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알고 있지만 쉽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머뭇거릴 뿐인 문제들. 일러스트레이터 조원희는 그런 것들을 이야기한다. 오밀조밀한 그림체와 촘촘한 색감으로, 그림책은 늘 아름다운 세계만 다룰 것이란 고정관념을 제대로 깨부수면서.

 

<이빨 사냥꾼>(2014)

출처 - 그림책박물관
출처 - 그림책박물관

해 질 녘의 초원은 오늘도 평화롭다. 하늘은 발갛게 물들어가고, 바람이 불 때마다 노란 나무들은 느릿느릿 가지를 흔든다. 쓱싹쓱싹, 어디선가 수풀 헤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이 평화로운 풍경을 조각낸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건 각진 제복에 장총까지 멘 한 무리의 사냥꾼들. 그런데 이 사냥꾼들의 모습은 어딘가 좀 이상하다. 회색빛 피부에 펄럭이는 귀. 언뜻 봐도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과연 이들은 무얼 쫓는 것일까?

출처 - 그림책박물관
출처 - 그림책박물관

사냥꾼들의 눈에 사냥감이 들어온다. 아무것도 모른 채 초원을 거닐던 사냥감이 순간 몸을 돌린다. 순한 눈동자를 끔뻑이는 건 통통한 체구에 까만 바가지 머리를 한 꼬마. 충직한 사냥개들이 날쌔게 앞서나가고 사냥꾼들의 움직임도 일사불란해진다. 그러니까 이들이 쫓는 건 다름 아닌 인간이었던 것이다.

출처 – 그림책박물관
출처 - 그림책박물관

사냥꾼들이 일제히 총을 꺼내 들더니 꼬마를 겨눈다. 철컥, 장전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이내 총알 대신 화살촉이 피융 튀어 나간다. 몸집만 거대했지 아직 살갗이 여린 꼬마는 소인국 사람들에게 포위된 걸리버처럼 그대로 쓰러진다. 초원 위에서 꿈틀대는 꼬마를 향해 사냥꾼들이 다가서는 동안, 컹컹 사냥개 짖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퍼져나간다.

출처 - picture book makers
출처 - picture book makers

점점 가물가물해지는 의식 너머로 꼬마는 무언가 제 몸을 기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잠시 후, 연장을 하나씩 든 사냥꾼들이 제 얼굴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날카로운 쇠꼬챙이, 단단한 스패너, 거대한 망치와 전기톱이 뉘엿뉘엿 넘어가는 노을빛에 반짝인다. 위잉, 마침내 전기톱이 돌아가기 시작하고 사냥꾼들이 굵은 밧줄을 잡아당긴다. 밧줄 끝으로 사냥꾼 한 무리를 합친 것보다 몇 배는 더 큼직한 이빨이 송두리째 뽑혀 나온다.

출처 - picture book makers
출처 - picture book makers

이렇게 주인 잃은 이빨들은 나란히 실려 이빨 시장으로 향한다. 사냥꾼들이 가지런히 늘어놓은 이빨들 사이로 꼼꼼한 눈빛의 관리자들이 돌아다닌다. ‘100% 자연산’, ‘직원가 50% 할인’ 같은 팻말들이 곳곳에 무심하게 꽂혀 있다. 크기와 무게에 따라 등급이 나뉘고 가격이 매겨진 후 이빨들은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날 것이다. 고급 와인 잔이나 파이프, 화려한 샹들리에 혹은 목걸이로. 특별히 더 높은 등급을 받은 이빨은 역사 속 위대한 코끼리의 모습을 본뜬 조각상이 될지도 모른다. 어떤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든 이것만은 확실하다.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물품은 아니라는 것.

출처 - picture book makers

재탄생한 이빨들은 이제 도시 어디에나 있다. 기념일을 맞이한 연인이 서로에게 다정하게 건넨 쇼핑백 속에, 예전부터 눈독 들이던 고급 파이프를 구입한 애연가의 품속에, 쇼핑으로 지난 한 주간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려 백화점을 찾은 회사원의 시선 속에. 그 물건 하나를 위해 초원에서 살던 인간들이 얼마나 많이 스러졌는지 코끼리들은 모른다. 아니,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다. 그들의 쇼핑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잔혹한 이빨 사냥 역시 그럴 것이다.

