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임(Grime)은 여전히 생소한 장르다. 2016년, 그라임이 해외에서 다시금 떠올랐을 때도 우리나라에서 반응은 크지 않았던 거로 기억한다. 물론 서브컬처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리스너들에게 그라임은 너무도 익숙한 장르일 수 있다. 하지만 대중적 시각으로, 그라임은 아직 ‘굳이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장르다. 그나마 작년 방영한 <쇼미더머니 6>에서 지코, 딘이 프로듀싱한 ‘요즘것들’ 이라는 곡이 그라임 타이틀을 들고나와, 잠시나마 이슈가 되긴 했다. 그렇다고 이게 지속적인 관심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 영비, 올티, 해쉬스완, 킬라그램, 행주 ‘요즘것들’

 

그렇다면 그라임이란 무엇일까? 사전에는 ‘UK 개러지(UK Garage) 등 하우스계 클럽 음악에 랩과 레게의 요소를 더한 음악 장르의 총칭’이라고 정의돼 있다. 다시 말하면, 자메이카 음악에 뿌리를 둔 UK 개러지, 덥(Dub)과 같은 장르에 힙합의 요소가 얹어진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라임은 런던에서 태동한 장르다. 잠시 언급한 것처럼, 음악적으로 뿌리를 타고 올라가면 자메이카 음악에서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 체감하는 그라임이라는 장르, 라이프스타일 자체는 런던에서 구체화되었다. 먼 아프리카에서 온 이민자, 빈민층에 속했던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경제적, 지위적 차별에 대한 저항을 담은 장르였다.

그라임이라는 이름으로 구체화한 건 2000년대 초, 영국의 해적 방송과도 얽혀 있다. 기본적으로 해적 방송이란 라이선스 없이 방송하는 걸 말한다. 그라임은 이 해적 방송을 통해 널리 퍼져나갔다. 연줄도, 자금도 없었던 이스트 런던의 그라임 아티스트들이 작업물을 가장 손쉽게 알릴 수 있는 매체가 바로 해적 방송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라임은 청소년들과 클럽 신에 빠르게 유입되며, 한 장르로의 정체성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이후 크루 롤 딥(Roll Deep), 디지 라스칼(Dizzee Rascal), 와일리(Wiley) 같은 아티스트가 그라임을 메인스트림 궤도에 올려놓았다. 그라임은 꾸준히 발전되어 왔고, 현재는 영국을 넘어 전 세계로 뻗어가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많은 그라임 아티스트 중, 장르 이해를 도울 랩스타 세 명을 꼽아 소개하려 한다. 적어도 그라임이 청각적으로 어떤 느낌을 주는지, 짚어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Skepta

출처 – conversations about her

에이셉 맙(A$AP Mob) 멤버들을 좋아하는 리스너라면, 스켑타(Skepta)라는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가장 최근에는 에이셉 라키(A$AP Rocky)와 함께 ‘Praise The Lord’라는 곡을 함께했다. 이외에도 여러 작업물이 있다. 나이지리아 출신 아버지 밑에서 자란 스켑타는, 그라임을 대표하는 레이블 중 하나인 보이 베러 노우(Boy Better Know)의 창단 멤버다. 2005년쯤 랩을 시작했고, 활동 이후 많은 작업량을 선보이며 그라임 신에서 입지를 공고히 했다. 매년 크고 작은 작업물을 발표한 스켑타의 커리어에서, 가장 인상 깊은 앨범은 바로 2016년작 <Konnichiwa>였다. 수록곡 ‘That’s Not Me’, ‘Shutdown’ 등이 상업적 성공을 거둔 것은 물론, 영국에서 매년 단 하나의 앨범만을 꼽는 ‘머큐리 프라이즈’에서 <Konnichiwa>가 선정되며 스켑타는 커리어의 정점을 찍는다(다만, 앨범이 완벽한 그라임 앨범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Skepta ‘That’s Not Me (feat. Jme)’
Skepta ‘Man’

