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최욱경(1940~1985)의 생전을 묘사한 표현은 여러 가지다. 감정과 의사 표현이 솔직하고 거침없었으며 성취욕과 승부욕도 강했다는 그에 대한 수식들은 지금 세대 여성들에게야 권장하는 미덕일 수 있지만, 1970년대 한국에서 "작은 체구”의 “연약한 몸”으로 “하루 두 갑 이상의 담배를 피우며” “거대한 캔버스” 앞에서 “고독”한 사투를 벌이는 "독신 여성"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는 천재적 기질과 엘리트 교육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했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여 김기창, 김병기, 김흥수, 장운상, 정창섭 같은 당대의 유명한 화가들에게 교육받으며 서울예고와 서울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서울대 재학 시절에는 21세의 나이로 한국미술가협회전에서 최고상을 받았고,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 입선했으며 차석으로 졸업했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 클랜브룩 미술 아카데미와 브루클린 미술관 미술학교, 스코히간 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이런 이력이 말해주듯 그는 당시 한국 미술계에서 독특한 존재였다. 45세에 맞이한 죽음마저 천재 예술가의 안타까운 요절로 회자하며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2011년 논란이 되었던 작품 <학동마을>(38*45.5cm, 1984)

그러나 2017년 현재 그에 대한 관심은 작가 생전에 쏟아지던 호기심의 크기와 비례하지 않는 것 같다. 최욱경이 독자적으로 성취한 예술 세계와 여성예술가로서의 선구적 위상도 여느 작가들에 비하면 과소평가된 느낌마저 들 정도다. 지난 2011년 작가의 이름이 오랜만에 화제에 오른 바 있는데 전, 현직 국세청장의 뇌물수수 혐의로 열린 재판장에서였다. 이후 또다시 긴 침묵 끝에 2016년 국제갤러리에서 <Wook-kyung Choi: American Years 1960s-1970s>(기획 김성원) 전이 열렸다. 작가의 미국 시절을 중심으로 한 작품을 선보인 전시였고, 다행히 작가의 카탈로그 레조네(catalogue raisonne, 전작도록)도 발간될 전망이다.

▲ <경산산>(89*177cm, 1981)
<열애>(227*394cm, 1985)

지금 최욱경이 멀게 느껴지는 것은 그의 작품전이 자주 열리지 않거나 연구가 적기 때문만은 아니다. 일각에서는 살아 있었더라면 “유영국과 비견되었을 한국의 대표적 추상화가”로 그를 기억하기도 하지만, 1970년대 한국 미술계에서도 그가 파고들 틈은 의외로 좁았다. 우선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작가는 남성작가의 수가 여성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또 당시는 한국화, 양화, 조각 등 여러 분야에서 수상자를 배출하는 전람회 성격의 국전이 미술가의 주된 등용문이었다. 이에 국전의 심사위원과 수상 작가 선정 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하던 작가들은 각자 뭉쳐 협회를 만들었고, 또 국전이 포용하지 못하는 미술관을 지향하던 이들 또한 다양한 그룹전을 개최했다. 한쪽에서는 <앙데팡당(Indépendant)> 전이 무(無)심사제 전람회로 국전에 대항했고, <AG전> <S.T회원전>은 당시 전위미술을 표방한 김구림, 박석원, 서승원, 심문섭, 이강소, 이건용, 이승택 같은 작가들이 참가했다. 

1970년대는 단색화 열기도 빠뜨릴 수 없다. 이우환, 박서보 등이 주축이 된 단색화는 사색적 침잠, 정신성이 두드러지는 고요한 모노크롬 화풍으로 70년대에 정점을 이루었다. 미국에서 최욱경이 유학하던 무렵인 1960년대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추상표현주의 열풍이 한풀 꺾이고 신사실주의, 팝아트 등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최욱경은 대표적인 추상표현주의 작가인 윌렘 드 쿠닝, 마크 로스코, 또 한편으로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영향을 받았다. 화려하고 솔직한 색채 표현, 강한 화필로 만들어진 율동적인 형태와 리듬이 최욱경 작품의 특징이라면, 이는 단색화의 흐름이나 여러 그룹의 화풍이나 기치에 꼭 맞는다고 보기 어려웠다. 그는 첫 귀국전(1971년) 후 스스로도 미술계에서 환영받지 못함을 느끼게 되었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다.

