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족> 스틸컷

지난 9월 15일 키키 키린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줄곧 누군가의 어머니, 할머니가 되었지만, 작품 속에서 매번 얼굴을 바꿔가며 다른 결의 연기를 보여줬다. 그럼에도 키키 키린이 연기하는 어머니의 모습에는 보편적인 친숙함과 숭고함이 늘 공존했다.

 

어머니는 응원한다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

Tokyo Tower: Mom and Me, and Sometimes Dad | 2007 | 감독 마츠오카 조지, 니키타니 히로시 | 출연 오다기리 죠, 키키 키린, 우치다 아야코, 마츠 다카코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 스틸컷

나를 돌보지 않고 오로지 자식만 바라보는 어머니 모습은 어머니에 대한 지극히 구시대적인 인식이다.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에서 ‘마사야’(오다기리 죠)의 어머니였던 ‘오칸’이 그랬다. 오칸은 철없는 아들을 한번 나무라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뒷바라지한다. 아들이 겨우 성장하는 계기도 어머니가 처음으로 자식 앞에서 약하고 괴로운 모습을 보인 암 투병을 통해서였다.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 예고편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인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설득력을 발휘하는 것은 묵묵히 자식을 응원하는 이면에 순박하고 소탈한 매력이 공존했기 때문이다. 아들 친구들이 있는 술자리에서 흥에 겨워 코주부 안경을 쓰고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는 어머니 오칸의 모습은 키키 키린 특유의 장난스러운 모습과 잘 어우러지며 늘 우리 일상과 함께 하는 어머니라는 존재의 진솔한 응원을 대변해준다.

 

어머니는 놓지 않는다

<걸어도 걸어도>

Still Walking | 2008 |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 출연 키키 키린, 아베 히로시, 나츠카와 유이, 하라다 요시오
<걸어도 걸어도> 스틸컷

때때로 어머니는 응원을 넘어 강한 집착을 보이기도 한다. 자기 자신을 버린 어머니의 욕망이 다른 대상을 찾지 못하고 자식만을 붙잡기 때문일 것이다. “겨우 10년 정도로 잊으면 곤란해. 그 아이 때문에 준페이가 죽었으니까.” 차가운 낯빛으로 변하며 타인을 원망하고, 혼이 나간 듯 나비를 좇으며 죽은 아들이 돌아왔다고 되뇌는 어머니 ‘토시코’의 모습은 섬뜩하면서도 “어떤 어머니가 안 그럴까” 싶은 씁쓸한 현실감을 전해준다.

 

<내 어머니의 인생>

Chronicle of My Mother | 2011 | 감독 하라다 마사토 | 출연 야쿠쇼 코지, 키키 키린, 미야자키 아오이, 미나미 카호
<내 어머니의 인생> 스틸컷

어렸을 때 남에게 맡겨져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여전히 원망을 품고 사는 ‘이가미’(야쿠쇼 코지). 그 때문인지 이가미는 거꾸로 자신의 딸들을 과도하게 구속한다. 하지만 치매로 인해 점차 과거의 기억으로 돌아가는 어머니 ‘야에’를 보며 어머니가 자신을 보냈던 이유, 그 때문에 어머니가 여태껏 아픈 기억에 갇혀 살았음을 깨닫고 점차 어머니를 이해하게 된다. 말하지 못했을 뿐 야에 역시 단 한번도 이가미를 놓지 않았다.

 

어머니는 앞서간다.

응원하는 어머니, 놓지 않는 어머니보다도 믿음직한 어머니 모습은 자식을 앞서간 인생 선배로서의 어머니이다. 우리가 세상에 나와 처음 접하는 인생 스승이 어머니이고, 그 어떤 자식도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앙: 단팥 인생 이야기>

An | 2015 | 감독 가와세 나나미 | 출연 키키 키린, 나가세 마사토시, 우치다 캬라
<앙: 단팥 인생 이야기> 스틸컷

그래서 키키 키린이 연기하는 어머니는 특별하다. 그의 캐릭터는 꼰대 마냥 강압적으로 가르치는 법이 없다. <앙: 단팥 인생 이야기>에서 자식뻘 되는 도라야끼집 사장 ‘센타로’(나가세 마사토시)에게 단팥 만드는 법을 가르칠 때 연신 허리를 굽히며 “사장님” 호칭을 빼먹지 않고, 학교 수업이 싫다는 손주뻘 되는 중학생 손님들(실제 손주인 '우치다 캬라'와 함께 연기했다.)에게는 자유롭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 된다고 천진난만한 조언을 건넨다.

 

<태풍이 지나가고>

After the Storm | 2016 |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 출연 아베 히로시, 키키 키린, 마키 요코, 요시자와 타이요, 고바야시 사토미
<태풍이 지나가고> 스틸컷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에서 키키 키린은 <도쿄 타워>처럼 다 큰 철부지 아들을 둔 어머니 ‘요시코’가 된다. 아들 ‘료타’(아베 히로시)는 한때 촉망받는 소설가였지만 현재는 흥신소에서 사설탐정으로 일한다. 이혼한 아내에게 아이 양육비도 못 보내면서 번 돈을 경륜으로 날리기 일쑤다. 그런 아들을 요시코는 마찬가지로 나무라지 않는다. “모두가 되고 싶은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먼저 알았기 때문이다.

<테풍이 지나가고> 예고편

그러나 이 영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태풍이 휘몰아치던 밤, 요시코는 말한다. “난 평생 누군가를 바다보다 더 깊이 사랑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중략) 그래도 살아가는 거야. 그럼, 그런 적 없어서 살아갈 수 있는 거야. 이렇게 하루하루를 그래도 즐겁게. 인생이란 거 단순해.” 묵묵한 응원에서 한 걸음 더 내밀어 아들의 부추긴다.

<태풍이 지나가고> 스틸컷

 

키키 키린이 수도 없이 연기한 어머니, 할머니들은 희생과 헌신적인 사랑으로 가득한 어머니 모습의 구시대적 신화와 크게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반대로 편하지만 재치 있는, 지혜롭지만 따뜻한 동시대의 이상적 모습도 담고 있다. 그래서인지 영화에서의 이미지와 다르게 촬영장에서는 연기에 대한 욕심이나 독설도 서슴지 않았다고 하는 그의 모습이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난 7월 일본 <아사히 신문>에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남겼다는 친필 메시지가 더욱 익숙하게 다가온다.

8월 31일 <아사히 신문>이 공개한 키키 키린의 친필 메시지

“옛날 책을 읽으면 대체로 똑같은 말이 쓰여 있습니다. 자살한 (사람의) 영혼은 살아 있었을 때의 고통에 갇히게 된다고요. 그게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저는 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만은 하지 말자고 살아왔습니다. 이런 모습이 되어버렸지만, 이 또한 재미 있잖아요.” - 키키 키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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