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그러진 얼굴, 서늘한 눈빛,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지금까지 유령들은 대부분 원한 가득한 존재로 그려져 왔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제각각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듯, 이 세상 어딘가에 사람과 친해지고 싶어 하는 다정한 유령들도 존재하지 않을까? 그런 ‘튀는’ 생각에 퍼즐 조각처럼 들어맞는 두 명의 유령이 있다. 어딘가 어설프지만 그래서 더 사랑스러운 그들을 소개한다.

 

<레오, 나의 유령 친구>

출처 - Gallery Nucleus
어느 봄날, 유령 레오의 집에 새로운 가족이 이사를 온다. 출처 - Gallery Nucleus

오랫동안 비어 있던 세모 지붕 집. 하지만 사실 그곳에는 꼬마 레오가 산다. 레오의 하루는 엎드려서 책도 읽고 먼지로 그림도 그리고 이따금 삐걱삐걱 낡은 목마를 타기도 하면서 조용하고 평화롭게 흘러간다. 나뭇가지 위로 꽃잎이 수 놓인 어느 봄날, 새로운 가족이 이사 오기 전까지는.

함께 살 사람들이 생겼다는 소식에 레오는 잔뜩 들떠 환영 파티를 준비한다. 따뜻한 홍차를 끓이고 바삭바삭 토스트도 굽고, 좋은 친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쪽지처럼 접어 예쁜 쟁반에 함께 담아낸다.

출처 - Tree House Kid and Craft

하지만 레오의 친절은 생각지 못한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쟁반에 겁먹은 사람들이 정리하던 짐을 집어 던지고 욕실로 도망친 것이다. 집안의 유령을 쫓아내겠다며 목사와 심령술사를 부르기까지 한다. 아무도 자신을 반기지 않는다는 사실에 풀이 죽은 레오는 결국 스스로 집을 떠난다. 너무 오랫동안 집 안에만 머물러 있었으니 이제 밖으로 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결국 떠돌이 유령이 되기를 택한 레오. 출처 - amazon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치지만 그 누구도 레오를 알아보지 못한다. 출처 - Gallery Nucleus

세상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근사해져 있지만 소중한 추억이 스며들어 있던 장소들은 사라지고 없다. 자주 가던 길모퉁이 과자가게는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 없고, 길을 물어보고 싶어도 사람들은 레오를 스쳐 지나간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시내 한복판, 레오는 집에 혼자 있을 때보다 더 외롭다. 휘잉, 가슴 한가운데로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지나간다.

출처 - Brain Pickings
출처 - Gallery Nucleus

도시 위로 노을빛이 드리워질 즈음, 정처 없이 돌아다니던 레오는 길에서 혼자 놀던 제인을 마주친다. 놀랍게도 레오를 한눈에 알아본 제인은 같이 놀자며 대뜸 말을 걸어온다. 상상력 넘치는 제인과 함께 동굴 속 용을 무찌르고 왕실 놀이를 하며 레오는 처음으로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나 제인이 저를 상상 친구로 여긴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후, 레오는 우울한 고민에 빠진다. 정체를 밝히고 진짜 친구로 인정받고픈 마음과 제인을 겁먹게 해 또다시 혼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사이에서.

<레오, 나의 유령 친구> 북 트레일러

뉴욕타임스 선정 베스트셀러 작가인 맥 바넷이 쓰고 크리스티안 로빈슨이 그린 이 작품은 서로 다른 두 꼬마가 친구가 되는 과정을 아주 사랑스럽게 그려낸다. 레오는 사람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세상 경험도 적은 꼬마 유령이지만, 사소한 반응 하나에 쉽게 상처받거나 감동받고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는 점에서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일까. 사람들 틈에서 제인이 레오를 알아볼 때, 정체를 알아차린 후에도 여전히 친구로 생각할 때, 레오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 한구석에도 잔잔한 물결이 퍼진다.

인간관계도 쇼핑할 때처럼 이것저것 비교하고 따져보는 세상에서 제인은 전설 속 요정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꿈꾸지만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존재. 레오와 제인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내게도 제인 같은 존재가 있는지 더듬어 보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 나만의 제인을 기다리기보다는 누군가에게 먼저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어찌 됐건 향긋한 홍차와 따끈한 토스트로 한밤중 조촐하게 열린 레오와 제인의 파티에 슬며시 끼어들고 싶어지는 책이다.

 

 

<할아버지 집에는 귀신이 산다>

출처 - 한겨레

집들이 언덕을 따라 서로 등을 기대고 붙어 있는 부산의 작은 달동네. 이곳은 할아버지의 지난 오십 년이 곳곳에 묻어 있는 곳이다. 함께 사는 가족은 없지만 라디오와 신문을 친구 삼아 비질을 하고 화분에 물을 주며 묵묵히 삶의 궤적을 이어가는 곳.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딱히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이따금 바람 한 점 없이도 신문이 저 혼자 펄럭이고 누군가가 쳐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걸 빼면.

