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영화감독인 차이밍량의 영화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말을 거의 하지 않는 인물, 배경이 아니라 캐릭터처럼 느껴지는 공간, 롱테이크 촬영, 그리고 차이밍량 감독의 페르소나인 배우 이강생. 또 하나의 특징은 물이다. 비 오는 도시, 물이 새는 집, 욕조 안에 들어가 있는 인물 등 물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차이밍량 작품 속 인물들은 대부분 외롭고, 그들의 마음은 바깥 날씨와 상관없이 늘 우기로 보인다. 물처럼 자연스럽게 세상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지만, 물이기에 결코 잡히지 않는 인물들. 그들을 보고 있으면 인간이란 결국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이른다. 대만의 풍경보다 외로운 마음을 지켜보는 시간이 더 길어지는 차이밍량의 영화를 살펴보자. 

 

<애정만세>

愛情萬歲, Vive L'Amour|1994

80년대 부동산 투자가 활발했던 대만은 당시 빈 아파트나 사무실이 많았다. 부동산 중개업자인 여자 ‘메이’(양귀매)와 묫자리를 팔러 다니는 남자 ‘샤오강’(이강생), 일보다는 거리를 떠도는 시간이 더 긴 남자 ‘아정’(진소영), 세 사람은 빈 아파트를 중심으로 서로 스쳐 지나간다. 메이와 아정은 아파트에서 함께 밤을 보내고, 빈 아파트에서 숨바꼭질하듯 시간을 보내던 샤오강과 아정은 우연히 마주한 뒤로 친구가 된다. 그럼에도 이들이 품고 있는 외로움은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다.

집은 마음 같기도 해서, 빈 아파트가 빈 마음처럼 보인다. 메이는 부동산 중개업자로서 사람들에게 집을 소개하는데, 집을 파는 것보다 자신의 마음을 채우는 일이 더 힘들게 느껴진다. 샤오강은 빈 아파트의 욕조에서 목욕을 하고, 과일을 먹는다. 타인의 품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법에 서툴고, 늘 혼자 있을 때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메이는 아정과 몸을 섞어도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샤오강은 아정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마음을 드러내지 못한다. 다들 자신의 비어있는 마음을 채울 애정을 갈구하지만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애정을 찾을 것이기에 영화 제목처럼 말할 수밖에 없다. ‘애정만세’라고.

 

 

<구멍>

洞, The Hole|1998

21세기를 앞두고 대만의 한 도시가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격리된다. 수도공급도 끊길 예정인 도시에 비가 퍼붓고,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은 바퀴벌레처럼 엎드려 기어 다니며 밝은 빛을 피해 다닌다. 대피하지 않고 도시에 남아있는 사람 중 집이 온통 물바다가 된 여자(양귀매)와 그 위층에 사는 남자(이강생)가 있다. 여자가 부른 배관공이 누수 확인을 하다가 두 집의 바닥과 천장 사이에 구멍이 생기게 되고, 그 구멍은 두 사람이 소통하는 창구가 된다.

영화의 배경은 재난영화에 가깝지만, <구멍>에서 가장 큰 재난은 벌레처럼 변하게 하는 바이러스가 아니라 외로움이다. 일상에서 바닥이나 천장에 구멍이 뚫려서 다른 집과 내 삶을 공유하는 일은 재앙이다. 하지만 고립된 두 남녀에게 구멍은 구원에 가깝다. 외로움에 잠식당하기 직전인 서로에게 손을 뻗을 수 있는 공간이니까.
영화 중간중간에 판타지처럼 두 남녀가 뮤지컬을 하는 모습이 나온다. 차이밍량 영화에서 배우들이 웃는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은데, 신나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다. 인물의 상상 속에 펼쳐지는 화려한 뮤지컬 장면 뒤에 외로운 인물의 현실이 다음 장면으로 이어질 때 쓸쓸함은 배가 된다.

 

 

<안녕, 용문객잔>

不見不散, Good Bye, Dragon Inn|2003

폐관 전 마지막 상영을 앞둔 극장, 마지막 상영작은 호금전 감독의 <용문객잔>이다. 상영관에는 <용문객잔>에 출연했던 배우 두 명과 자신과 하루를 보낼 파트너를 찾는 남자 등 몇 안 되는 관객이 앉아있다. 다리를 저는 여자 매표원과 남자 영사기사는 폐관으로 인해 앞으로 만날 기회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애정만세>가 빈 아파트, <구멍>이 구멍 난 집을 배경으로 했다면 <안녕, 용문객잔>은 아예 극장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배우 이강생과 양귀매가 등장하지만, <안녕, 용문객잔>에서 주목할 배우는 ‘묘천’이다. 그는 호금전 감독의 <용문객잔>으로 데뷔해서 차이밍량 감독의 <안녕, 용문객잔>을 유작으로 남긴 배우다. 배우로서 영화계의 등장과 퇴장을 모두 용문객잔과 함께 한 셈이다.

<안녕, 용문객잔>에서 마지막 상영이 끝난 뒤 상영관에서 나온 <용문객잔>의 출연 배우 두 명이 마주친다. 두 사람은 “이제 아무도 이 영화를 보러 오지 않습니다”, “우릴 기억하는 사람도 없죠”라며 체념한 듯 대화한다. 배우에게 영화는 한 시절을 자신의 기억보다도 생생하게 재연하는 매체다. 두 사람의 대화와 마지막 영화 상영을 하는 극장을 보면서 사라지는 모든 것들을 생각해 본다.

 

 

<떠돌이 개>

郊遊, Stray Dogs|2013

두 남매와 그들의 아버지는 거리를 떠돌아다닌다. 빈 건물이 이들의 침실이고, 공중화장실이 이들의 샤워실이다. 남매의 아버지는 낮에 인간 광고판이 되어 거리에 서 있다. 남매는 그동안 백화점 시식코너에서 허기를 채우며 시간을 보낸다. 인간 광고판이 된 남자를 보고 있으면 광고판 내용보다 도로 한복판에 전시된 듯한 그의 외로움부터 보인다.

차이밍량의 영화는 명확하게 딱 떨어지는 서사보다 다양한 이미지를 보여주며 감정을 느끼게 하는 영화다. 차이밍량은 <떠돌이 개>를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를 만들지 않을 거라고 밝혔는데, 어떤 형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차기작은 서사보단 이미지 위주의 작업일 거다.
<떠돌이 개>에 등장하는 장면들을 보면, 보금자리 없이 떠도는 세 가족이 분명 실체가 있음에도 부유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영화 중반부에 회상 혹은 상상으로 추정되는 장면에서 화목한 가족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머무는 공간의 벽은 불에 그을린 것처럼 검다. <떠돌이 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따뜻한 보금자리를 가지는 게 가능할까. 차이밍량의 작품에서 마냥 행복한 인물을 목격하고 싶어진다.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