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민 캐릭터들 ©Moomin CharactersTM

‘무민’은 누구든 떠올리면 머릿속에 모습이 그려질 정도로 우리에게 친근한 캐릭터다. 동글동글한 외형과 귀여운 생김새로 인기를 끈 무민은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한 캐릭터 상품과 테마 카페를 통해 만나볼 수 있다. 이처럼 ‘무민’이란 캐릭터가 대중적으로 꽤 유명한 데 비해 그 스토리에 대해선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흔히들 무민은 아이들을 위한 귀여운 캐릭터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무민 골짜기에 얽힌 이야기들은 생각보다 깊은 삶의 철학을 담고 있다.

1990년 무민 애니메이션 중

무민이 탄생한 건 1945년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갈 때 즈음으로, <무민 가족과 대홍수>라는 소설을 통해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7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무민 시리즈는 첫 출간 이후 동화, 소설, 애니메이션, 코믹 스트립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꾸준히 소개되어 왔다. 무민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곳은 주로 무민 가족이 사는 무민 골짜기다. 아름다운 자연 풍경이 펼쳐지는 무민 골짜기에서 여유로운 일상을 살아가는 무민 가족의 모습은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힐링과 치유의 감상을 안긴다.

“난 그저 감자를 키우고 꿈을 꾸면서 평화롭게 살고 싶다고!”

- 무민 코믹 스트립 중

토베 얀손 Via bbc news

무민을 탄생시킨 작가 토베 얀손(Tove Jansson, 1914~2001)은 핀란드의 한 예술가 가정에서 자란 화가로 어릴 적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는 핀란드의 자연친화적 환경과 자유로운 가정 분위기에서 자라온 그는 자신의 정신세계를 무민의 세계관 속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천진난만한 성격의 무민 가족과 자연 속에서 어우러져 사는 그들의 삶의 방식은 토베 얀손이 자라온 환경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아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무민 골짜기 ©Moomin CharactersTM

토베 얀손이 처음 무민을 만들게 된 계기는 전쟁이란 끔찍한 현실을 피해 자신만의 안식처를 구축하기 위해서다. 그가 무민의 첫 소설을 집필하고 있을 당시는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있을 때로 그의 남동생은 군에 입대한 상태였다. 그는 전쟁의 공포로부터 숨기 위해 동화를 쓰기 시작했고 마치 유토피아와도 같은 무민의 세계를 창조했다. 매사에 낙관적이며 평화롭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무민 가족의 모습은 전쟁에서 벗어나고 싶은 토베 얀손의 이상향이 반영된 것이다.

©Moomin CharactersTM

한편 무민이 처음 세상에 소개되었을 당대에는 책들에 교육적인 메시지가 담기는 것이 중요했다. 그에 비해 무민의 작품들은 특별한 권선징악이나 명확한 교훈 없이 이야기가 흘러간다. 토베 얀손은 그러한 자신의 이야기 특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재미있으라고 쓴 거예요.
가르치려고가 아니라요.”

무민 코믹 스트립 중 ©Moomin CharactersTM

그가 말한 대로 무민의 이야기들은 독자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그저 무민 가족의 소소한 일상과 그들이 삶을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무민 가족은 그 어떤 위기가 닥쳐도 태평하다. 오히려 그 위기들을 삶에서 마주하는 하나의 모험이라 받아들이고 차분하고 침착하게 대응한다. 어떤 문제를 맞닥뜨리든 이를 작은 소동 따위로 여기고 마는 무민 가족의 자세는 우리 삶에서 위기를 맞이할 때 어떻게 헤쳐 나가면 좋을지에 대한 하나의 방향키 역할을 해준다.

<위험한 여름> 영문판 표지 ©Moomin CharactersTM

토베 얀손이 1954년 발표한 무민 시리즈 연작 소설인 <위험한 여름>에는 대홍수로 인해 무민 골짜기가 엉망이 되어버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집이 온통 물바다가 되어 집 안 모든 가구나 물건들이 떠밀려가는 상황에서도 무민 가족은 태평하다. 인생의 모험이 시작됐다고 여기며 차분하게 돛단배를 탈 준비를 하고 그 와중에 집에 굴러다니는 시럽을 발견하곤 기뻐한다. 무민 가족이 세상의 거친 물살을 헤쳐 나가는 방법은 이렇듯 단순하면서도 어딘가 뼈가 있다.

