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익준의 표정에는 모나지만 둥그런 감정이 혼재한다. 그래서인지 작품마다 ‘건달’을 도맡았음에도 결코 미워 보인 적은 없었다. 단편영화를 찍고 또 찍던 시절부터 독립영화 <똥파리>로 자신만의 존재감을 새기고, 나아가 감독과 배우를 오가며 다양한 이야기에 녹아들기까지. 누구나 동감하는 희로애락을 잔뜩 머금은 양익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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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편을 찍고 또 찍다

<인간적으로 정이 안가는 인간> 스틸컷
<노량진 토토로> 스틸컷

시작은 짤막한 주연이었다. 영화 <품행제로>(2002)의 단역으로 데뷔한 양익준은 곧장 단편영화에 하나둘 출연하며 자신의 모습을 새겨 나가기 시작했다. 단편영화에서는 언제나 주연이었다. 강진아 감독의 단편 <팡팡 퀴즈 쇼 커플 예선전>(2004)에서 여자 주인공과 가벼운 듯 심오한 얘기를 주고받는 남자 주인공, 방은진 감독의 단편 <파출부, 아니다>(2004)에서 파출부 역과 오롯이 출연하는 택배기사 역은 조금 짧은 듯해도 중요한 역할이다. 이윽고 <인간적으로 정이 안 가는 인간>(2005)에서는 허물없지만 눈치도 없는 피아노 조율사 역으로 사실적인 연기를 펼친 덕에 제10회 미쟝센 단편영화제에서 배우로서 첫 연기상을 받았다. 이후 <노량진 토토로>(2005)에서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닥친 애니메이터로, <철수야 철수야 뭐하니?>(2005)에서는 돈 없고 빽 없는 광대로 분했는데, 공교롭게도 그가 맡아온 캐릭터는 하나같이 어딘가 잘난 구석 없는 인물들이다.

<낙원> 스틸컷. 김종관 감독의 단편을 묶은 옴니버스 영화 <연인들>에서 양익준이 출연한 작품 2편을 감상할 수 있다

그렇게 독립영화계에 발을 디딘 양익준은 차근차근, 그러나 누구보다 열심히 영화를 찍었다. 앞서 언급한 영화들을 보다시피, 2005년 당시 미쟝센 단편영화제에는 양익준이 출연한 작품만 세 편이 출품, 상영됐다. 그러다 보니 한국 단편영화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김종관 감독과는 자연히 인연이 닿았다. 여러 편의 단편영화에 이름을 올리던 시기, 양익준은 김종관 감독의 단편 <낙원>(2005), <드라이버>(2006)에 연이어 출연했다.

<바라만 본다> 스틸컷

그러는 동안 양익준은 자신의 첫 연출작도 함께 찍었다. 직접 각본, 연출, 편집 그리고 주연까지 맡은 작품 <바라만 본다>(2005)다. 짧지 않은 40여 분의 러닝타임 안에 사진 찍는 일과 ‘성희’를 좋아하는 ‘준호’(양익준)의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작품은 같은 해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으며 배우 양익준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는 곧이어 단편영화 <그냥 가>(2006), <아무말도 할 수 없다>(2007)를 연출했다. 그사이 연기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 <강적>(2006) 같은 상업영화에서 단역으로 보충했다.

 

2.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 <똥파리>

<똥파리> 스틸컷

몇 편의 단편영화를 연출하던 양익준은 이내 자신 속에 담아두었던 진짜 이야기를 꺼내 놓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첫 장편 연출작이자 주연작인 <똥파리>(2008)는 그야말로 ‘양익준’이라는 사람을 제대로 각인시켰다. 아마 이 작품을 통해 양익준이라는 사람을 알게 된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극 중 양익준은 용역 깡패 ‘상훈’을 맡았다. 언제 어디서나 폭력적인 욕을 달고 다니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패인 상처를 지닌 아련한 인물이다. 영화 <똥파리>는 폭력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인물들의 상황과 심리를 지독하리만큼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거기에서 느껴지는 사회 고발은 영화의 깊이를 한층 끌어올린다. 그러한 모든 과정에 단연 양익준이라는 존재감이 큰 몫을 차지한다. 폭력에 굴하지 않는 당찬 소녀를 연기한 배우 김꽃비 또한 만만치 않은 인상을 주었다. 결과적으로 <똥파리>는 제10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감독상, 제17회 춘사영화상 심사위원대상을 비롯해 수많은 국내외 영화제로부터 상과 찬사를 듬뿍 받았다.

 

3. 의외의 모습들

<똥파리>에서의 인상이 강렬했던 탓일까. 직후에 만난 양익준의 모습은 조금 의외였다. 두 번째 장편영화 <집 나온 남자들>(2010)에서 발견한 그는 지진희, 이문식 같은 유명 배우들과 함께 코미디 배우로 나섰다. 양익준은 가출한 아내를 찾아 나서는 지진희의 친구 역할로, 전작에서 보여준 어두운 표정과 달리 명랑했다. 물론, 찌질한 캐릭터는 여전했지만.

