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것은 더 이상 ‘종이책’에서 나오지 않는다. 미래의 콘텐츠는 데이터 세계에서 진화했고 언어마저 E-북 리더기와 모바일 플랫폼 등으로 옮겨왔다. 모두 이 물성의 세계, ‘종이책’에서 떠나가고 있다. 그러나 이 전통적인 물성 세계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사양 사업으로 불리며 전혀 새로울 것 없다는 출판시장에서 출판의 새로움과 미래의 콘텐츠를 창조하고 있는 출판사, ‘워크룸프레스’의 작업들을 살펴보자.

<이제껏 배운 그래픽 디자인 규칙은 다 잊어라. 이 책에 실린 것까지> 밥 길(저자), 민구홍(옮긴이), 작업실유령, 2017-05, 출처 – 도시여행자 서점 인스타그램

출판사 ‘워크룸프레스’는 이전의 ‘워크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워크룸은 ‘안그라픽스’에서 일하던 디자이너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디자인 스튜디오다. 워크룸 초기에는 많은 시각예술작가의 전시 도록과 포스터 작업을 전문적으로 다뤘다. 당시 미술계에서는 예민한 디자인 감각이 있으면서 출판 편집을 다룰 수 있는 곳을 원했으나, 이런 곳은 흔치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워크룸은 자연스레 출판물과 연결된 북 커버, 앨범 커버 등을 통해 실험적인 작업을 선보이며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후 2011년, 디자이너 김형진과 디자이너 이경수, 편집자 박활성은 워크룸 안의 ‘워크룸프레스’란 출판사를 만들며 새로운 시작을 선보인다.

스튜디오 ‘워크룸’의 다양한 작업들

워크룸프레스의 작업물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고유의 개성을 지녔다. 한 손에 들어오는 적당한 판형(총서 ‘제안들’의 경우), 감각적이고 세련된 색감, 의도적으로 배치된 여백과 과감히 박힌 글자들. 이 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시그니처인 타이포그래피다. 활자의 일차적 용도는 의미 전달이며, 디자인이 부차적 용도일 것이다. 그러나 워크룸프레스에게 타이포그래피란 미술 조형이나 오브제처럼 보이며 출판물의 중심에 있다. 그들은 언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할 줄 안다. 최근 출판시장의 표지에서 드러나는 ‘이미지 과잉’과는 다르게 이미지도 제한돼 쓰여 ‘정말 딱 필요한 것만 넣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작업 방식은 상업적인 디자인 요소와 거리가 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독자들이 워크룸프레스의 책을 더욱 갖고 싶게 만든다.

워크룸프레스의 책들. 출처 – 서점 더폴락 인스타그램
워크룸프레스의 책들. 출처 – 서점 샵메이커즈 인스타그램

워크룸프레스는 2014년부터 문학 총서 ‘제안들’을 출간하고 있다. ‘제안들’은 조르주 바타유가 출간하려 했지만 출간되지 못한 총서의 이름에서 따왔다. ‘제안들’은 다양한 언어권의 숨은 작가들 혹은 잘 알려진 작가들의 비밀스러운 작품들로 선정된다. ‘제안들’ 띠지에는 작가명과 작품명이 과격하고 투박하리만치 크게 박혀 있다. 띠지에서 본 이름은 어딘가 생소하고, 낯설다. 조금 익숙한 작가의 작품은 그동안 노출되지 않았던 글들이다.

‘누가 이 생소한 작품을 읽겠는가?’와 같은 생각이 드는 동시에 이 시리즈를 모두 구입해 방 또는 서가 한 편에 진열하고 싶은 욕망이 인다. 이 작업물들은 한 마디로 멋지다. 감각적이고, 이 실험에 참여하고 싶게 만든다. 워크룸프레스의 종이책은 실제로 볼 때 더 아름다워서 가까이하며 읽고 싶다. 그러나 이 출간물의 스타일리쉬함은 디자인 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출처 – 서점 땡스북스 홈페이지 

‘제안들’은 흔치 않은 인문학 전반을 다뤄내 묵직하면서 신중하다. 워크룸프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제안들’은 내놓아졌다.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질 제안이라면 받아들여질 터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을 만해서일 것이다.” 이것은 강요하지 않음의 자세다. 이 은근함이 묘하게 끌린다. 더불어 ‘이 시대의 지성’이나 ‘고급 취향’ 혹은 ‘SNS 잇템’처럼 얕은수의 미끼로 독자를 현혹하지 않는다. 독자를 속이지 않고 아름다운 취향을 제안하는 것, 이 유연함에서 자유로움과 여유가 느껴진다.

<소돔 120일 혹은 방탕주의 학교> 출처 – 워크룸프레스 인스타그램

워크룸프레스에게 깐깐한 것이 있다면 작품 선정이다. ‘제안들’은 다음의 조건을 갖췄다.

