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용 감독의 영화 세계는 ‘엄혹한 현실’, ‘잔인한 성장’이라는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키워드란 말은 남기되 ‘요약’이란 단순명료한 단어는 거둬들인다. 내내 스크린 가득 클로즈업 되는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때로는 공감하고 때로는 거리를 두게 하는 다층적이고 뒤엉킨 내면을 드러내고야 마니까. 김태용 감독의 장편과 단편을 들여다본다.
<여교사>
MISBEHAVIORㅣ2015ㅣ출연 김하늘, 유인영, 이원근, 이희준
‘로코퀸’ 김하늘이 이제껏 보여준 적 없던 과감한 연기 변신을 선보인다는 소식에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되었던 작품. 그런데 그 변신, ‘노출 감행’ 류의 것은 아니다. 김하늘은 이 영화를 통해 공식 이미지와도 같았던 사랑스러움을 소거하고, 끝에 몰린 한 인간의 불안과 절박, 광기를 선명하고 섬세하게 연기해낸다. <여교사>는 남고생과 여교사 간의 ‘치정’, ‘파격’ 같은 자극적인 단어에 몰두하는 영화는 아니다. 대신 비정규직 교사로 살아가는 인물 ‘효주’(김하늘)가 모든 걸 다 가진 동료 ‘혜영’(유인영)을 만난 후 겪는 질투와 열등감, 불안과 의심을 집요하게 끄집어낸다. 한 사람을 망가뜨리게 하는 건 다른 사람이 아니라 타인으로 상징되는 시스템일 수도 있다는 성찰, 보는 이를 이야기 속으로 빨아들이는 치밀한 서스펜스가 동시에 담긴 수작.
<거인>
Set Me Freeㅣ2014ㅣ출연 최우식, 김수현, 강신철, 신재하
영화 <거인>이 더욱 화제가 된 건 김태용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집안 사정, 무책임한 아버지, 그룹홈에서 생활해야 했던 사연 등을 가감없이 <거인>에 담은 그는 이 영화가 자신의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 작품은 배우 최우식에게도 중요한 작품이다. 아이돌 같은 외모로 그간 <옥탑방 왕세자>, <은밀하게 위대하게> 등에서 익살스럽고 유쾌한 캐릭터를 주로 연기해온 그는 <거인>에서 가슴에 늘 분노를 품고 사는 ‘영재’를 연기하며 감정의 파고가 높은 드라마까지 훌륭하게 소화해낼 수 있음을 증명했다. 김태용 감독은 배우들에게 특히 관심이 많고 애정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캐릭터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배우의 인생에 대해 주의 깊게 대화를 나눈다고 하는데, 배우 최우식의 예민하고 불안한 표정 역시 감독과 배우 사이 오랜 대화를 통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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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곤증>
Spring Feverㅣ2013ㅣ출연 윤박, 김수아, 임지연
2013년 제39회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작 <서울연애>는 서독제가 주목한 젊은 감독들과 배우들이 ‘서울’을 주제로 만든 단편을 모은 옴니버스 영화다. 김태용 감독은 <춘곤증>이란 작품으로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신예 윤박과 김수아가 주인공을 맡았고, 용산 전자상가를 배경으로 욕정과 욕망을 다루었다. 속내를 알 수 없어 차가워 보이는 연상의 여자, 넘치는 생기만큼 겉은 가벼워 보이지만 진심을 품은 연하의 남자가 서울의 전자상가와 모텔, 아파트를 오가며 주고받는 러브신은 밀도 높은 섹시함과 서글픈 여운을 동시에 남겨, 이 도시에 대한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얼어붙은 땅>
Frozen Land ㅣ 2010 ㅣ 출연 박찬진, 윤종훈, 이미라, 윤승훈
김태용 감독이 스물다섯 살,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시절 만든 단편으로, 그해 대학생영화제 대상, 전주국제영화제 한국 단편 경쟁부문 대상, 칸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 부문 초청작으로 선정되며 국내 영화계의 ‘앙팡 테리블’로 김태용 감독을 각인시킨 작품이다. <얼어붙은 땅>은 중국인 밀입국자와 한국인 브로커들의 비참한 현실을 형상화한 작품. 앞서 소개한 김태용 감독의 이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소년들이 주인공이다.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밀입국자들의 운반책으로 살아가는 두 소년이 문득 타인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며 생겨나는 사건을 그렸다. 척박한 현실과 타인에 대한 연민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에 대한 관심의 시작을 볼 수 있는 영화.
(메인이미지 출처- <여교사>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