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성적이거나 소극적인 사람들, 은둔형 인간, 내면 감정의 함몰자들은 종종, 본인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비주류의 위치에 놓인다. 누군가의 눈엔 사회부적응자거나, 외톨이, 루저처럼 보이는 인물들을 주인공 삼아, 그들 내면의 우울을 그러안는 영화들이 있다. 소외된, 변두리를 서성이는, 아웃사이더를 자처한 당신께 바치는, 영화 넷.

영화 <녹색 광선>, <파니 핑크>, <월플라워>, <잉글랜드 이즈 마인>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녹색 광선>

The Green Ray ㅣ1986ㅣ감독 에릭 로메르ㅣ출연 마리 리비에르, 아미라 셰마키, 실비 리셰즈

한여름의 프랑스. ‘델핀’(마리 리비에르)은 기나긴 여름 휴가를 혼자 보내야 할 외로운 처지에 놓인다. 남자친구와는 소원한 데다, 겨우 친구들을 따라간 휴가지에서조차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 탓에 그곳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불편함을 느낀다. 에릭 로메르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녹색 광선>은 쥘 베른의 로맨틱한 모험 소설 <녹색 광선>(1982)을 모티프로 만든 영화다. 에릭 로메르는 항상 거의 아마추어에 가까운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해 가장 보통의 존재들의 삶을 잔잔하게 그려냈고, 이 영화도 그러한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델핀이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외향적이고, 관계 맺기에 스스럼이 없으며, 북적이는 여행을 즐긴다. 그 속에서 감수성이 예민하고 늘 자기 내면의 감정으로 파고드는 델핀은 친구들 사이에서도 여간 답답하고 까다로운 인물로 여겨진다.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붕 떠 있는 델핀을 향해 사람들은 “네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는 식으로 첨언하지만 어느 무리를 가도 자신의 생각을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이야말로 그를 가장 외롭게 만든다.

그래서 델핀은 툭하면 무리에서 빠져나와 혼자 울음을 터뜨린다. 그러면서 내내 누군가 자기 삶에 흘러들어와 자신을 구원해주기를 기다린다. 그래서 자신의 삶의 결이 바뀌기를 소망한다. 이러한 델핀의 태도는 삶을 포기한 무기력함보다는, 자기의 신념을 꺾지 않고 이해하고 존중해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끈기와 확신에 가깝다.

녹색 광선은 태양이 뜨거나 지기 직전에, 태양 주변에 드물게 나타나는 녹색의 띠를 뜻한다. 이는 영화 속에서도, 소설 속에서도 녹색 광선을 본 사람은 상대의 진심이 보이는 마법 같은 힘을 얻게 되는 찰나의 순간으로 묘사된다

지쳐 모든 걸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기차역에서 델핀은 뜻밖의 인연과 조우한다.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를 읽고 있던 델핀에게 한 청년이 말을 걸어온다. 몇 마디 대화로 통하는 감정을 느낀 두 사람은 해변의 나즈막한 언덕으로 가서 서로 어깨를 맞대고 해가 지는 광경을 지켜본다. 그리고 마침내 빛의 굴절로 인해 일시적인 녹색 광선이 이들 눈앞에 나타난다. 내내 음울하고 불행했으며, 외로웠던 델핀의 표정이 환희로 가득 차는 순간을 클로즈업하며 엔딩크레딧이 오른다. 영화는 그렇게 판타지 같은 희망 하나를 관객 앞에 놓아두고 간다.

 

<파니 핑크>

Nobody Loves Meㅣ1994ㅣ감독 도리스 도리ㅣ출연 마리아 슈라더, 피에르 사노우시-블리스, 마이클 본 아우

“못하겠어요. 저 자신을 이렇게 팔 순 없어요.” 결혼정보업체에 제공할 영상촬영을 위해 캠코더 앞에 앉은 주인공의 체념 섞인 독백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파니 핑크’(마리아 슈라더)는 자의식이 강한 29세 여성이다. 직장, 집, 차 필요한 모든 것을 갖췄지만, 정작 일상을 공유할 동반자가 그에겐 없다.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며 명상을 하고, 죽음의 과정을 연습하는 강좌를 들으며 소신 있는 삶을 꾸리려 애쓰지만, 곧 서른을 눈앞에 둔 그에겐 공허할 뿐이다. 더 늦기 전에 남자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에게 운명의 남자를 예언해 줄, 심령술에 정통한 신비의 존재 ‘오르페오’(피에르 사노우시-블리스)가 나타난다.

엘리베이터에 함께 있는 파니와 오르페오

영화에서 그 누구보다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캐릭터로 그려지는 오르페오는 가난한 흑인이며, 동성애자다. 독일 사회 속에 철저한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 이 인물과 주인공이 나누는 아름다운 우정과 연대는 이 영화의 핵심이다. 새로울 것 없는 무미건조한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를 고대하는 파니는 오르페오라는 인물을 만나며 자신을 사랑하는 법과 남을 위해 희생하는 숭고한 정신을 배운다. 이 과정에서 그는 무모하리만큼 사랑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추한 자기 모습에 감정이 나락까지 추락하는 경험마저 한다. 이때, 그가 집착하는 사랑은 딱히 남녀 간의 사랑이라기보다, 정체성과 자존감을 회복하려는 한 인간의 발악에 가깝다. 하여 이 영화의 진정한 묘미는 주인공의 ‘사랑 찾기’라는 뻔한 내러티브에 갇히지 않고,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고독, 나아가 사회로부터 소외받은 인물 모두를 끌어안으려는 어여쁜 지점에 있다.

