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낳고서야 알았다. 그동안 나는 속았다는 걸. 드라마나 영화 속 산모들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아기를 낳았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마치 성대한 결혼식과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고 퉁쳐버린 동화 속 왕자님, 공주님들처럼.
혼란스러웠다. 아기를 낳는 고통보다 아기를 키우는 고통이 더 크다니. 아기만 낳으면 몸 안에서 모성애라는 것이 보글보글 끓어오를 줄 알았건만 출산과 함께 주어지는 건 모성애라는 마법이 아닌 망가진 몸뚱이뿐이었다. 요기 베라가 맞았다. 야구뿐만 아니라 육아도, 인생도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본게임은 출산 후부터 시작됐다.

넷플릭스 드라마 <렛다운> 스틸컷

한편으로 궁금했다.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걸까? 출산과 육아의 현실을 알아버리면 출산율이 현저히 떨어질 걸 우려한 전세계적인 음모인가. 아마 음모까지는 아니어도, 오랜 세월 그만큼 여성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생명은 소중하지만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여성이 겪어야 할 그 모든 일들을 모성애 하나로 덮어버리는 게 편했을 테니까.
그래서 찾아봤다. 나만 이렇게 힘든 걸까. 나만 엄마가 되기에 부족한 걸까. 외로운 섬처럼 각자의 집에 갇혀서 우는 아기를 안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있을 엄마들을 대신해서. 그리고 놀랍게도 세계 곳곳에서 “나도 그렇다”는 대답을 들려줬다. 프랑스의 바바라부터 호주의 오드리까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몰랐던 현실 육아의 세계를 다룬 작품들을 소개한다. 각기 다른 곳에서 제각기 전혀 다른 삶을 살지만 아기를 낳고 키우는 것만큼은 비슷하다는 사실을, 모두가 외롭고 모두가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아마 묘하게 위안이 될 것이다.

 

<해피 이벤트>

Un heureux evenement |2011|감독 레미 베잔송 |출연 루이즈 보르고앙, 피오 마르마이|프랑스

“내 삶은 더이상 내 것이 아니다. 그냥 텅 빈 아무것도 아닌. 그때부터 난 그냥 엄마였다.”
“완벽한 엄마가 될 순 없어. 그냥 엄마가 돼.”

철학을 전공 중인 지적이고 이성적인 여성 ‘바바라’(루이즈 보르고앙). 그저 한 남자를 사랑하고, 그 남자와 아이를 가지고 싶었을 뿐인데 예상치 못한 임신, 출산, 육아의 후유증에 시달린다. 독박육아에 지쳐가는 바바라와 그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남편, 골동품에 가까운 유축기를 가져다주며 바바라의 육아에 참견을 해대는 시어머니, 거기에 아기를 키우느라 끝내지 못한 박사 논문 때문에 경력이 단절될 위기까지. 마치 엊그제 친구에게 들었던 이야기 같은데 배경이 프랑스란다. 프랑스 엄마처럼 육아하라는 책까지 서점에 진열된 마당에 이 무슨 환상을 짓밟는 이야기인가. 프랑스 엄마들은 프렌치시크 스타일로 육아 따위 손쉽게 해내는 줄 알았는데 프랑스도 출산이, 육아가 쉽지 않단다. 다행이라 해야 하나 서글프다 해야 하나.

영화의 원작은 엘리베트 아베카시스가 쓴 <행복한 사건>. 출산에 대한 철학적인 성찰이 담겨있던 원작을 넘어 영화는 바바라가 임신과 출산, 육아를 통해 겪게 되는 심리의 변화와 관계의 변화를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돌아눕는 것조차 쉽지 않은 만삭의 몸을 뒤집힌 거북이 같다고 표현하는 것이나 아기 때문에 외출도 못 하고 집안에 갇혀서 외로워하는 모습 같은 것들은 아기를 낳아보지 않고는 알 수 없을 정도로 디테일하다. 그리고 그런 디테일함 덕분에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는 바바라가 되어버린다. 바바라의 몸이, 바바라의 마음이 되어버린다.

영화 <해피 이벤트> 예고편

그런데 놀라운 건 이 영화를 만든 감독도, 바바라를 연기한 배우도 모두 출산과 육아의 경험이 없다는 것. 이 영화를 만든 레미 베잔송 감독은 심지어 남자다. 결혼을 한 적도, 아기를 낳아본 적도 없다. 그럼에도 이토록 디테일하게 묘사해내다니.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현실성을 살리기 위해 조사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여성들이 많은 게시판을 들락거리며 여자인 척까지 해가면서.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 희망이 생긴다. 출산과 육아라는 여성만의 경험이 직접 겪어보지 않은 남성에게도 와닿을 수 있다는 희망. 제대로 알기만 한다면, 제대로 알려고만 한다면 아마도 이해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아기를 낳아본 사람이라면 바바라와 자신이 하나 되는 물아일체의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아기를 낳아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바바라를 통해 간접체험해 볼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양쪽 모두에게 꼭 한 번쯤 봐야 할 영화라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다.