<자화상시리즈 – 계속되는 나와 나의 생각들>(200*91cm, 1976) 
<꽃피는 사당>(91*122cm, 1975)

한편 작가가 유학 및 체류하던 1960~70년대 미국은 반전, 반차별 운동이 활발했고 그에 따라 여성, 유색인종, 성 소수자 같은 여러 사회적 소수자의 문제가 대두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최욱경은 그런 미국의 분위기를 몸소 체감한다. 아시아인 여성으로서 차별과 해방감을 동시에 경험했을 29세 때 제작한 <자화상시리즈>에는 “화가이면서 스스로가 여성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29년이 걸렸다”는 회고가 등장한다. 미국 시절 그렸던 작품 중에는 인종차별에 반대하거나 자신의 성적, 인종적 정체성을 탐구하는 구상화도 종종 보인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에 돌아온 작가는 ‘한국적 추상이란 무엇인가’란 화업의 문제와 씨름하는 한편, 여성이자 예술가라는 자아에 대한 문제의식도 여전히 짊어지고 있었다. 1979년의 한 기고에는 한국의 남존여비가 뿌리 깊음을 지적하며 “(여성의 적극적 변화란) 남성과의 대결이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단지 하나의 인간으로서 그 자신이 가진 아주 자연스러운 힘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가치를 되찾은 일, 그리고 그 일을 하는 데 수줍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오늘의 고등교육을 받는 여성들에게 있어서 오히려 하나의 의무일 수도 있는 것”이라고 역설하기도 한다. 1980년대에는 “30대 중반부터 나는 여성화가들 이름 앞에 붙는 ‘규수’, ‘여류’라는 호칭에 조금씩 거부감 비슷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남성의 경우는 ‘화가 000’이면 되고 성별의 표기가 필요 없다”(<조선일보>, 1983.7.2.)고 말하고 그 무렵부터 ‘여자로서의 감성과 체험에서 걸러져 나온 여성의 의식에 관련된 표상들을 시각적 용어로 표현, 전달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최열, 2013). 그러나 현재로써는 그 싸움이 얼마나 힘겨웠을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비참한 관계>(130*162cm, 1984)
<어떤 해결책을 줍니까?> (96*130cm, 1983)

지금까지도 건재한 남성-거장의 신화 속에서 여성성을 축소시켰던 20대를 지나, 스스로의 페미니즘을 어느 정도 긍정한 30대 후반에는 이를 작품에 녹이고자 했지만, 외부로부터의 반응은 그를 위축시키고 괴롭혔다. 가령 "나이가 들어서인지 작품이 더 여성스러웠다"는 평가 앞에서는 씁쓸함을 느꼈다는 회고도 보인다. 한창 왕성하게 활동할 시기에 사망한 탓에 작가가 이 시기를 어떻게 소화하여 변모했을 지 알 수 없다. 특히 사망 시점이 작가의 화력에 있어 눈에 띄는 조형적 변화의 길목이었음은 큰 아쉬움을 남긴다. 그럼에도 최욱경이 남긴 작품 속 기질과 요소들은 페미니즘이 토대를 둔 인간성 자체에 대한 연구로 가득하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꽃, 새, 산과 바다처럼 생명력 넘치는 자연에 대한 탐구, 화면을 지탱하는 팽팽한 긴장감, 생생한 감정을 담은 리듬감은 한 사람의 치열한 작가로서 그가 내외로 겪은 투쟁과 극복, 희열과 좌절을 담은 연대기로 남았다. 일생을 "거북이처럼" 자신을 표현하기에 알맞은 조형언어를 찾는 과업에 바쳤던 작가가 예술적 성취의 포부를 왕성하게 키우던 1970년대, 인정과 평가 사이 또 다른 모순에 부딪혀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1980년대의 작품들은 한 예술가의 도전적인 발자취로 남았다. 용기가 필요한 시절, 다시 한번 최욱경의 삶과 작품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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