넘어져 기절했다 깨어난 이후부터 할아버지의 눈에는 귀신이 보인다. 출처 - 그림책박물관

 

출처 - 그림책박물관

어쩌면 그날도 다른 날과 똑같은 하루가 될 수도 있었다. 무언가에 발이 걸려 꽈당 넘어지지만 않았더라면. 한참 후 깨어난 할아버지의 눈에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언뜻 보면 푸르스름한 연기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턱수염을 기르고 나막신을 신은 유령이다. 그제야 할아버지는 지금껏 이 유령과 기묘한 동거를 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실 이 마을은 일본인들의 공동묘지 위에 세워진 마을이었던 것이다.

출처 - 꿈교출판사 블로그
출처 – 꿈교출판사 블로그

일본 사람들이 조상의 유골을 찾으러 찾아왔다는 신문 기사를 읽은 유령은 후손들에게 자신이 묻힌 곳을 알려주면 얌전히 떠나겠다는 제안을 한다. 할아버지는 재빨리 집안 곳곳을 뒤져 지금껏 댓돌로 쓰이던 비석을 찾아내지만, 그곳에 적힌 이름은 유령의 것이 아닌 낯선 이의 것. 고향으로 돌아갈 꿈에 부풀어 있던 유령은 깊은 상심에 빠진다. 그리고 잠시 후, 제 비석을 찾아달라고 조르기 시작한다. 죽기 전에 묻어둔 은을 몽땅 넘겨주겠다고 설득하기도 하고, 세숫물이며 거울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며 겁을 주기도 한다. 결국 할아버지는 유령의 비석을 찾아주겠다고 약속하고, 그렇게 둘 사이에 묘한 계약이 성립된다.

그렇게 비석을 찾기 위한 여정이 시작된다. 출처 - 꿈교출판사 블로그

그러나 아무리 마을 구석구석을 살펴도 유령의 비석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결국 지쳐버린 할아버지는 평상에 앉아 숨을 돌린다. 잔뜩 풀죽은 유령도 따라 앉는다. 어쩌다 이곳까지 오게 되었냐는 물음에 유령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먼 옛날, 돈을 벌러 배를 타고 부산의 일본인 마을까지 왔다가 병에 걸려 그곳에 묻혔으며 다시는 가족들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 유령의 이야기에서 할아버지는 3.8선이 그어지기 직전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오던 열다섯 살의 자신을 본다. 뒤따라 갈 테니 먼저 내려가라던 가족들과 영영 헤어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어린 날의 자신을. 묘한 유대감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시간을 뛰어넘고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출처 - 한겨레

어린이책 작가 이영아가 쓰고 그린 이 작품의 배경이 된 곳은 부산의 아미동 비석마을. 실제로 조선시대 때 무역 일을 하다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일본인들이 묻힌 곳이다. 훗날 갈 곳 잃은 실향민들이 터를 잡으면서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섰지만, 지금도 가파른 계단이나 담벼락, 화분 받침대처럼 마을 곳곳을 들여다보면 비석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서늘한 괴담을 연상시킬 법도 한 이 이야기는 무섭기보다는 왠지 가슴 한쪽이 아릿하게 다가온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이름 없는 존재로 타국에 머물러야 했던 이들과 누군가의 묘지란 걸 알면서도 그 위에 터를 잡을 수밖에 없었던 실향민들의 심정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역사는 후대인들에게 책에 적힌 몇 줄의 문장일 뿐이지만, 그 시기를 온몸으로 겪어낸 이들에게는 아무리 길고 화려한 미사여구로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시간일 것이다. <할아버지 집에는 귀신이 산다>에서는 그 시간을 다만 한 귀퉁이만이라도 따뜻하게 보듬고자 하는 작가의 마음결이 느껴진다. 제목에서 풍기는 오싹한 분위기에 비해 비교적 잔잔하게 흐르는 이 작품은 그래서 마음에 더 오래 남는다.

우리는 우리가 잘 모르는 것들에 대해 공포를 느낀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존재가 바로 유령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림책들을 읽고 있자면 아무렴 어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사람과 유령은 서로가 서로의 과거이자 미래라는 점에서 하나의 같은 선 위에 놓인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유령에 대한 감정이 꼭 공포심뿐이어야만 할 이유가 있을까. 앞으로는 유령을 대하는 관점이 조금 더 다정하고 다양해져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문득 해 본다.

 

 

Writer

언어를 뛰어넘어, 이야기에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마음속에 새로운 씨앗을 심어주고, 새로운 세계로의 통로가 되어주니까. 그래서 그림책에서부터 민담, 괴담, 문학, 영화까지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있다. 이렇게 모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중. 앞으로 직접 이야기를 만들기도 하며 더 풍성하고 가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나가기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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