 

<렛다운>

The Letdown|2017|감독 트렌트 오도넬 |출연 앨리슨 벨, 던컨 펠로우|넷플릭스 드라마|호주

“이건 실직상태가 아니라 육아휴직이야. 돈도 못 받고 초과근무에 과소평가나 받지”
“아기가 울면 꼭 안아주잖아요. 무슨 이유로 울 건 간에 아기를 이해하려 하고 또 안심시키려고 노력하죠. 스스로나 다른 이에게도 똑같이 한다고 생각해봐요. 우린 그냥 다 큰 아기들일 뿐이에요.”

아기처럼 잔다는 말은 그동안 사람들을 속여왔다. 아기는 자지 않는다. 아니, 아기는 잘 줄 모른다. 그래서 부모가 되면 아기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는 것은 물론, 재우기까지 해야 한다. 아기가 잠들 때까지 안고 둥가둥가를 해주거나 목이 쉬도록 ‘쉬쉬’ 소리를 속삭여주거나 차에 태우고 드라이브라도 해야 한다. 부모가 되면 우는 아기를 품에 안고 밤을 새우다가 문득 깨닫게 된다. 잠을 못 자게 하는 것이 왜 고문의 한 종류인지. 그래서 영화 <렛다운>도 아기를 재우기 위해 한밤중에 공원에 차를 대놓고 졸고 있는 ‘오드리’(앨리슨 벨)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아마 오드리도 몰랐을 것이다. 아기를 얻는 대신 자신의 꿀 같은 잠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사실을.
제목인 ‘렛다운(Letdown)’은 모유 수유를 할 때 경험하게 되는 ‘사출반사’를 뜻한다. 옆에서 아기가 울기만 해도, 심지어 아기를 생각하기만 해도 찌릿찌릿 젖이 도는 그 느낌. 모성의 본능을 보여주는 현상이 바로 ‘사출반사(letdown)’이다. 한편으로 렛다운(letdown)은 실망감이란 뜻도 있다. ‘사출반사’와 ‘실망감’이라. 이 두 가지만큼 오드리의 상황을 잘 표현할 수가 없다. 아니, 이보다 더 초보 엄마들의 마음을 잘 표현할 수가 없다. 이유도 알 수 없이 울어대는 아기에게 실망하고, 모성 신화를 강요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무엇보다 엄마 노릇조차 잘 해내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엄마가 된다는 것은 잘 실망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상영 중인 호주 드라마 <렛다운> 중 장면

<렛다운>은 초보 엄마 오드리가 2개월 된 아기를 키우며 좌충우돌하는 내용이 전부다. 그 이상의 내용은 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재미는 충분하다. 그래서 <렛다운>을 보다 보면 의아해진다. ‘육아’하는 이야기만으로 이렇게 재미있고 뭉클할 수 있는데 왜 아무도 그동안 이 좋은 소재를 시트콤에 써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걸까. 육아만큼 국경을 초월해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소재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수면 교육에 실패해 좌절한다거나 시부모님의 방문에 난처해한다거나 우연히 옛 직장 동료를 만난 후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에 우울해한다거나 출산 후 건망증, 요실금, 치질에 시달린다거나 하는 일련의 에피소드들을 보고 있노라면 확신을 하게 된다. 경험하지 않고는 절대 쓸 수 없는 이야기라는 걸. 아니나 다를까. <렛다운>의 작가는 사라 쉘러(Sarah Scheller)와 앨리슨 벨(Alison Bell). 두 명의 여성이다. 심지어 앨리슨 벨은 오드리 역할을 한 배우. 이 모든 사실을 알고 나니 오드리의 연기가 왜 그토록 자연스러웠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두 작가는 인터뷰에서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영감을 얻었고, 다른 엄마들을 만나면서 그 영감이 구체화되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사실, <렛다운>은 2016년 호주방송공사(이하 ABC)가 선보였던 코메디 쇼룸(Comedy Showroom)의 에피소드 중 하나였다. ‘코메디 쇼룸’은 6가지 서로 다른 파일럿 에피소드를 ABC의 iView에 업로드해놓고 어떤 것을 풀시리즈로 제작할지 시청자들로부터 투표를 받는 일종의 시트콤 서바이벌 프로젝트. 당시 <렛다운>은 1위가 아니었다. 하지만 <렛다운>의 가능성을 본 넷플릭스는 ABC와 함께 손잡고 풀 시리즈를 제작하게 된다. 덕분에 호주에서 8천km 떨어져 있는 한국의 엄마까지 공감 가는 드라마가 탄생했다니 넷플릭스에게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싶은 심정이다.

넷플릭스 <렛다운> 바로가기 

 

<툴리>

Tully |2018|감독 제이슨 라이트맨 |출연 샤를리즈 테론, 맥켄지 데이비스|미국

“I’m here to take care of you. Yeah, you pretty much are the baby.”