출처 - picture book makers

인간과 코끼리를 뒤바꾼 충격적인 이미지로 강렬한 메시지를 전한 <이빨사냥꾼>은 지난 2017년, 그림책의 노벨상인 볼로냐 라가치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적으로 그 이름을 알렸다. 작품은 꼬마의 악몽이었던 것으로 마무리되지만, 현실의 코끼리들은 잠에서 깨어나도 악몽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지난 2007년부터 2014년까지 아프리카에서 학살당한 코끼리의 수는 총 14만 4000마리. 오직 코끼리 상아를 얻기 위해서였다.

<이빨사냥꾼>을 읽으며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잃어간 수많은 코끼리들의 심정을 가만가만 헤아리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과연 우리는 무슨 권리로 경제적 이익을 위해 무고한 생명을 빼앗아 온 걸까? 불편하다는 이유로 그 사실을 외면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스러져 갔을까? ‘내가 대접받고 싶은 방식으로 타인을 대접하라’는 말이 꼭 사람들 사이에서만 적용되는 건 아닐 텐데, 그런 생각들이 말이다.

 

 

조원희의 색깔

<얼음소년>(2007). 출처 – 그림책박물관
출처 - 느림보출판사
출처 - Deskgram

사실 그림책 작가로서 조원희의 색깔은 다소 뚜렷해 보인다. 첫 작품인 <얼음소년>은 도시의 눈사람에게서 태어난 얼음소년의 이야기다. 한겨울에도 함박눈 대신 빗방울이 떨어질 만큼 지나치게 따뜻한 도시는 얼음소년이 살아가기엔 너무 벅찬 곳이다. 얼음소년은 훅훅 막히는 숨을 참으며 뜨끈한 공장 매연과 자동차 연기를 피해 돌아다니다 우연히 TV 속에서 꿈같은 장면을 발견한다. 온통 얼음산으로 이루어져 있고 거대한 흰곰이 얼음물 속에서 한가롭게 헤엄치는 세계를. 그러나 북극행 비행기에 몸을 실으려던 얼음소년은 비행기가 뿜어내는 뜨거운 열기에 두 다리가 스르르 녹아버리고, 비행기는 소년 없이 출발해 버린다. 점점 멀어지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얼음소년은 중얼거린다. “마지막 비행기도 놓친 걸까요?”

<중요한 문제>(2017). 출처 - 시사In
출처 - 네이버 이야기꽃 출판사 포스트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작품 <중요한 문제>는 제목 그대로 무엇이 진짜 중요한 문제인지를 가볍고 유쾌하게 풀어나간다. 어느 날 갑자기 원형 탈모를 겪게 된 수영강사 네모 씨에게 의사는 아주 중요한 문제라며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의사가 일러 준 처방은 네모 씨의 일상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것들이지만, 결국 네모 씨는 과감한 결정을 내린다. 오랫동안 출퇴근길을 함께 했던 자전거도, 지친 하루를 노곤하게 풀어주던 뜨거운 목욕도, 목욕 후에 마시던 차가운 맥주나 복슬복슬한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초콜릿을 녹여 먹던 달콤한 휴식도 모두 안녕. 매일매일 그를 미소 짓게 하던 소소한 순간들이 그렇게 하나둘 사라져간다.

출처 – 그림책박물관
출처 - 시사In

그때부터 네모 씨의 삶은 물 밖으로 잘못 튀어나온 물고기처럼 퍼석하게 말라간다. 좋아하던 개그 프로그램이나 꼬마 수강생들의 장난에도 도무지 웃음이 나오질 않고,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머리카락 대신 찐득찐득 우울이 달라붙는다. 그런 그가 다시 웃기 시작한 건 그만두었던 것들을 되찾으면서부터다. 모두 똑같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삶에 꾸역꾸역 한 가지 매뉴얼을 만들고 거기에 따라 각자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마저 결정하곤 하는 우리들. 푹 뒤집어썼던 모자를 열어젖히고 아예 머리를 시원하게 밀어버린 네모 씨의 모습은 그래서 더 자유로워 보인다.

<얼음소년>. 출처 - 부산일보

그런 말이 있다. 좋은 어른이란 직접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이라는 말. 조원희의 그림책을 읽고 있으면 바로 그 말이 떠오른다. 그는 정해진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만의 방식으로 담담히 보여줌으로써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 생각하게 한다. 특정한 작품에 감히 ‘좋은 작품’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다면, 그중에 조원희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Writer

언어를 뛰어넘어, 이야기에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마음속에 새로운 씨앗을 심어주고, 새로운 세계로의 통로가 되어주니까. 그래서 그림책에서부터 민담, 괴담, 문학, 영화까지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있다. 이렇게 모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중. 앞으로 직접 이야기를 만들기도 하며 더 풍성하고 가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나가기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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