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돈으로 좋은 작품을 만드는 건 쉽다. 하지만 많은 돈이란 건 소수의 사람들이나 만져볼 수 있다. 우리 중 누구도 평생 넉넉하다 느낄 만큼의 돈을 갖기 힘들다. 영화감독들도 영화감독을 꿈꾸는 이들도 마찬가지. 영화 만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할 만큼의 돈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돈은 언제나 부족하다. 하지만 다행인 건 진정한 실력은 적은 돈을 쓰고도 높은 퀄리티를 낼 수 있을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는 거다.
여기 네 편의 영화가 있다. 억 단위의 제작비로도 저예산이라는 타이틀이 붙는 영화판에서 억은커녕 1000만원, 2000만원으로, 심지어 250만원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것도 근사하디 근사한 영화를. 이 영화들이 어떻게 제작비를 줄여나갔는지, 졸라맨 허리띠 사이로 그 재미와 감동이 어떻게 비어져 나왔는지 살펴보자. 보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통장 잔고를 확인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내 용기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내 통장의 잔고로도 이들처럼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제작비 2000만원의 <용서받지 못한 자>

The Unforgiven ㅣ2005ㅣ감독 윤종빈ㅣ출연 하정우, 서장원, 윤종빈

중앙대학교 영화학과를 다니던 스물일곱의 한 청년이 졸업작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군대 이야기. 희화화되거나 포장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군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막 군대를 제대한 그 나이 또래면 다 그렇듯 돈은 넉넉하지 않았다. 미장센 단편영화제에서 대상을 거머쥐며 받은 상금 500만원에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받은 제작지원비 1000만원, 개인 사비까지 긁어모아보니 수중엔 고작 2000만원. 결국 배우들은 개런티도 포기했다. 심지어 감독까지 배우로 투입됐다. 돈이 없으니 세트는 생각도 못 했다. 국방부에 가짜 시나리오를 제출해 군부대 촬영을 허가받았다. 그렇게 허락받은 기간이 겨우 3일. 그 안에 내무반 이야기를 다 촬영해야 했다. 그리하여 간신히 완성한 졸업작품 <용서받지 못한 자>.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의 눈에 띄어 그해 부산영화제에서 PSB 관객상은 물론 국제영화평론가 협회상 등 4개 상을 휩쓴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바다를 건너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까지 초청되었다. 전국 관객 1만 647명을 동원해 순수익 7000만원까지 남겼다. 그렇게 윤종빈과 하정우의 시대는 열렸다. 단돈 2000만원으로부터.

<용서받지 못한 자>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말년 병장 ‘태정’(하정우)과 그의 후임이면서 중학교 동창인 ‘승영’(서장원). 그리고 ‘승영’의 후임인 ‘지훈’(윤종빈)의 군대 이야기. 군대의 좋지 않은 관행을 본인이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하는 승영과 고문관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지훈. 나름 모범적인 군 생활을 했다고 자부했건만 사사건건 충돌하는 승영 덕에 군 생활이 꼬이기 시작한 태정. 전혀 다른 세 명의 캐릭터이지만 군대가 결국 그들에게 트라우마가 된다는 점은 똑같다. 이 나라의 모든 남자들에게 그러하듯이.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하이라이트

<용서받지 못한 자>가 개봉한 지 13년이 흘렀다. 그 사이 <용서받지 못한 자>는 군대 영화의 바이블이 되었다. 하지만 군대 영화라고 단정 짓기에는 좀 억울하다. 이 영화만큼 시스템 안에서 한 인간이 어떻게 바뀌어가는지 어떻게 좌절해가는지 잘 담고 있는 영화는 또 없으니까.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모두 알 것이다. 내가 그 자리에 놓인다고 해도 태정이나 승영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걸. “군대 갔다 오면 사람이 된다고 흔히 이야기하는데, 그 사람이 된다는 것이 오히려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싶었다”는 윤종빈 감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예고편

국방부도 속일 만큼 패기 넘치던 영화학과 졸업반 스물일곱 청년은 이제 칸 공식부문에 진출하는 내로라하는 영화감독이 되었다. 개런티 없이 열정만으로 영화에 출연했던 신인배우 하정우는 이제 천만은 거뜬히 불러모으는 국민 배우가 되었다. 아마 윤종빈 감독은 다시는 이런 제작비로 영화를 찍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거짓 시나리오로 국방부를 설득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 영화는 참으로 소중하다.