무민 부활절 포스터 ©Moomin CharactersTM

한편 무민의 세계관은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배경을 둔 만큼 현실과 동떨어져 있으며 마냥 낙관적인 관점을 가졌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무민 골짜기는 처음 토베 얀손이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인 만큼 유토피아적인 성격이 짙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무민의 이야기들은 전체적으로 평온하게 흘러가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늘 묘하게 어두운 분위기가 깔려 있다. 무민이 겪는 모험담에는 행복과 무한긍정의 힘뿐만 아니라 외로움, 슬픔, 불안, 불행 등 복잡한 감정이 함께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무민의 겨울> 영문판 표지 ©Moomin CharactersTM

1957년 출간한 무민 시리즈의 5번째 연작 소설 <무민의 겨울>에서는 이런 어두운 면모가 더욱 짙게 드러난다. <무민의 겨울>에서 무민은 겨울잠을 자던 도중 한겨울 밤에 홀로 깨어난다. 본래 무민 가족은 봄이 올 때까지 집에서 겨울잠을 자는 전통이 있는데 어느 날 무민만이 유일하게 깨어난 것이다. 처음으로 꽁꽁 얼어붙은 겨울의 풍경을 마주한 무민은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렵다.

“죽어 버렸어. 내가 잠든 동안 온 세상이 죽어 버렸어.
이 세상은 내가 모르는 누군가를 위한 곳이야.”

- <무민의 겨울> 중

이 소설이 출간됐던 당시 토베 얀손은 신문에 무민 코믹 스트립을 오랫동안 연재해오며 많이 지치고 우울했던 상태였다. 또한 이 책을 집필할 때에 그는 일생을 함께 보내게 될 연인 툴리키와 막 관계를 시작하려던 때였다. 둘은 죽을 때까지 4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한 동반자였으나, 처음 사랑에 빠졌을 당시 유럽은 ‘동성애’에 대해 억압적인 분위기였고 그들이 살았던 핀란드는 동성애를 금지하는 법까지 존재했다. <무민의 겨울>은 토베 얀손이 처음 툴리키와 연애하며 사회적으로 느꼈던 억압과 불안감을 담아낸 작품이다. 특히 모든 이가 잠들어 있는 추운 겨울밤에 무민이 홀로 깨어난다는 설정은 그런 작가의 고립감과 슬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토베와 툴리키 ©Moomin CharactersTM

무민은 눈에 뒤덮인 숲을 헤매던 중 새로운 캐릭터 ‘투티키’를 만나게 된다. ‘투티키’는 토베의 연인 툴리키의 애칭 ‘투티’에서 이름을 따온 캐릭터로, 실제 토베 얀손은 이 캐릭터를 만들 때 툴리키를 많이 본떴다고 밝혔다. 자신의 오두막에서 홀로 살고 있는 투티키는 매우 독립적이고 합리적인 성격으로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로운 무민이 첫 겨울나기를 보내는 데 길잡이가 되어준다.

난로를 쬐는 투티키, 리틀 마이, 무민 - 토베 얀손, <일과 사랑> 중

“모든 게 아주 불확실하다는 게 나를 차분하게 만들어.”
“그런 일도 일어나는 법이지. (…) 모든 일은 직접 겪어 봐야지. 그리고 혼자 헤쳐 나가야 하고.

- <무민의 겨울> 중

이는 처음으로 두려움과 외로움을 느끼며 겨울의 적막함을 온몸으로 체감한 무민에게 투티키가 건네는 말들이다. 복잡한 인생의 역경들을 이토록 차분하게 받아들이는 투티키의 사고방식에는 토베 얀손의 삶의 철학이 깃들어 있다.

무민 스케치 ©Moomin CharactersTM

이처럼 무민의 이야기는 우리 안에 넘치는 불안감, 슬픔 등의 복잡미묘한 고민들을 헤쳐 나가는 하나의 삶의 방식을 제시해주고 있다. 어떤 위기나 문제가 닥치든 이를 의연하게 받아들이곤 일상에 깃들어 있는 작은 행복들을 발견하면서 사는 삶 말이다. 우리도 무민 가족처럼 인생을 하나의 바다로 여기고 매번 불어오는 파도의 물살들을 차분하게 가로질러 보면 어떨까? 그러면 우리네 인생도 무민의 모험담처럼 재밌는 이야기들로 꾸며질 수 있지 않을까.

 

필자 소개
Jude(김유영)
텅 빈 무대와 백 스테이지, 사람들 간의 복작거림이 좋아 오랫동안 무대 근처에서 머물고 싶은 아마추어 연출가입니다. ‘아마추어’의 어원은 Amor(사랑)에서 비롯됐다는데, 그 애정 어린 시선을 간직해 공연, 영화, 책 등 다양한 작품을 소개할 수 있는 문화예술 큐레이터를 꿈꾸고 있습니다.

Writer

소소한 일상을 만드는 주위의 다양한 것들을 둘러보길 좋아합니다. 무엇보다 ‘이야기’들엔 사람들의 일상을  단단하게 지켜주는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믿음을 갖고 공연, 영화, 책 등 여러 장르의 작품을 소개해, 사람들의 일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문화예술 큐레이터가 되길 꿈꾸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