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온 휴가의 계절. 매번 비슷하게 흘러가는 패턴에 이번에는 또 어떻게 보내야 할까 고민이라면 지금 소개하는 조금 특별한 휴가들을 엿보는 건 어떨까. 커다란 과일 풀장 속에서 수영을 하고 소라 껍데기 속 바닷가를 산책한 후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꿈결 같은 순간들을. 찬찬히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짧은 여행을 다녀온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마법 같은 그림책 세 권을 소개한다.

 

 

‘여름=바다’라는 로망을 품은 당신에게, <할머니의 여름휴가>(2016)

손주는 할머니에게 바닷소리를 들려주고 싶다
출처 - 가온빛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도 후끈후끈 열이 오르는 여름날. 몸이 불편해 휴가는커녕 외출도 어려운 할머니는 집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얼굴이 까맣게 탄 손자가 찾아와 바닷가에 다녀온 이야기를 조잘조잘 들려주지만 그 순간은 영원할 수 없고 할머니의 집은 또다시 적막해진다. 곁을 지키는 건 손주에게 선물 받은 소라 껍데기와 강아지 메리뿐. 탈탈거리던 선풍기까지 고장 난 집안에서 할머니의 여름은 이렇게 쓸쓸히 지나가는 듯 보인다. 소라껍질 속에서 슬금슬금 기어 나온 꽃게를 쫓던 강아지가 소라 속으로 쑥 빨려 들어가기 전까지 말이다.

출처 - 창비

잠시 후 돌아온 강아지에게선 짭짤한 바다 냄새가 난다. 새어 나오는 파도 소리를 초대장 삼아 할머니도 소라 껍데기 안쪽으로 들어간다. 발가락 사이에서 모래알이 서걱거리는가 싶더니 탁 트인 해변이 눈 앞에 펼쳐지고, 할머니의 여름휴가는 그렇게 마법처럼 시작된다. 저 멀리서 밀려온 물보라가 발치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모래사장에 앉아 강아지와 수박도 나누어 먹고, 청명한 바닷물에 슬며시 발을 담근 채 가만히 서서 몸을 휘감는 바닷바람도 느껴본다. 하얗던 피부가 발갛게 익어갈수록 할머니의 얼굴은 어린아이처럼 해맑아진다.

출처 - 독서 문화 플랫폼 책씨앗

기념품 가게 구경도 빼놓을 수 없다. 허공에서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모빌, 어디서든 바다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방향제, 시원한 바닷바람이 흘러나오는 스위치, 맑은 물빛을 그대로 간직한 진주. 지금 이 순간을 오래도록 간직할 기념품을 하나 집어 들고 할머니는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바깥은 여전히 무덥고 집안엔 아무도 없지만 할머니의 얼굴은 환한 미소로 물들어 있다. 선풍기에 꽂은 바닷바람 스위치에서 바람이 윙윙 퍼져 나와 할머니의 머리카락을 간질인다.
일러스트레이터 안녕달이 그린 <할머니의 여름휴가>는 제목처럼 휴가철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 중 하나다. 소라껍질 속 해변이나 바닷바람 스위치처럼 기발한 상상력과 장면마다 숨어 있는 디테일한 요소들도 매력적이지만, 그림체만큼이나 다정하고 부드러운 작가의 시선 덕분에 읽는 내내 저절로 미소 짓게 된다. ‘여름=바다’라는 공식을 로망처럼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인생 그림책이 될지도 모르겠다.

안녕달 공식 홈페이지 

 

 

고요한 자연 속에 잠겨 쉬고픈 당신에게, <지난여름>(2017)

휴가가 시작되고, 높은 건물과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도시에서 자동차 한 대가 빠져나온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집들이 점점 드문드문해지더니 이윽고 숲길로 접어든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친척들이 사는 평화로운 교외.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이 서로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 아이는 집 뒤편 오솔길에 마음을 빼앗긴다. 슬그머니 밖으로 빠져나온 아이의 뒤를 집을 지키던 커다란 개가 쫄래쫄래 따르고, 둘은 나무들이 우거진 숲속으로 들어간다.

숲속은 밖에서 들여다볼 때보다 더 신비롭다.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며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오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풀 밟는 소리가 자박자박 울린다. 끝없이 이어진 나뭇가지들을 이정표 삼아 숲속을 돌아다니던 아이는 거대한 호숫가를 발견한다. 호수는 아무도 없이 고요하다. 반짝이는 햇살만이 수면 위를 통통 뛰어다니고 있다. 한참 동안 물밑을 내려다보던 아이가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자 데크 위로 물방울이 튄다. 호수는 아이의 실루엣대로 출렁대다 다시 잔잔해진다.