1. ‘제안들’은 숨은, 가치 있는 작품들을 펴낸다. 작가들의 비밀스러운 작품들, 마땅히 소개되어야 함에도 국내 번역본이 존재하지 않았던 책들로 엄선된다.

2. ‘제안들’은 연결된다. 여러 언어로 글을 쓰는 미지의 작가들 혹은 친숙한 이름의 낯선 작품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교차한다.

3. ‘제안들’의 경계는 느슨하다. 소설과 산문, 산문과 시, 비평과 전기, 일기와 서간을 넘나드는, 그 구분을 무색하게 하는 글들이 주를 이룬다.

4. ‘제안들’은 정교한 번역을 지향한다.

5. ‘제안들’은 탁월한 번역 후기를 싣는다.

그들은 지속하고자 하는 미학적인 면을 충족시키면서 자본주의 맥락에서 벗어난 작품을 찾는다. 여기서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드러난다. 눈에 들어 오래도록 읽힐 출판물을 제작하는 것. 이 출판물은 더 새로운 영역을 모색할 수 있는 참신한 가치를 내포해야 한다. 새로운 콘텐츠, 잠재성의 영역 말이다.

<소돔 120일 혹은 방탕주의 학교> 출처 – 책방 숲 인스타그램

최근 워크룸프레스는 ‘사드 전집’의 두 번째 책 <소돔 120일 혹은 방탕주의 학교>(이하 <소돔 120일>)를 출간했다. D. A. F. 드 사드 사후 200주기로 내놓았던 사드 전집 1권 출간 이후 3년 8개월이 걸린 작업이었다. 워크룸프레스는 1년에 1~2권씩 약 10년간 사드의 전작을 14권에 걸쳐 출간할 거라는 다짐을 내비쳤다. (더군다나 이 작업은 그동안 사드 번역에서 호평을 보인 번역가 성귀수의 깊은 고뇌와 노력이 엿보인다.)

한 때 동서출판사에서 출간한 <소돔 120일>은 우리나라 서점 진열대에서 잠시 볼 수 없었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19금’ 판정을 내려 판매금지 조치가 취해졌기 때문이다. 다시 서점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은 2012년 10월 이후다. 놀랄 만치 최근이다. <소돔 120일>은 주교, 판사, 공작, 징세청부인이 젊은 남녀 노예 120명을 데리고 향락을 벌인다는 내용으로, 당시 타락한 지배계급의 모순을 사드만의 표현으로 적나라하게 폭로한 책이다. 사드는 ‘억압’과 싸우기 위해 글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애를 다 바쳤다.
그는 기상천외한 행각으로 인해 약 19년간 감옥과 정신병원에 머물면서 글을 썼으며, 그의 작품 대부분은 오명과 추문에 휩싸이며 압수당해 대부분 분실되거나 불태워 사라졌다. 어쩌면 <소돔 120일>의 복간은 자유를 다시 찾는 상징적인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사드의 책이 본격적으로 조명된 적은 많지 않았다. 사드의 작품을 온전히 이해할 독자들이 많지 않아 잘 팔릴 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워크룸프레스의 사드 전집 작업은 결코 쉬운 길을 가고자 하는 선택은 아닐 것이다. 아울러 워크룸프레스는 사드의 예술 작품으로서의 매력을 고스란히 종이책에 옮겨 담았다. 작품 속 에너지와 아우라를 표지 및 내지의 모든 디자인에서 느낄 수 있다. 손으로 직접 만져지는 종이책일 때, 독자는 이 감각을 생생히 전달받을 수 있다.

<우주 감각: NASA 57년의 이미지들> 출처 – 서점 파크 인스타그램

현재의 우리는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비현실이 가시화된 세계에 몰두하고 있다. 언어를 다루지 않는 콘텐츠 역시 이를 따라간다. 심지어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언어에서 찾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사유는 언어를 토대로 한다. 사유를 천착해 나가기 위해선 반드시 언어가 필요하다. 사유를 벗어나 남는 것은 공허하고 텅 빈 의식이다. 비인간적‧기계적 발전 안에 없는 살아있음이 종이책 안에 있다. 한 번 인쇄돼 더 이상 변화 불가능하다는 점은 예리한 완결성을 요구한다. 순간 만들어지고 순간 사라지는 디지털 세계엔 없는 진중함, 유의미함이 있다. 최근 무의미하다 말을 듣는 종이책 출판시장은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문명의 시작과 현재를 함께하는 종이책은 선형적 시간에 지배되지 않을 것이다. 한 손에 쥐어지는 작은 크기의 종이책에 우주적 진실과 인간의 문명이 담겨있다. 무제한의 공간이 바로 종이책이다. 종이책에 한계가 있다고 속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출판을 다 잊고 새로 시작해야 함을 말한다.

 

워크룸프레스 홈페이지 
워크룸프레스 인스타그램 

 

메인 이미지 ‘워크룸프레스’ 인스타그램 이미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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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기 위해 씁니다. 그러나 가끔 뒤를 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