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빗’이나 ‘골룸’, ‘간달프’ 등의 단어를 들으면 어떤 모습이 상상되는가? 아마 많은 이들이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시리즈 속 장면을 떠올릴 거다. <반지의 제왕> 개봉 이후로는 톨킨의 원작 소설보다 피터 잭슨의 영화로 <반지의 제왕>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반지의 제왕>하면 피터 잭슨을 떠올리지만, 그를 떠올리게 하는 키워드가 하나 더 있다. 바로 ‘B급 영화’다. 톨킨의 원작 소설을 피터 잭슨이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 팬들이 반대했던 이유도 그가 B급 영화를 주로 만든 감독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가 초기작에서 보여준 다양한 시도는 <반지의 제왕>부터 <호빗> 시리즈까지 거대한 규모의 판타지 영화를 완성하는데 자양분이 됐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감독이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다른 분위기를 가진 피터 잭슨의 초기작을 살펴보자.

 

<고무 인간의 최후>

Bad Taste|1987|출연 피터 잭슨, 테리 포터, 피트 오허른, 마이크 마넷

외계인이 뉴질랜드 카이호로 마을에 침입한다. 그들이 침입한 이유는 외계에서 판매할 햄버거 재료로 ‘인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들을 막기 위해 여섯 명의 인간이 목숨을 걸고 싸운다. 총, 도끼, 톱 등 다양한 무기로 외계인과 맞서지만 그들을 지구 밖으로 몰아내는 일은 쉽지 않다.

<고무 인간의 최후>에 직접 배우로 출연한 피터 잭슨

피터 잭슨이 4년 동안 사비를 털어서 친구들과 만든 <고무 인간의 최후>는 인상적인 데뷔작이다. 외계인과 싸운다는 설정부터가 이미 저예산으로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피터 잭슨은 그걸 해낸다. 다른 블록버스터 영화에 비해 적은 예산으로 완성한 <반지의 제왕>의 비용 절감 노하우는 데뷔작 때부터 쌓인 게 아닐까. 육체가 고기처럼 잘려나가고, 피가 케첩처럼 튀기는 <고무 인간의 최후>의 매력 중 하나는 피터잭슨의 연기다. 외계인과의 전투에 신들린 듯 몰입하는 인간과 행동 대장 격인 외계인을 동시에 연기하는 그를 보면서, 그가 훗날 <반지의 제왕>의 감독이 될 거라고 누구도 예상 못 했을 거다. 어설픔에 헛웃음이 나오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전개에 스릴까지 생기는 <고무 인간의 최후>는 저예산 B급 영화의 흥미로운 예다.

 

<데드 얼라이브>

Braindead , Dead Alive|1992|출연 티모시 밸미, 다이아나 페널베, 엘리자베스 무디, 이안 왓킨

운명을 믿는 여자 ‘파퀴타’(다이아나 페널베)는 자신의 가게에 방문한 ‘라이넬’(티모스 발므)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라이넬은 자신에게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홀어머니(엘리자베스 무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파퀴타와 라이넬이 동물원에서 데이트 하는 날, 라이넬의 어머니은 두 사람을 감시하러 갔다가 원숭이에게 팔을 물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라이넬의 어머니는 점점 좀비로 변해간다.

<고무 인간의 최후>와 마찬가지로 <데드 얼라이브>는 B급 영화의 감성을 가진 좀비 영화다. 영화 규모만 봐도 <고무 인간의 최후>보다는 큰 예산으로 제작된 영화인데, 피터 잭슨의 취향은 그대로 반영한 작품이다. 즉, 그의 이전 작품과 마찬가지로 잘려나가는 살점과 피가 넘치는 영화다.
좀비끼리 눈이 맞아서 아기 좀비가 탄생하고, 잔디 깎는 기계로 좀비와 대항하는 장면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장면은 공포와 위트가 섞여 있다. 그런 매력 때문에라도 피터 잭슨의 초기작을 사랑하는 팬들은 지금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언젠가 B급 영화로 돌아올 피터 잭슨을.