물밑은 그 위와는 또 다른 세계다. 도시에서도 숲속에서도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발밑으로는 끝없이 깊은 세계가 펼쳐지는데 위를 올려다보면 수면 위를 통과한 햇빛이 물결에 어른거린다, 아이는 차가운 물에 익숙해질 즈음 수면 위로 올라와 숨을 토해내며 탐험을 이어간다. 이따금 데크에 누워 따뜻한 볕에 몸을 말리기도 한다. 그동안 노을빛으로 물든 하늘에는 이내 별들이 총총 떠오른다. 아이도, 개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은 채 하늘만 오래도록 올려다본다. 짧은 듯 긴 탐험을 끝내고 왔던 길을 되짚어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는 동안에도 별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 언제까지나 그렇게 있을 것 같은 모습으로.

일러스트레이터 김지현의 첫 번째 그림책인 <지난여름>에는 색깔 하나 없는데도 다양한 색깔로 이루어진 풍경을 상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글자 없는 그림으로만 이루어진 이 작품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기에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잔잔하지만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은 호수 같다고 할까.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는 오후 즈음 공원에 앉아서, 혹은 깊은 밤 침대에 엎드려서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겨보면 더 좋을 것 같다.

김지현 공식 홈페이지 

 

 

다이나믹한 휴가를 보내고픈 당신에게, <수박 수영장>(2015)

매미 울음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면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수영장을 개장할 때가 되었다는 것! 당연한 이야기 아니냐고 반문한다면, 이 마을의 수영장은 조금 특별하다고 대답하겠다. 물을 한가득 채운 풀장이 아니라 잘 익은 과일을 반으로 쪼개 만든 천연 수영장이기 때문. 이 마을에서 진정한 여름은 수박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바로 그 순간 시작된다.

수박 수영장을 즐기는 방법은 취향에 따라 가지각색이다. 모래찜질을 하듯 동글동글 검은 씨를 빼낸 자리에 몸을 파묻어도 좋고, 수박 껍질을 벗기고 다른 수영장과의 사이에 걸쳐 워터 슬라이드처럼 사용해도 좋다. 이가 덜덜 떨릴 정도로 시원한 수박즙 속에서 치는 물장구와 물싸움은 다른 어디서도 해 볼 수 없는 이곳만의 매력. 신나게 놀다 달콤한 수박즙이 얼굴에 몇 방울쯤 튀어도 괜찮다. 혀를 조금 내밀고 얼른 핥아먹으면 되니까.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너무 열심히 논 탓에 머리가 핑그르르 도는 것 같다면 수레를 밀고 다니는 행상을 이용해보길 추천한다. 가장 핫한 아이템은 머리 위에 둥둥 뜬 채 1인분의 그늘을 만들어주는 미니 구름과 시원한 수박 화채. 수박 껍질 슬라이드를 타고 다이빙을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노는 사이 길었던 하루해도 저물기 시작한다. 노곤해진 몸으로 노을빛 하늘을 바라보며 조금 쉬다 보면 어느덧 수박 수영장의 폐장 시간이 된다. 하나둘 빠져나가기 시작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꼬마까지 집으로 돌아가면 일 년에 딱 한 번 열리는 수박 수영장도 문을 닫는다. 세상에서 가장 시원하고 달콤한 수영장으로 돌아올 다음 해를 기약하면서.
<할머니의 여름휴가>를 통해 사랑스러운 휴식을 그렸던 안녕달의 첫 번째 그림책인 <수박 수영장>은 독특한 상상력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문 채 읽는다면 세상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여름휴가의 한순간을 즐기게 된다. 이쯤 되면 안녕달이 그리는 다른 계절의 휴식들은 또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바캉스. 텅 비었다는 뜻의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이 단어에는 본래 시간을 계획적으로 채우지 않고 자유롭게 비워놓는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몇 계절에 걸쳐 내 안에 쌓여온 고민들을 흘려보내고 앞으로의 계절을 가볍게 맞이하도록 재충전하는 시간인 셈이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이 보내는 휴가와 나의 휴가를 비교하게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정말 중요한 건 내 휴가가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정말로 내가 행복한지의 여부 아닐까. 거창하고 특별한 걸 하는 대신 하루 종일 소파에 누워 뒹굴거려도 그 시간을 통해 여유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휴가일 것이다, 다가오는 이번 휴가철에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오롯이 나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보는 건 어떨까.

 

 

Writer

언어를 뛰어넘어, 이야기에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마음속에 새로운 씨앗을 심어주고, 새로운 세계로의 통로가 되어주니까. 그래서 그림책에서부터 민담, 괴담, 문학, 영화까지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있다. 이렇게 모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중. 앞으로 직접 이야기를 만들기도 하며 더 풍성하고 가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나가기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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