVD를 고르며 영화의 O.S.T.를 허밍으로 불러주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극 중 아이리스에 빙의하고 만다. 웃음을 멈출 수가 없고 마음이 가는 걸 멈출 수가 없다. 특유의 편안함과 자상함으로 무장 해제시켜버리는 것, 그렇게 열려버린 마음으로 스며드는 것. 이것이 잭 블랙이 로맨틱 코미디의 남자 주인공인 이유다.

영화 <인턴>과 <왓 위민 원트>로 유명한 낸시 마이어스 감독은 <스쿨 오브 락>을 보고 잭 블랙에게 반해 <로맨틱 홀리데이>의 시나리오 단계부터 잭 블랙을 상상하며 마일스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한다. <스쿨 오브 락> 속 괴짜 락커의 어떤 ‘로맨틱’한 면을 발견한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로맨틱 홀리데이>를 보면 역시 ‘로맨스’로 잔뼈가 굵은 감독이구나 싶다.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잭 블랙을 발굴해내다니! 물론 잭 블랙의 연기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로맨틱 홀리데이> 트레일러

 

 

<마고 앳 더 웨딩>

Margot at the weddingㅣ2007ㅣ감독 노아 바움백ㅣ출연 니콜 키드먼, 제니퍼 제이슨 리, 잭 블랙

<마고 앳 더 웨딩>의 줄거리는 제목 그대로다. 주인공 ‘마고’(니콜 키드먼)가 여동생 ‘폴린’(제니퍼 제이슨 리)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이야기. 노아 바움백 감독의 <오징어와 고래>가 그랬듯, 이 영화 또한 가족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아는 그런 훈훈하고 감동적인 가족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영화 속 가족들은 앞에선 속을 긁고 뒤에선 험담을 하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 안에 폴린의 약혼자 ‘말콤’(잭 블랙)이 있다. 능력 없고 한심한 말콤은 동생의 결혼 상대로 마음에 들래야 들 수가 없는 인물. 말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마고, 언니의 잘난 척과 참견이 싫은 폴린, 애인의 언니 때문에 더 삐뚤어지는 말콤. 애초부터 정상이 아닌 캐릭터들인 데다 이런 시한폭탄 같은 관계가 얽혀 있으니 폴린의 결혼식은 점점 엉망이 되어갈 수밖에 없다.

그동안 많은 영화에서 잭 블랙이 루저 역할을 했지만 그가 연기한 루저들은 모두 뻔뻔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부터 잭 블랙의 코믹연기가 여지없이 발휘되곤 했었다. 하지만 <마고 앳 더 웨딩>의 말콤은 자신감은커녕 자격지심만 가득한 인물이다. 영화 속 말콤은 잭 블랙이 이렇게 매력 없는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매력이 없다. 게임을 하다 마음대로 안 된다고 성질을 부리고 자신에게 상황이 불리해지면 자기를 버리지 말라며 지질하게 엉엉 운다. 잭 블랙의 루저 연기가 얼마나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준다.

잭 블랙(좌)과 노아 바움백 감독(우) © WireImage.com - Image courtesy WireImage.com 

“코미디 배우는 진지한 연기를 할 때 지나치게 심각해지는 경향이 있다. 자기도 진지한 연기를 할 수 있다고 보여주려고 하기 때문인데 잭 블랙은 웃긴 장면도 웃기지 않게 표현했다”는 노아 바움백 감독의 인터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게다가 이런 배우가 노 개런티로 출연했으니 노아 바움백 감독은 행운아라고 할 수밖에.

<마고 앳 더 웨딩> 트레일러

 

 

<버니>

Bernieㅣ2011ㅣ감독 리차드 링클레이터ㅣ출연 잭 블랙, 셜리 맥클레인, 매튜 매커너히

텍사스의 작은 마을 카시지, 장의사 ‘버니’(잭 블랙)는 다정하고 섬세한 성격으로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다. 어느 정도로 사랑을 받냐 하면 마을의 80세 부인 ‘마조리’(셜리 맥클레인)를 죽이고 냉동고에 아홉 달 동안 감췄는데도 마을 사람들이 그는 죄가 없다며 석방해달라고 주장할 정도로 사랑을 받는다. 이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심지어 실화다. 실제 버니 타이드는 현재 교도소에 복역 중이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섞어 놓은 듯한 형식의 이 영화는 버니에 대한 주민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진행된다(실제 주민들이 출연하기도 했다). 이 영화에서의 코믹은 사실 주민들이 담당하고 있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저마다의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버니를 옹호하는 인터뷰는 관객의 웃음을 끌어낸다. 그에 반해 잭 블랙이 연기하는 버니는 오히려 웃음기를 쫙 뺀 담백한 캐릭터다. 영화 장르는 블랙 코미디이지만 잭 블랙은 이 영화에서만큼은 코미디 배우가 아니다.

사실 버니는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잭 블랙이다. 아니, 버니라는 캐릭터 자체가 그동안 영화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캐릭터다. 그동안의 잭 블랙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불허의 악동이였다면 버니는 단정하고 반듯한 모범생이다. 하지만 동시에 살인자다. 바로 이 간극에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영화 내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버니는 유죄일까 무죄일까.

당연히 영화는 끝날 때까지 답을 주지 않는다. 그 질문을 끌고 가는 힘은 전부 잭 블랙의 연기에서 나온다. 주변 사람을 병적일 정도로 챙기고, 누구에게나 다정한 버니에게 어떤 순간에는 동정심이 생기다가도 어떤 순간에는 그 웃는 얼굴이 모두 가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천사의 얼굴과 악마의 얼굴을 오가는 잭 블랙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보고 있으면 원래 인간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솔직히 말하면 이 기사는 영화 <버니>를 추천하기 위해 쓰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잭 블랙의 새로운 면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영화니까. 영화 자체의 매력도 물론 빼놓을 수 없겠지만 말이다. 영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등장하는 실제 버니와 잭 블랙의 만남도 놓치지 않길 바란다.

<버니> 트레일러

 

확실히 잭 블랙은 웃긴 배우다. 하지만 그의 연기력은 결코 우습지 않다. 코미디를 확실히 잘하지만 코미디만 잘하는 건 아니다. 로맨스부터 악역, 실존 인물까지. 잭 블랙의 필모그래피 곳곳엔 그의 연기력을 확인할 작품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그곳엔 우리가 모르는 잭 블랙이 있다. 이제부터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잭 블랙이다.

 

 

Writer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카피 쓴다는 핑계로 각종 드라마, 영화, 책에 마음을, 시간을 더 쓰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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