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사한 단풍잎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자, 얼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좋은 생각이 떠오르자 불이 반짝 켜진 전구. 여기까지 들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면, 당신은 이미 장 줄리앙을 알고 있다. 수많은 브랜드와의 협업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그래픽 디자이너 말이다. 하지만 당신이 알고 있는 장 줄리앙은 반쪽짜리다. 아직까지 그의 그림책을 읽어보지 않았으니까.

넘치는 상상력으로 유명했던 이 작품들 모두 장 줄리앙의 것이다. 출처 - Breakfast
<Modern Life>
출처 - AIGA Eye on Design

셰프에 비유한다면, 장 줄리앙은 현대인의 초상을 날것 그대로 요리한다. 월요병이나 SNS 중독 같은 일상 하나하나가 그에게는 모두 재료다. 이미 많은 예술가들이 사용한 소재이기는 하지만, 같은 재료라도 어떤 양념을 가미하느냐에 따라 맛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것이 요리 아니겠는가. 그가 사용하는 양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겠다. 바로 유머다.

출처 - nik-nak.co
출처 - Boredpanda

그는 스스로를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유머러스한 작품이 탄생한 건 바로 그 지점에서다.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아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대신, 불쾌한 것들을 유쾌하게 바꿔보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이다. 사람들을 웃게 하고 싶다는 이 사랑스러운 아이디어는 간결하고 명확해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 그의 그림체와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유머는 설명이 필요한 순간부터 유머가 아니게 된다는 말을 적용한다면, 그의 코미디는 성공적인 셈이다.

출처 - Time Out

그러나 불편한 현실에서 피어난 유머가 늘 유쾌하기만 할 수 있을까. 때때로 작품에서는 블랙 코미디가 뚝뚝 묻어 나온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나이는 들어가는데 도무지 나아지는 게 없다며, 시간이 지날수록 풍미가 깊어지는 치즈나 와인보다 못하다고 자조하는 남자. 클릭 한 번이면 모니터 너머의 상대방과 간단히 관계를 정리할 수 있는 노트북 자판 위 굿바이 버튼.

출처 - It's nice that

온갖 종류의 조리식품으로 이루어진 몸뚱이는 정육점의 고기와 다를 바 없고, 고급 레스토랑을 찾은 연인은 서로의 눈이 아닌 각자의 핸드폰에 푹 빠져 기념일을 보낸다. 위트 섞인 그림 너머로 익숙한 현실이 엿보일 때마다 씁쓸하면서도, 구구절절 늘어놓는 설명보다 함축적인 그림 한 장이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앞으로 이 세상의 방향키를 어느 쪽으로 돌려야 할지 생각해보게 만드니 말이다.

<This is not a book>
출처 – Grafiktrafik
출처 - So Beau Baby
출처 - Pinterest

장 줄리앙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끝없이 펼쳐지는 상상력이다. 말장난 같은 제목 그대로 책이지만 책이 아닌 <This is not a book>은 이 매력을 제대로 구현해 보인다.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가듯 빨간 문 모양의 표지를 열고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새롭게 옷을 갈아입는 것이다. 공연이 펼쳐지는 무대와 이를 지켜보는 객석에서부터 공구로 가득 찬 공구함, 누군가 모니터를 켜 주기만을 기다리는 노트북, 잔디가 푸릇푸릇 돋아난 테니스장까지. 특별한 줄거리 하나 없이도 다음 페이지에 또 어떤 모습이 담겨 있을지 궁금해지게 만든다.

출처 - Scaffale Basso
출처 - Phaidon

사실 이 작품에 별다른 설명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 이 작고 유쾌한 책이 ‘책은 180도 각도로 쫙 펼친 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야 한다’든가 ‘명확한 줄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산산조각내는 걸 느끼며 재미있게 보는 거로 충분하다. 왠지 모를 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면 그건 덤이다. 나만의 책 아닌 책을 만들어본다면 또 무엇으로 변신시킬지 상상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순수 창작에서부터 상업적 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꾸준히 두각을 드러내 온 장 줄리앙. 덕분에 그의 이름은 모를지언정 작품만큼은 낯설지 않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장 줄리앙에 대한 인지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지만 아쉬운 것은 다른 분야에 비해 그림책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 아이들만 보는 것이라는 편견을 버리고 한 번쯤 장 줄리앙의 그림책을 펼쳐보는 건 어떨까. 성인이기에 이해할 수 있는 농담과 아이들에게는 이미 충분해 성인들에게 더 필요한 상상력이 그 속에 스며들어 있으니 말이다.

 

장 줄리앙 공식 홈페이지
장 줄리앙 인스타그램 

메인 이미지 <Social Whirlpool>(2016)
모든 작품 ©Jean Jullien

 

 

Writer

언어를 뛰어넘어, 이야기에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마음속에 새로운 씨앗을 심어주고, 새로운 세계로의 통로가 되어주니까. 그래서 그림책에서부터 민담, 괴담, 문학, 영화까지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있다. 이렇게 모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중. 앞으로 직접 이야기를 만들기도 하며 더 풍성하고 가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나가기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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