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껏 ‘폭넓은 사업적 호응을 담은 이벤트 영화’ 또는 ‘대중 예술 영화’라는 별칭에 힘입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스크린을 장악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블랙 팬서>, <어벤져스: 인피니티워> 등 MCU 슈퍼 히어로 시리즈몰의 줄지은 흥행에 더불어 디즈니와 픽사의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 그 외 <한 솔로: 스타워즈 스토리>, <레디 플레이어 원>을 포함한 SF 장르 영화들이 2018년 상반기를 화려하게 빛냈다. 국내 박스오피스만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국내 관람객들에게 항상 사랑받던 범죄, 액션 장르의 <독전>, 판타지물 <신과 함께-인과 연> 등이 크게 흥행하는 등 전 세계적으로 블록버스터급 SF 판타지 드라마물이 난무했다.

<어벤져스: 인피니티워> Via Pinterest

물론 <겟 아웃>(2017), <그것>(2017) 등 저예산 호러 영화들의 선전이 있었지만, 2018년 상반기는 현실과 동떨어진 특색 있는 세계관이 흥행 필수 조건이었다.

영화 <겟 아웃> 스틸컷

그러나 최근 로맨틱 코미디를 선보인 워너브라더스의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와 넷플릭스의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의 성공적인 흥행은 우리에게 영화적, 스토리적, 문화적으로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다.

 

아시안 로코물이 주는 ‘영화적 의미’

블록버스터는 흥행이나 대중적 성공을 위해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한 대중 예술 작품을 일컫는다. 폭넓은 상업적 호응을 담은 이벤트 영화라는 별칭에 힘입어 블록버스터 영화에는 치고받고, 부수고 터지는 장면들이 대거 등장하는데, 2018년 상반기만 해도 슈퍼히어로 블록버스터들이 정말 ‘터져’ 나왔다.

올 상반기 큰 흥행을 이뤄낸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만 해도 한화 약 5000억 원 규모로 천문학적인 제작비가 투입되었다. 슈퍼히어로몰 중에 그나마 적은 제작비가 투입되었다는 <데드풀 2>마저 제작비 한화 약 72억 원에 달한다. 왜 할리우드엔 슈퍼히어로 영화들만 쏟아지느냐는 의문에 대한 답은 하나, 메이저급 대형 제작사들이 더이상 ‘중예산’ 영화를 만들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쪽부터 <프린세스 다이어리>(2001), <브리짓 존스의 일기2>(2004), <금발이 너무해1>(2004) 스틸컷

주로 여성 관람객들을 타겟팅하는 로맨틱 코미디물은 2000년대 초반 이후로 사라져갔다. <금발이 너무해>, <프린세스 다이어리>, <브리짓 존스의 일기> 등 2000년대 초반에는 밝고 유쾌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들이 많은 인기를 끌었지만, 영화 티켓이 비싸지고 간편하게 집에서 TV 또는 스트리밍 서비스로 쉽게 영화를 접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달라졌다. 불특정 다수의 수많은 성인 시청자들의 감소로 대형 제작사들은 영화 제작비를 해외에서 더 거둬들여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2008년 불경기 이후 DVD 시장이 붕괴되며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해외에서 성공할 확률이 높은 화려한 볼거리의 블록버스터 영화들에 예산이 집중 투입되기 시작하며 로맨틱 코미디와 같은 중예산 영화들은 점점 사라지는 추세였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 포스터

그런 의미로 지금 박스오피스 3주 차 1위를 달리고 있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의 흥행 성공은 중예산 영화에 다시 한번 기대를 모으게 한다. 특히 넷플릭스 드라마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의 경우 별다른 마케팅 없이 순전히 SNS를 통해 젊은 10대 20대 세대들의 입소문으로만 인기몰이 중이어서 더욱 특별하다.

 

아시안 로코물이 주는 ‘스토리적 의미’

물론 2000년 후반 무렵 <트와일라잇>, <헝거 게임> 시리즈 등 여성 주인공과 로맨스가 중심인 로코물이 잠깐 주목을 받았지만, 이와 같은 영화들도 할리우드의 생존 법칙이 된 블록버스터 요소를 버리지 못했다.

