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롯 램플링(Charlotte Rampling)에게 제74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작품, <한나>는 그가 없었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영화는 남편이 수감된 후 홀로 남겨진 중년의 여성 ‘한나’가 맞는 일상을 그린다. 무엇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럽고 위태로운 나날 속에서도 한나는 자신의 인생을 매만지려 노력한다.

<한나> 예고편

<한나>는 우리에게 익숙한 일반적인 서사 구조를 깬 작품이다. 대신 보는 이가 당황할 만큼 넓은 여백을 비워두는데, 이 여백은 관객이 직접 주인공과 호흡하며 그의 삶을 상상하게 만든다. 채우기보다는 비우기를 택한 이 영화에서 배우의 역할은 거의 독보적으로 중요할 수밖에 없다. 주인공 한나로 분한 샬롯 램플링은 차분히 존재감을 드러내며 내면의 처절함과 고통을 정교하게 표현한다. 안드레아 팔라오로 감독은 시나리오 작업에 돌입할 때부터 샬롯 램플링만을 염두에 두었다고 하는데, 그래선지 샬롯 램플링의 서늘하지만 쓸쓸한 눈빛은 완벽히 한나의 그것이다.

일흔을 넘긴 배우는 이 영화를 통해 제 커리어에 마침표를 찍을 때가 한참 멀었음을 다시 한번 증명해냈다. 새삼스레 그의 다른 얼굴을 떠올려본다. 샬롯 램플링이 출연한 인상적인 영화 몇 편을 소개한다. (그는 80편 이상의 작품에 출연했고, 이 기사에서는 2000년 이후 개봉작 중에 3편을 추려 소개한다.)

 

 

<45년 후>

45 Yearsㅣ2015ㅣ감독 엔드류 헤이ㅣ출연 샬롯 램플링, 톰 커트니, 돌리 웰스

‘케이트’(샬롯 램플링)와 ‘제프’(톰 커트니)는 결혼 45주년을 맞아 기념 파티 준비에 여념이 없다. 서로 의지하며 사이좋게 살아온 부부에게 오래전 사고로 실종된 남편 첫사랑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남편은 복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온종일 과거를 추억하고, 그를 바라보는 케이트는 불안에 빠진다.

케이트를 연기한 샬롯 램플링은 존재하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에 대한 질투에서부터, 그 질투가 얼마나 실체 없는 건지 깨달은 후의 부끄러움과 당혹스러움까지 제 것인 양 표현해낸다. 높다란 감정의 진폭마저 우아하게 그려내는 이 연기에서, 샬롯 램플링이 인간의 수많은 감정에 대해 깊게 고민하는 배우임을 절감할 수 있다. <45년 후>는 그의 연기 인생에 또 다른 전환점이 됐다. 덧붙여 이 작품을 통해 주연 배우 두 사람은 베를린영화제의 여우주연상과 남우주연상을 나란히 거머쥔다.

 

 

<사랑의 추억>

Sous Le Sable, Under The Sandㅣ2000ㅣ감독 프랑수아 오종ㅣ출연 샬롯 램플링, 브루노 크레머, 자크 놀로

‘마리’(샬롯 램플링)와 ‘장’(브루노 크레머)은 해변으로 휴가를 떠난다. 여유를 즐기던 두 사람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 닥친다. 수영하러 다녀오겠다던 장이 사라진 것. 홀로 일상으로 돌아온 마리는 장이 여전히 자신과 함께하고 있다고 믿으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영화는 삶의 큰 부분을 잃어버린 한 여성의 삶을 따라간다. 그러므로 침잠된 슬픔과 가려진 욕망을 섬세하게 표현해낼 사람이 필요했고, 샬롯 램플링은 이에 꼭 맞는 배우였다. 특히 남편을 잃은 마리를 연기하기 위해 그는 개인적인 아픈 기억마저 다시 떠올렸다. 스무 살 때 가족을 잃었던 샬롯 램플링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살려 깊은 상실감을 체화해냈다. 이 때문인지 <사랑의 추억> 속 그의 연기는 쉬이 잊히지 않고, 한 프레임도 허투루 넘기기가 어렵다. 한편 이 영화는 샬롯 램플링과 프랑수아 오종이 계속 함께 작업하는 발판이 된다.

 

 

<스위밍 풀>

Swimming Poolㅣ2003ㅣ감독 프랑수아 오종ㅣ출연 샬롯 램플링, 루디빈 사니에, 찰스 댄스

성공한 미스터리 작가 ‘사라’(샬롯 램플링)는 차기작 준비를 위해 편집장의 별장에 머물게 된다. 글쓰기에 집중하던 사라 앞에 갑자기 ‘줄리’(루디빈 사니에)가 나타나고, 그는 사라의 존재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시간을 만끽한다. 어느 날 줄리는 사라가 호감을 느꼈던 카페 종업원 ‘프랭크’(장 마리 라모르)를 유혹하는데, 그 후 프랭크의 행방이 묘연해진다.

이 영화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샬롯 램플링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작품이다. 샬롯 램플링은 이 영화에서 분방하고 자유로운 삶에 대한 동경과 질투, 억압된 욕구로 인한 편집증적인 강박을 제대로 보여준다. 그는 순식간에 돌변하는 감정과 욕망에 따라 눈빛과 숨소리마저 바꾸며, 이러한 연기는 관객까지 숨죽이게 한다. 시크하고 우아하지만 속을 알 수 없으며 내면엔 불을 감춘 사람, 샬롯 램플링이 <스위밍 풀>로 구축해낸 이미지다.

 

Editor

김유영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