 

 

제작비 1000만원의 <낮술>

Daytime Drinking ㅣ2008ㅣ감독 노영석ㅣ출연 송삼동, 육상엽, 김강희, 이란희

시나리오 공모전이란 공모전은 다 떨어지고 영화아카데미 입학시험에서도 낙방한 데다 나이가 많아서 연출부에도 들어갈 수 없었던 한 영화감독 지망생은 성공하면 갚겠다며 어머니에게 1000만원을 빌린다. 그리고 그 돈으로 세상 어느 공모전에서도 수상한 적 없는 자신만의 시나리오로 직접 영화를 찍기 시작한다. 제작비가 부족하니 13일 동안 10회 촬영한 것이 전부. 각본, 연출, 촬영, 음악, 편집, 미술까지 혼자서 1인 8역을 하는 건 기본. 배우들도 조감독, 스크립터, 녹음 등 스태프를 겸했다. 그럼에도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줄 수 있는 건 개런티가 아닌 최대한의 술뿐. 조명비용을 아끼기 위해 낮에만 촬영하고 밤에는 술판을 벌였으니 약속은 지킨 셈이다. 영화의 주요배경이 펜션이라 촬영뿐만 아니라 숙식까지 해결해 비용을 절감했다. 조연은 전부 주민분들로 섭외했다. 슈퍼마켓 주인 할머니, 콧등치기 국수집 주인아주머니, 버스기사 모두 현지에서 직접 캐스팅한 연기와 영화가 난생처음인 분들. 그렇게 완성된 영화가 <낮술>이다.

이 영화는 부산영화제 출품에서도 떨어져 마음을 접고 있던 차에 2008년 전주영화제에서 JJ Star상과 관객평론가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다음은 스위스 로카르노국제영화제 초청. 로카르노 영화제는 심지어 감독의 첫 번째 해외여행이었다. 첫 번째 해외여행은 이내 세계 여행이 되었다. 캐나다 토론토국제영화제, 그리스 테살로니키국제영화제, 스웨덴 스톡홀롬국제영화제, 프랑스 브졸영화제 등 해외 여러 영화제에 초청되기 시작했다. 국내에 개봉하기 전에 미국에 선판매까지 되었다. 개봉 후 제작비 대비 12배 이익도 거두었다. 그렇게 노영석 감독은 어머니와의 약속을 제대로 지켰다.

<낮술> 예고편

<낮술>은 어설픈 영화다. 간혹 초점이 나가기도 하고 편집이나 앵글은 어색하다. 하지만 그래서 주인공 ‘혁진’(송삼동)의 황당무계한 로드무비가 더 와닿는다. 마치 홈비디오로 찍은 친구의 난처한 모험을 보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 기술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만큼은 재미있다. 이야기에 몰입하다 보면 그 어설픈 화면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혁진의 여정을 따라 빵빵 터지며 어느새 영화의 결말에 이르게 된다. 공모전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자신이 직접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고 하니 이런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닌 감독을 떨어뜨려준 공모전 심사위원에게 감사하고 싶다.

 

 

제작비 250만원의 <델타보이즈>

Delta Boys ㅣ2016ㅣ감독 고봉수ㅣ출연 백승환, 신민재, 김충길, 이웅빈, 윤지혜

영화 전공자도 아니었다. 영화에 딱히 큰 꿈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보험회사, 공사장, 세탁소를 전전했다. 그러던 중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스물여덟. 뭘 하면 재미있을지 생각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두 가지를 발견했다. 그중 하나가 ‘이야기를 꾸며내는 일’. 그 길로 영화 아카데미에 등록했다. 3개월 속성과정으로 촬영과 편집을 배웠다. 바로 첫 작품에 돌입했다. 삼촌을 설득해 연기를 시키고 촬영, 음향, 조명은 혼자 힘으로 해결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개구녕>. 어느 날 갑자기 뭐라도 해야겠다 다짐했던 청년은 끝내 뭐라도 하긴 했다. 7년 동안 200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었으니까.

영화를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었지만 200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면서 한가지는 확실히 배웠다. 최대한 적은 돈으로 최대한 많은 재미를 끌어내는 법. 그 노하우가 결집해 탄생한 것이 바로 첫 장편 영화 <델타보이즈>다. 제작비는 250만원. 앞서 다룬 두 영화가 대작 영화로 느껴질 정도다. 제작 기간은 15일, 촬영은 고작 9회 차. 완성된 시나리오도 없이 상황만 설정해놓고 배우들의 애드리브로 채워 넣었다. 배우들은 개런티를 포기하는 걸 넘어 분장 비용까지 본인이 부담했다. 조명을 쓸 수 없어 광량이 적어도 되는 카메라를 썼다. 몇 안 되는 밤 신(scene)은 형광등 두 개로 버텨냈다. 극 중 먹는 신에선 구하기 쉽고 비용도 저렴한 라면을 소품으로 활용했다. 소품은 이내 스태프들의 끼니가 되었다. 제작비 문제로 컷을 여러 번 나눌 수 없기에 촬영은 롱테이크로 진행했다. 주요 배경으로 나오는 간판 공장마저 일록 역할의 배우 백승환이 실제로 일했던 곳. 그렇게 영화를 찍고 싶다는 마음 그 하나로 제작비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대성공. 17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경쟁부문 대상을 받으며 개런티 대신 상금을 배우와 스태프들이 나눠가졌다.