<트와일라잇 2> 포스터
<헝거 게임 2> 포스터

로코물의 흥행은 이제 대형 영화사들이 젊은 10대, 20대 관객들에게 눈을 돌렸으며, 그중 여성 관객이 주 타겟층이 되었다는 것을 반영해준다. 로코물은 어찌 됐건 기승전 해피엔딩으로 현실 세계의 SF물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매력 요소는 영화 속 주인공들의 존재감이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에서 가장 돋보이는 캐릭터는 단연 여주인공들이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의 여주인공 ‘레이첼’(콘스탄스 우)과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의 여주인공 ‘라라 진’(라나 콘도어)은 그간 동양인 여성 캐릭터들이 보여주었던 무술을 연마하거나, 비극적이지만 결의에 찬, 또는 가련한 캐릭터들이 아니다. 그들은 각자 개성 있고 매력적인 고유의 성격들로 매력을 발산하고 용기 있게 사랑할 줄 알며, 동양인으로서의 막연한 고민보다는 자신의 정체성과 여자들이라면 모두 공감할 만한 연애 고민을 관객들과 나눈다(무엇보다 그녀들은 야무지고 당당하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 속 레이첼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에서 중국계 미국인 레이첼은 그의 남자친구 ‘닉’(헨리 골딩)의 본가인 싱가포르에 초대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레이첼은 싱가포르에서 닉의 친구와 가족들을 만나게 되며 엄청난 그의 집안 재력에 놀라지만, 그곳에서 다소 깐깐하고 보수적인 닉의 집안 어른들, 그를 시기 질투하는 닉의 옛 여자친구, 그리고 그의 화려한 고향 친구들을 만나며 영화는 점차 세계를 확장해간다. 출신과 집안을 중요시하는 보수적인 닉의 집안에 레이첼은 절대 자신의 가치를 낮추지 않는다. 그는 닥쳐오는 문제들을 직면하고 자존감을 타협하지 않는 강한 모습을 보인다.

<내가 사랑했던 모드 남자들에게> 속 라라 진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의 한국계 미국인 라라 진은 어릴 적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엄마를 그리워하며 소중한 사람을 잃기 두려워한다. 그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꼭꼭 숨긴 채 더이상 새로운 사람을 자신의 영역에 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차츰 가족들의 응원과 사랑에 힘입어 용기를 내어 사랑을 쟁취하기로 맘 먹는다. 덤벙거리고 정리정돈은 최악에 운전 실력은 최악이지만, 그가 조곤조곤 자신의 고민과 생각을 관객들에게 나눌 때면 언제나 생각이 깊은 귀엽고 매력적인 소녀가 된다.

 

아시안 로코물이 주는 ‘문화적 의미’

2018년 8월 16일자 에릭남이 업로드한 인스타 포스팅. 출처- 인스타그램 캡쳐

한국계 미국인 가수 에릭남과 그의 형제들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의 흥행을 돕기 위해 미국 애틀랜타 한 극장의 전체 표를 구매했다는 소식은 화제가 됐다. 에릭남은 이같은 이벤트를 계획한 계기에 대해 “주류 미디어에서 잘못 그려지는 아시아인의 모습에 지쳤다. 우리는 기계광이나 수학을 잘하는 괴짜거나 닌자 자객이 아니다. 우리는 똑똑하고 멋지고, 아름답고, 섹시하고, 그 이상이기도 하다. 우리가 여기 있고, 어떤 것을 할 수 있고 얼마나 중요하고 영향력이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라는 말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영화 <조이 럭 클럽>(1994) 포스터

에릭남은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유년 시절 미국에서 생활하며 외모 비하 등으로 차별당했던 경험을 토로한 바 있다. 그가 이 티켓 이벤트를 진행하게 된 이유는 이 영화가 북미 엔터테인먼트업계에서 가져올 새로운 변화를 기쁜 마음으로 반기기 위해서이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는 할리우드 대형 영화사 워너브라더스에서 제작한 영화로, 전 배역이 아시아계로 캐스팅됐다. <조이 럭 클럽> 이후 25년 만의 일이다.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스틸컷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에서 여주인공 레이첼 역을 맡은 콘스탄스 우 Via Variety

콘스탄스 우는 미국 대중문화 잡지 <버라이어티(Variety)>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섹시한 아시아계 남자 주인공을 보여주고 싶었다. 어쩌면 ‘섹시한 아시아계 남자 주인공’이 가장 큰 의미를 갖는다. 할리우드 영화사들은 오랫동안 백인이 아닌 유색인종들을 주역으로 캐스팅하기를 주저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변화가 다가오고 있다. 최근 절찬리에 상영 중인 영화 <서치> 또한 남자 주인공이 한국계 미국인인 ‘데이비드 킴’(존 조)이라 화제를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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