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섭식장애, 불안증, 낮은 자존감. 단어 하나하나가 무겁다.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20대의 영국 여성이 주목받기 시작한 건 SNS를 통해서였다. 수십만 명의 팔로워들이 공감한 건 그가 포스팅한 낙서 같은 그림과 진솔한 글귀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백하듯, 자조 섞인 목소리로 내뱉듯, 혹은 내면에 쌓인 나쁜 감정들을 유머 섞어 표현하는 그림일기는 보는 일들에게 위로와 웃음을 준다. 일러스트레이터 루비 앨리엇(Ruby Elliot) 이야기다.

<별수 없어서 그린 일기> 표지

에세이가 더해진 그의 그림일기는 <It's All Absolutely Fine>이란 책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이 책은 <별수 없어서 그린 일기>라는 제목으로 올해 한국에도 출간됐다. 첫 장에 실린 간략한 책 소개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 책은 정신건강 문제와 매일 싸우느라 본인은 감자와 다를 바 없다 느끼면서도 사람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일상을 솔직하고 당당하게 그려낸 음울하고도 웃긴 그림일기입니다.’

그렇다. 낮은 자존감 때문에 스스로를 감자나 옥수수 같다 느끼거나 달걀보다 못하다 느낄지라도, 어쨌거나 우리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루비 앨리엇이 건네는 위로가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별수 없어서 그린 일기> 중에서
<별수 없어서 그린 일기> 중에서

 

 

담담한 자기 고백

루비 앨리엇이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린 건 열여섯 살 무렵. 이미 식이장애를 2년 겪었고 입원도 자주 했다고 한다. 자신의 삶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껴졌다는 고백과 함께, 판에 박힌 위로는 위로가 되지 않고, 인생의 모든 게 의미 없어 보이며, 스스로를 돌보기조차 힘든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심지어 자기파괴의 경험까지 솔직히 털어놓는다. 정신적 고통이 이끈 자해의 경험은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운 결함이 아니라고. 자신이 못마땅해서 괴로워해 본 적이 있는 이라면 진심으로 공감할 만한 이야기다. 단단하지 않은 자아로 불확실하고 모호한 상황을 견디며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유는 사적인 이야기를 가감 없이 꺼내놓은 진솔함의 힘일 것이다.

출처 - 루비 앨리엇 인스타그램

 

 

‘그래도 괜찮다’는 유머

루비 앨리엇의 책과 SNS를 보다 보면 종종 ‘블랙 코미디’ 같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살아간다는 게 비극으로 느껴지지만 사실 그것이 꼭 비극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말하듯, 슬프거나 지질하기까지 한 상황을 간단한 그림과 몇 개의 문장으로 위트 있게 표현한다. 자존감 문제로 오랜 시간 괴로워하고 자기파괴의 상황까지 겪은 저자는 나름대로 꽤 성숙한 방식을 찾은 것 같다. 부정적인 일을 유머를 통해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 루비 앨리엇이 찾아낸 것은 ‘승화’라는 가장 평화로운 방식이 아닌가 싶다. 조금은 시니컬한 태도로 엉뚱한 웃음 포인트를 제시하는 그만의 방식이 은근한 위로가 된다.

출처 - 루비 앨리엇 인스타그램

 

 

살아있으면 자신의 궤도를 가고 있는 것

<별수 없어서 그린 일기>에서 작가는 상담치료의 경험을 비롯해, 자기혐오를 멈추고 스스로를 다시 사랑하고 아끼기 위해 어떤 일들을 했는지 자세히 소개한다. 물론 특유의 유머를 섞어서 말이다. 그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긍정적인 태도를 갖기 위해 억지로 노력하지 않으며, 천천히 자신만의 속도로 한 걸음씩 나아간다. 대신 반려동물을 안아주거나 낙서를 하는 등 조금이나마 숨통을 틔울 수 있는 행동을 찾아낸다. 무작정 ‘다 잘될 거야’라고 말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비 앨리엇의 글과 그림에는 희망이 느껴진다. 살아있으면 된 것이고, 그렇게 자신의 방식대로 궤도를 갈 수 있으면 괜찮다는 것. 결코 목소리를 높이지 않지만 힘을 주는 따뜻한 응원이다.

출처 - 루비 앨리엇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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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이미지 출처 – 루비 앨리엇 인스타그램 

 

 

ㅣ필자소개ㅣ
안미영(Miyoung Ahn)
잡지사 <노블레스>에서 피처 에디터로 일했다. 사람과 문화예술에 대한 글을 쓴다. 저서로는 런던 여행에세이 <셀렉트 in 런던>과 10명의 ‘일하는 여성들’을 인터뷰하고 회사생활과 퇴사에 대한 생각을 담은 <회사 그만두고 어떻게 보내셨어요?>가 있다.

안미영 네이버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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