<집 나온 남자들> 스틸컷. 극 중 양익준(왼쪽)은 전작 <똥파리>에 버금가는 ‘깡패스러움’과 ‘찌질함’을 연기했다

의외의 순간은 더 있다. 양익준은 틈틈이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에 참여했다. 주로 묵직한 소재를 그로테스크하게 풀어내는 연상호 감독의 초기 애니메이션 <사랑은 단백질>(2008), <돼지의 왕>(2011), <사이비>(2013)에서 주인공들의 목소리를 맡았다. 한편, 양익준은 일본 영화에도 참여해왔다. 일본에서도 개봉한 <똥파리>가 좋은 반응을 얻었던 덕일까. <똥파리>에서 호흡을 맞췄던 배우 김꽃비와 함께 말레이시아의 신예 감독, 일본의 배우가 합작한 다국적 저예산 독립영화 <향기의 상실>(2010)에 참여했다. 또한 재일교포 2세인 양영희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가족의 나라>(2012)를 비롯해 일본에서 단편영화 <시바타 와 나가오>(2012)를 연출하고, 장편영화 <중학생 마루야마>(2013)에 출연하기도 했다.

 

4. 재기 넘치는 감독

<애정만세> 스틸컷

양익준의 두 번째 연출작은 옴니버스 영화 <애정만세>(2011)다. ‘사랑’이라는 공통된 주제로 부지영 감독과 양익준 감독이 각각 찍은 중편영화가 담긴 작품이다. 그중 양익준의 작품 <미성년>은 30대 남성과 여고생의 이야기를 가볍고 재치있게 풀어낸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여고생 역을 맡은 배우 류혜영의 출연이다. 당시 독립영화계에 발을 디디기 시작한 류혜영은 앳되고 당찬 표정으로 극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양익준이 공개 오디션을 통해 배우 류혜영과 허준석을 직접 캐스팅했다고.

 

5. 미워할 수 없는 배우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 스틸컷

양익준은 어느 인터뷰에서 연기든 연출이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을 때 제대로 하겠다고 했다. 그는 곧 TV 브라운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KBS2 드라마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이하 ‘착한남자’)>(2013)를 시작으로 여러 편의 드라마에 조연으로 출연했는데, 캐릭터들은 공통적으로 <똥파리>의 양익준으로부터 출발한 듯한 비슷한 인상을 풍긴다. 예컨대 <착한남자>에서는 여동생에게 돈을 요구하거나 때리는 철없고 불량한 오빠 역, SBS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2014)에서는 남다른 사연을 지닌 주인공의 형 역으로, 둘 다 교도소에서 복역하다 출소하는 인물이다. 겉으로는 명백히 악역이지만, 알고 보면 그 자신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지닌 안쓰러운 인물이라는 점에서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악역이기도 하다.

<춘몽> 스틸컷

장률 감독의 영화 <춘몽>(2016)에서도 양익준은 밉지 않은 건달이다. 차라리 <똥파리>의 ‘상훈’ 그대로라 해도 될 만큼 전과 똑같은 모습이기도 했다. 그러나 <춘몽>의 묘미는 바로 그 점에 있다. 극 중 남자 주인공으로 출연한 세 명의 배우들은 각자 자신이 연출, 주연했던 작품의 캐릭터를 그대로 끌고 들어왔다. <똥파리>의 ‘상훈’이었던 양익준, <용서받지 못한 자>(2005)의 ‘지훈’이었던 윤종빈, <무산일기>(2010)의 ‘승철’이었던 박정범이 전과 같은 듯 다른 캐릭터로 한 공간에 모여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그중 양익준은 익살스러운 건달 ‘익준’으로 분해 자연스러운 매력을 아낌없이 발산한다.

 

6. 새로운 세계로, 시인이 되다

<시인의 사랑> 스틸컷

2017년에는 조폭 두목으로 열연했던 드라마 <추리의 여왕>에 이어 영화 <시인의 사랑>을 통해 새로운 캐릭터로 스크린에 돌아왔다. 이 영화에서 보여준 새로운 모습은 그간 수없이 보여준 거친 이미지와는 다른, 한층 친근한 캐릭터다. 제주도에서 감상적인 시를 쓰며 살지만 정작 월수입은 30만 원, 팍팍한 현실과 아름다운 시의 세계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시인 ‘현택기’를 연기했다. 재능도, 돈도 심지어 정자도 없는 남자로 불리는 이 안쓰러운 시인에게는 그래도 사랑이 있다. 어딘가에 존재함으로써 그 자체로 위안을 준다는 시의 의미처럼, 영화 <시인의 사랑> 속 양익준은 시인이 되어 자연스럽게 위안을 건넸다. 또한 영화의 모티프가 된 현택훈 시인의 시들은 물론, 김소연, 기형도 그리고 김양희 감독의 자작시들이 영화 속에 담겨 문학적인 감성을 배가시킨다. 아내를 둔 시인이 어느 소년을 만나면서 느끼는 감정의 파고를 묵직하게 묘사한 작품. 그동안 보여준 적 없던 양익준의 얼굴을 이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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