 

<월플라워>

The Perks of Being a Wallflowerㅣ2012ㅣ감독 스티븐 크보스키ㅣ출연 엠마 왓슨, 로건 레먼, 에즈라 밀러

<월플라워>는 주인공의 아웃사이더적인 기질을 묘사하기보다, 인생의 소중한 친구들을 만나면서 변화해가는 모습에 보다 방점을 둔다. 파티에서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아 벽에 기대서 있기만 하는 사람을 뜻하는 단어 월플라워(Wallflower)처럼, 절친한 친구의 죽음으로 외톨이가 된 ‘찰리’(로건 레먼)의 고교 생활 또한 시련의 연속이다. 그러던 어느 날, 찰리는 우연히 풋볼 경기장에서 같은 학교의 상급생 ‘패트릭’(에즈라 밀러)과 ‘샘’(엠마 왓슨)을 만난다. 음악과 파티를 사랑하며 멋진 취향을 가진 이 이복남매를 통해 찰리는 세상을 향해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하이틴 청춘물의 궤 안에 놓인 <월플라워>는 여느 성장영화들이 그렇듯 청춘의 싱그러움과 풋풋함을 담아내면서도, 소위 아웃사이더라고 불리는, 주류에서 밀려난 아이들의 성장담을 섬세하게 그린다. 자신조차 모르는 트라우마의 근원을 대면하는 과정에서 찰리는 몇 번이고 삶이 무너져 내리는 끔찍한 고통을 겪는다. 그럼에도 ‘행운스럽게도’ 찰리는 자신을 옭아매는 트라우마의 원인을 똑바로 인지할 수 있게 되고, 이로 인해 상처의 치유를 조금 경험한다. 진부하고 무책임한 해결책으로 들릴 수 있지만, 결국 타인과의 진정한 소통에서 오는 기쁨이나 무리 속에서 느끼는 끈끈한 소속감 같은 것들이 찰리를 내면의 고독으로부터 구해준다. 인생의 멋진 친구들을 만나는 주인공의 행운은 누구에게나 오는 게 아니지 싶다가도, 자꾸 믿고 싶게 만드는 매력적인 힘의 영화.

 

<잉글랜드 이즈 마인>

England Is Mineㅣ2017ㅣ감독 마크 길ㅣ출연 잭 로던, 제시카 브라운 핀들레이, 애덤 로렌스, 로리 키나스턴

더 스미스(The Smiths)는 1982년부터 1987년까지 활동한 영국 맨체스터 출신의 밴드다. 더 스미스의 곡들은 삶의 아이러니를 명료한 선율과 문학적인 가사로 표현해 인기를 끌었고, 그 중심에는 팀의 보컬이자 작사를 맡은 모리세이가 있었다. <잉글랜드 이즈 마인>은 밴드의 탄생 스토리와 모리세이의 청년 시절을 그린 영화라지만, 뮤지션 전기 영화에서 의례적으로 보아왔던 서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오로지 모리세이가 자신의 방에서 나와 세상의 문을 두드리기까지 망설이고 고민했던 순간들에 집중하며 러닝타임 전체를 할애한다. 진짜 밴드의 탄생 비화나 초라했던 주인공이 슈퍼스타가 되어 화려한 무대에 오르는 드라마틱한 장면들을 기대했다면 아쉬울 법한 전개다.

이 영화가 진짜 드러내고자 하는 건, 반짝이는 재능이 있음에도 지극히 내성적인 성격과 부족한 사회성 때문에 눈앞에서 기회를 놓쳐버리는 이들을 향한 용기의 메시지다. 영화가 그리는 ‘모리세이’(잭 로던)는 제대로 된 직업을 얻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겨우 취직한 세무서에서도 외톨이로 지내거나, 근무 태만으로 쫓겨나는 등 무리에 통 섞이지 못하는 인물이다. 대신 좋아하는 책과 레코드와 타자기가 있는 방에서 안전감을 느끼며 내면으로 끝없이 침잠해 들어가는 인물이다. 세상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고사하고, 누군가 자신의 문을 두드리는 것조차 두려워 벌벌 떤다. 밴드 멤버를 모집해놓고 막상 지원자가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달아나버리는 장면은 그의 지독할 만큼 소심한 성격에 대한 적확한 묘사다.

이렇듯 재능과 꿈이 있음에도 타인과의 관계 맺기를 어려워하고, 발걸음을 내딛기 두려워 망설임과 갈등을 반복하던 그는 몇 번의 엎어짐과 몇 년간의 은둔생활을 거쳐 껍질을 깨고 나오는 용기를 낸다. 그 곁에 여러 조력자가 있었지만, 결국 움직임을 ‘선택’한 것은 그 자신이었다. 그가 결단의 용기를 내기까지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잉글랜드 이즈 마인>은 우울하고 소심한 성향을 지닌 자들이 껍질을 깨고 나오기까지 얼마나 지독한 자괴감과 고통의 시간들을 감내해야 하는지 충분히 설명하고 공감하며 위로한다. 나아가, 모리세이가 자신의 방식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왔듯, 우리들도 그런 용기를 내어 보도록 다독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