위의 곡 ‘That’s Not Me’에서 피처링으로 참여한 아티스트 제이미(Jme)는 스켑타와 실제 형제사이다. 두 아티스트가 만들어낸 시너지는 2016년을 ‘그라임 르네상스’로 기억되게 할 정도로 컸다. 한편,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알 수 없는 로우파이함에 의아함이 들 수 있지만, 이는 그라임의 특성을 잘 나타내는 요소다. 해적 방송으로 성장한 그라임인 만큼, 초창기 뮤직비디오 역시 이러한 저렴함이 특징적이었다. 2014년 발표한 이 뮤직비디오가 그와 비슷한 색깔을 띠는 것도 과거에 대한 오마주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2014년 ‘모보 어워즈’에서는 ‘That’s Not Me’가 베스트 비디오 상을 타기도 했다. 이처럼 스켑타는 나름의 전통을 지키면서도, 에이셉 맙 멤버들과 합을 맞추는 트랜디함까지 겸비했다. 음악 내적, 외적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으니 관심이 생겼다면 찾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Wiley

Photo - Ashley Verse

와일리(Wiley)는 그라임의 대부라고 불린다. 실제로 그라임이라고 불린 첫 번째 곡이 와일리의 2002년작 ‘Eskimo’라고 언급되기도 한다. 그는 롤 딥이라는 레이블을 설립해 여러 동료를 모아 활동했다. 그게 바로 2001년도의 일이다. 앞서 소개한 스켑타 역시 잠시나마 롤 딥의 멤버였을 정도로, 그라임 신에서 롤 딥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사실 롤 딥 이전에도 와일리는 존재했다. 90년대부터 음악을 시작해 그라임의 기반을 만들어 온 인물이 바로 와일리다. 그의 업적은 국가적 차원으로까지 뻗어 나가, 올해는 힙합 아티스트 최초로 대영제국훈장(MBE)를 수상하기도 했다. 살아있는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Wiley 'Speaker Box' MV
Wiley 'Bring Them All' (Feat. Devlin)

와일리는 2017년 열한 번째 정규 앨범 <Godfather>를 발매하며 은퇴를 고했다. “더는 라디오에 얼굴을 비추거나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자신의 것이 아니다”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업적을 집대성하려는 듯, 와일리는 <Godfather>에 수많은 그라임 아티스트를 초청했다. 1세대라 불리는 베테랑, 혹은 그 이상의 아티스트부터 칩(Chip), 아이스 키드(Ice Kid) 같은 신예들까지 다양한 아티스트를 한자리에 모았다. 앨범은 메타크리틱(Metacritic) 84점을 기록하며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재미있는 점이 있다면, 와일리는 올해 은퇴를 번복하고 <Godfather II>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가끔 래퍼들이 은퇴를 선언하고 돌연 되돌아왔을 때 비판을 면치 못했는데, 와일리만큼은 상황이 다르다. 누가 이토록 멋진 래퍼를 욕할 수 있을까. 와일리라는 역사는 현재 진행형이다.

 

Stormzy

출처 - independent

 스톰지(Stormzy)는 93년생으로 비교적 젊은 래퍼다. 앞선 두 래퍼의 음악을 듣고 자란 그라임 키드라고 스스로 밝히기도 했다. 스톰지는 등장부터 묵직했다. 언더그라운드에서 그라임 비트에 맞춰 프리스타일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독립적으로 발표한 데뷔 EP <Dreamers Disease>로 ‘모보 어워즈’에서 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이후 2015년 공개한 ‘Shut Up’이 그야말로 대박을 치며 엄청난 성장을 이뤄냈다. 단순히 런던 신에서뿐만 아니라 아이튠즈 40위를 기록하는 등 이름을 널리 알렸다. 정규 앨범 한 장 없이 이뤄낸 성과였다. 그라임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신인으로 평가받았다.

STORMZY ‘COLD’
STORMZY ‘BIG FOR YOUR BOOTS’

2016년, 스톰지는 정규앨범 <Gang Signs & Prayer>를 발매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스톰지의 데뷔 앨범은 크게 성공적이었다. 런던 빈민가에서 일어나는 일을 일련의 서사로 풀어냄은 물론, 사운드적으로도 독특한 색깔을 선보였다. 그라임을 기반으로 팝, 가스펠, 알앤비를 적재적소에 녹여내며 한편의 풍성한 앨범을 만들었다. 특히 그라임과 팝 사운드를 결합한 ‘BIG FOR YOUR BOOTS’는 엄청난 사랑을 받으며, 명실상부 앞으로의 그라임을 짊어질 래퍼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라임의 중요한 요소로 평가받는 영국 특유의 발음도, 중저음의 묵직함과 함께 매력적으로 들려온다. 길지 않은 커리어의 래퍼지만,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다.

 

메인 이미지 via ‘death kiss media’(Wiley), ‘UK Grime’(Storm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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