‘마를로’(샤를리즈 테론)는 세 아이의 엄마다. 아이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힘든지 앞선 두 편에서 지켜보았는데 무려 아이가 셋이라니! 게다가 둘째 아들 조나는 이상 행동으로 학교에서 쫓겨날 위기에 놓여있고 셋째 아이는 사실 가족계획에도 없었다. 회사 일에 바쁘기만 한 남편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락없는 독박육아 신세. 세 아이를 돌보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그. 정작 그런 그의 몸뚱이 하나 돌봐줄 사람은 없다. 보다 못한 마를로의 오빠는 그에게 ‘나이트 내니’인 ‘툴리’(맥켄지 데이비스)를 추천한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디아블로 코디는 한 인터뷰에서 사실 이 영화는 자신의 경험에서 출발했다고 말한다. 아기를 돌보느라 지친 자신을 돌봐줄 누군가가 절실했고, 그 누군가가 어떤 누군가라면 좋을까를 고민하다 그게 영화로까지 이어졌다고 말이다. 그렇게 저녁이면 출근해 밤새 아기와 마를로를 돌봐주고는 아침이면 퇴근하는 동화 속 요정 같은 존재. 나이트 내니 ‘툴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영화 속 마를로와 툴리 사이의 묘한 유대 관계도 인상적이지만, 이 영화에서 더 인상적인 것은 따로 있다. 바로, 마를로가 셋째 아이를 낳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 초반 일련의 장면들. 사실 그간 우리는 아기를 낳은 직후 산모의 모습이 어떤지 잘 몰랐다. 출산 후 거대한 기저귀를 차야 한다는 것도, 소변을 누는 것조차 힘들다는 것도, 세 시간에 한 번씩 젖소처럼 유축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아무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출산이라는 이벤트에서 그 주인공은 늘 아기였으니까. 카메라의 포커스는 언제나 아기를 향해 있었다. 하지만 영화 <툴리>는 카메라를 돌려 마를로를 비춘다. 무서우리만치 적나라하게. 거기에 이 영화를 위해 22키로나 찌운 샤를리즈 테론의 연기까지 더해진다. 샤를리즈 테론의 미모에도 불구하고 마를로에게 감정이입을 하지 않기란 불가능해진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아직 국내 개봉이 잡혀 있지 않다는 것. 언제쯤 우리나라 영화관에서 만날 수 있을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주노>(2007)와 <인디에어>(2009)의 감독 제이슨 라이트맨에 배우 샤를리즈 테론까지 합세했으니 조만간 볼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걸어본다. 혹시 수입배급사에 다니는 분이 이 기사를 볼지도 모르니, 이 영화가 지난 5월 미국에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는 사실과 2018년 선댄스 영화제에서도 호평을 받았다는 사실도 굳이 덧붙여본다.

영화 <툴리> 예고편

 

<아기들>

Babies |2010|감독 토마스 발메스 |출연 마리, 바야르, 하티, 포니자오|프랑스

현실 육아를 보여주는 방법이 꼭 엄마들의 지친 얼굴을 비추는 것만 있는 건 아니다. 어쩌면 육아에서 가장 힘든 건 아이들일지도 모른다. 모든 걸 알아서 해주던 자궁에서 나와 스스로 숨을 쉬고 스스로 소화를 해야 하는 이 낯선 지구에서의 생활이 아기들에겐 얼마나 어렵겠는가. 일 년 새 몸집을 세 배 이상 늘려야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터. 다큐멘터리 감독 토마스 발메스는 그래서 일본, 미국, 나미비아, 몽골 각 나라의 아기들의 일 년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 제목은 심플하게 <아기들(Babies)>. 태어나 일 년, 안고 서고 걷고 하며 자라나는 각 도시의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모든 힘겨움을 견디면서도 사람들이 아기를 키우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인간의 가장 순수한 형태를 본다는 감동. 기억하지 못하는 내 어린 시절을 복기하는 즐거움. 고통과 행복을 동시에 끌어올리는 게 육아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것이다. 줄거리도 내레이션도 없이 그저 네 명의 아기들이 울고 웃고 장난치는 모습만 보여주는데도 그렇다.

다큐멘터리 <Babies> 예고편

 

출산은 힘들다. 육아는 고되다. 출산과 육아는 한 여성의 몸을,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일이다.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덮어둘 것이 아니다. 엄마이기에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당연한 걸 당연하게 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을 뿐. <해피 이벤트>는, <렛다운>은, <툴리>는, <아기들(Babies)>은 그 사실을 보여주며 세상의 모든 엄마들을 안고 토닥여준다. 참 다행이다. 이런 작품들이 있어서.

 

Writer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카피 쓴다는 핑계로 각종 드라마, 영화, 책에 마음을, 시간을 더 쓰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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