 

<천상의 피조물>

Heavenly Creatures|1994|출연 케이트 윈슬렛, 멜라니 린스키, 시라 페이즈, 다이아나 켄트

중학교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폴린’(멜라니 린스키)은 전학생 ‘줄리엣’(케이트 윈슬렛)과 단숨에 친해진다. 성장배경은 다르지만 비슷한 생각을 가진 두 사람은 함께 소설을 쓰고 점점 더 가까워진다. 양쪽 부모들은 둘을 보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우정 이상이라고 생각해 둘을 갈라놓으려고 하고, 줄리엣은 부모의 이혼으로 남아프리카로 갈 운명이다. 폴린은 줄리엣과 동행하고 싶지만 폴린의 어머니가 반대하고, 두 사람은 폴린의 어머니를 적으로 생각한다.

<천상의 피조물>은 50년대 뉴질랜드에서 실제로 일어난 두 소녀의 이야기를 토대로 만든 영화다. 피터 잭슨의 전작들과 달리 실화를 바탕으로 각본이 쓰였고, B급 영화도 아니다. 피터 잭슨이 인물의 감정선을 잘 다루는 감독임을 국제적으로 알린 작품으로, 지금은 화려한 필모그래피를 자랑하는 배우 케이트 윈슬렛의 데뷔작이다.

<반지의 제왕>을 비롯해서 피터 잭슨의 시각효과 작업을 주로 맡은 CG 업체인 ‘웨타 디지털’은 <천상의 피조물> 때 만들어졌다. 지금은 헐리우드에서 선호하는 CG 업체가 된 웨타디지털의 시작점이었던<천상의 피조물>인만큼, 작품 속 판타지 장면들이 인상적이다. 두 소녀가 소설을 쓰며 상상하는 인물들이 찰흙인형으로 등장하는데, 찰흙인형의 말과 행동은 둘의 욕망을 보여준다. 영화가 보여주는 환상과 현실의 팽팽한 균형은 관객으로 하여금 두 소녀가 만들어낸 비극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프라이트너>

The Frighteners|1996|출연 마이클J.폭스 트리니 알바라도, 피터 돕슨, 제프리 콤스

5년 전 교통사고로 유령을 볼 수 있게 된 ‘베니스터’(마미클 J. 폭스)는 조력자인 유령들과 함께 자작극을 벌여서 먹고 사는 사기꾼이다. 평소처럼 자작극으로 ‘루시’(트리니 알바라도)와 ‘레이’(피터 돕슨) 부부 집의 유령을 퇴치해주는데, 레이가 갑작스럽게 죽으면서 베니스터는 살인범으로 의심받는다. 베니스터는 사건의 진실을 찾으려 루시와 유령들의 도움을 받지만, 베니스터를 의심하는 FBI 요원 ‘대머스’(제프리 콤스)에게 쫓기면서 어려움을 겪는다.

<프라이트너>는 뉴질랜드에서 영화를 만들던 피터 잭슨의 헐리우드 진출작으로, <백투더퓨쳐>(1985), <포레스트검프>(1994)의 감독이자 제작자인 로버트 저메키스가 참여한 작품이다. <고무 인간의 최후>가 외계인, <데드 얼라이브>가 좀비였다면, <프라이트너>는 유령이 주요 소재로, 외계인, 좀비와 달리 유령은 육체가 없는 관계로 언급한 이전 작품들처럼 피와 살이 난무하는 작품은 아니다.

<프라이트너>는 벽 속을 자유롭게 이동하는 유령, 영화 클라이맥스에 나오는 병원 안 추격전 등 시각효과와 전투 장면이 인상적이다. <프라이트너>의 흥행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작품 속 다양한 시도들은 그 후에 제작된 <반지의 제왕>의 초석이 되었음은 틀림없다. 피터 잭슨은 <프라이트너>의 후속편을 만들고 싶다고 밝혔으나 흥행 실패로 계획이 무산됐는데, <반지의 제왕>에서 닦아온 기술력과 연출력으로 후속편을 만든다면 아마 많은 이들이 열광하지 않을까.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