<델타보이즈> 예고편

 

 

제작비 2000만원의 <튼튼이의 모험>

Loser’s Adventure ㅣ2017ㅣ감독 고봉수ㅣ출연 김충길, 백승환, 신민재, 고성완, 윤지혜

고봉수 감독의 첫 장편영화의 성공은 두 번째 작품 <튼튼이의 모험>으로 이어졌다. 이번에도 배우들은 그대로. 제작비는 무려 열 배 가까이 늘었다. 제작비가 넘치다 못해 돈이 남아 시사회 때 피자 파티까지 열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이전 작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2천만원. 할 수 없이 고봉수 감독의 삼촌 고성완 씨까지 코치 역할로 투입됐다. 7211 버스를 운행하는 삼촌이 연차를 길게 낼 수 없는 관계로 촬영은 10일 안에 끝마쳐야 했다. 그 외의 배우는 모두 함평 주민들로 채워졌다. 하필 공사 중이었던 함평중학교 체육관은 공사 중인 채로 그대로 영화에 담겼다. 덕분에 존폐 위기에 처한 레슬링부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으니 운도 어느 정도 따랐다고 해야 하나.

행운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전주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이후 코리아 시네마스케이프상과 대명컬쳐웨이브상을 수상하며 무주산골영화제, 정동진독립영화제,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에 줄줄이 초청되었다. 바다를 건너기까지 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열리는 마르델플라타국제영화제는 물론 런던아시아영화제에서는 심사위원특별상까지 받았다. 런던아시아영화제의 헬렌 드 윗 심사위원장은 “신진 감독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사회적 현실을 잘 표현한 영화”라며 “켄 로치 감독을 연상시킬 만한 연출의 힘이 느껴진다”는 칭찬까지 했다.

<튼튼이의 모험> 예고편

<델타보이즈>에서 사중창 대회에 나가겠다고 모인 오합지졸의 네 남자들과 <튼튼이의 모험>에서 대회에 나가 1승도 거둬본 적 없지만 레슬링에 대한 열정만은 세계 1위인 대풍고 레슬링부 부원들은 모두 다름 아닌 고봉수 감독과 배우들이다. 영화를 찍고 싶은 마음 하나로 제작비의 한계 따위 가뿐히 뛰어넘는 고봉수 감독과 고봉수 사단 배우들의 이야기가 그저 사중창으로, 레슬링으로 겉옷만 갈아입었을 뿐이다. 이들을 보다 보면 적은 제작비가 반드시 영화의 한계인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어쩌면 부족한 제작비마저도 영화 형식의, 메시지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고봉수 감독과 고봉수 사단의 배우들

마침 자신의 영화에 출연할 뛰어난 연기력의 배우가 필요했던 무명의 감독과 뛰어난 연기력을 가졌음에도 오디션에서 번번이 떨어져 출연할 영화가 필요했던 무명의 배우들.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 이들은 <튼튼이의 모험>까지 벌써 네 번째 영화를 함께 했다. 제작비가 필요하면 십시일반 돈을 모아가면서 영화를 찍었다. 사실 고봉수 감독은 <튼튼이의 모험>을 기획하던 중 투자자를 만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인지도 있는 배우로 주연을 바꾸자는 요청에 과감히 투자를 거절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는 대목이다. 그렇게 완성된 <튼튼이의 모험>에서 이들이 보여주는 기가 막힌 합을 보면 더욱더 그렇다. 고봉수 감독의 다음 영화는 무려 상업 영화. 고봉수 감독은 다음 영화도 역시 이들과 함께 갈 것이라고 말한다. 확실히 중요한 건 제작비가 아닌 것 같다.

 

영화는 돈으로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어떤 영화는 간절함만으로 만들어진다. 돈만 있으면 다 될 것 같은 이 세상. 영화가 이렇게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Writer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카피 쓴다는 핑계로 각종 드라마, 영화, 책에 마음을, 시간을 더 쓰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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