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피크닉이나 추운 겨울날의 크리스마스 캐롤처럼 특정 계절에 더 잘 어울리는 것들이 있다. 에밀리 캐롤의 그래픽노블이라면 한여름 밤이 그럴 것이다. 캐나다 일러스트레이터 에밀리 캐롤은 때로는 서늘한 도시 괴담 같고 때로는 오래된 민담 같은 공포 그래픽 노블을 그린다. 다가오는 여름밤, 으슥한 숲속에서 일어나는 비밀스러운 이야기 속으로 초대한다.

 

<그의 얼굴은 붉다(His Red Face)>

왁자지껄한 술집, 푸른 코트를 입고 이야기를 늘어놓는 남자가 있다. 그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몰려 있다. 딱 한 사람, 멀찍이 떨어져 앉은 동생만 빼고. 그가 독백한다. ‘저 사람은 내 형이 아니다. 지난주에 나는 형을 죽였다.’
시작부터 강렬한 이 작품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한 남자의 이야기다. 구김살 없는 성격에 무슨 일에든 재능을 보이는 형은 늘 넘지 못할 산 같기만 하다. 밤마다 숲에서 내려와 가축을 해치는 늑대를 잡아오겠다고 말할 때도 웃음만 터뜨리던 사람들도 형이 그와 함께 다녀오겠다고 나서자 고개를 끄덕인다. 인정받기 위해 늘 발버둥 치지만 그에게는 항상 형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러나 스산한 숲길을 지나며 그는 자신이 얼마나 겁쟁이인지를 깨닫는다. 울창한 나뭇잎은 꼭 팔을 길게 뻗어 손짓하는 여자 같고, 졸졸 시냇물 소리는 사나운 개들이 그르렁대는 소리 같다. 마침내 늑대를 마주쳤을 때 자기도 모르게 숨어버린 그는 잠시 후 늑대를 물리친 채 자랑스레 웃고 있는 형의 모습을 본다. 결국 그는 늑대 대신 형을 사냥하고, 속마음만큼이나 어두운 숲속에 형을 남겨둔 채 홀로 돌아온다. 그리고 정확히 사흘 후 형은 멀쩡한 모습으로 숲속에서 돌아온다. 사람들은 기뻐하고 형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굴지만 그는 지독한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형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 존재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밝히기로 결심한다.

<그의 얼굴은 붉다>는 2010년부터 온라인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에밀리 캐롤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을 통해 캐롤은 최고의 아티스트와 웹툰 창작자에게 주어지는 스텀프타운 코믹상, 조 슈스터상을 거머쥐며 스토리텔러뿐 아니라 아티스트로서의 두각을 드러냈다. 새벽녘의 푸른빛이나 램프 불빛에서 피어오르는 붉은빛을 찬찬히 살펴보면 왜 그가 ‘최고의 아티스트’인지에 대한 설명은 필요 없어 보인다. 말 한마디 없이도 여러 겹의 감정들이 느껴지니 말이다.

 

 

<마고의 방(Margot's Room)>

<Margot's Room>

캐롤의 작품들은 주로 온라인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경우 웹툰에서만 가능한 매력이 돋보인다. 딸아이를 잃고 남편과도 소원해져가는 여자의 이야기 <마고의 방>은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첫 만남, 딸아이의 죽음, 남편의 실종 등 총 다섯 개 파트로 나누어진 이 작품은 제목을 클릭하면 그림 한 장만 덩그러니 떠오른다. 창문으로 비가 들이치는 피투성이의 방 그림에 당황하는 대신 각 파트의 짤막한 소개에 해당하는 그림을 클릭해보자. 벽에 걸린 꽃을 클릭하면 첫 번째 이야기가, 탁자 위 인형을 클릭하면 두 번째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정확한 암호를 대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비밀스러운 공간에 들어가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숲’이라는 공통점

<Out of Skin>
<Along the Wall>

흥미롭게도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늘 숲이 있다. 며칠 만에 동굴 속에서 구조된 후 묘하게 변한 소녀부터 숲속에서 시신을 발견한 후로 환영을 보게 된 여자, 동생에게 살해당했다가 멀쩡히 돌아온 형까지 모든 기묘한 일들은 숲을 거쳐 시작된다. 다섯 편을 모은 첫 번째 단편집의 제목 역시 <깊은 밤 숲속에서(Through the Woods)>다. 단단한 하나의 줄기에서 수많은 가지들이 뻗어 나오듯, 에밀리 캐롤의 이야기는 숲이라는 공통된 세계관을 공유한다. 다음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보금자리(The Nesting Place)>

이미지 via ‘imgur’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얼마 전 부모님을 잃은 ‘벨’은 오래전 헤어진 오빠의 집으로 향한다. 아직은 서먹서먹한 오빠와 웃고 있어도 어딘가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약혼녀, 속을 알 수 없는 가정부와의 생활이 시작되지만 벨은 물에 뜬 커피 알갱이처럼 잘 섞이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벨은 오빠의 약혼녀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무언가를 먹을 때면 이빨이 유독 달그락거린다는 것. 한편 한적한 숲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벨에게 가정부는 함부로 숲속을 돌아다니지 말라는 경고를 건넨다. 오래전 오빠의 약혼녀가 그랬듯 실종되었다가 며칠 만에 구조될 수도 있다면서.

그날 밤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집안에서는 쉭쉭거리는 정체불명의 소리가 들려오고, 오랫동안 집을 돌봐온 가정부는 메모 한 장 없이 집을 떠난다. 혼자서 숲속을 거닐다 동굴 하나를 발견한 벨은 안쪽을 살펴보려다 굴러떨어지고 만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하지 않게 약혼녀의 진실과 마주치게 된다.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본 듯한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꼭 끝까지 읽어볼 것을 추천하는 작품이다. 예상했던 지점에서 한발 더 나아간 반전에 멍해져 다시 한번 되짚어보게 될 것이다.

 

<The Groom>
<When the Darkness Presses>

에밀리 캐롤의 이야기는 완벽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거미줄처럼 짜인 속을 통과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군데군데 텅 빈 구멍을 지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무얼 놓친 걸까 싶어 지나온 페이지로 되돌아가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어쩌면 그것이 그의 이야기가 지닌 매력인지도 모른다. 사이사이의 느슨한 공백을 각자의 이야기로 채우게 하니까 말이다.

무엇보다 모든 이야기들은 감정에서 시작된다. 형을 향한 질투심, 사랑 때문에 범죄를 묵인했다는 죄책감,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일로 소중한 사람을 잃은 슬픔과 원망. 직접 겪지 못했어도 가만가만 마음결을 짚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을 가지기에, 비슷한 상황에 놓인다면 우리의 이야기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에밀리 캐롤의 작품들은 그래서 더욱 공포스럽고 어딘가 아릿하다.

<When the Darkness Presses>
<Out Of Skin> 더빙 영상

이 밖에도 에밀리 캐롤의 세계에선 고립된 집안에서 하나둘 사라져가는 자매들의 이야기, 이웃집을 맡아주면서부터 이상한 꿈을 꾸게 된 여자의 이야기, <푸른 수염>과 <인어공주>에서 모티브를 따 온 이야기 등 호러와 심리스릴러를 오가는 다양한 작품을 찾아볼 수 있다, 창문을 열어도 쉬이 열기가 가시지 않는 계절에 가까워지는 요즘,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에밀리 캐롤의 그래픽노블을 읽어보는 건 어떨까. 다채롭고 기묘한 이야기들이 공포영화와는 또 다른 서늘함을 선사할 테니.

 

메인 포함 모든 이미지 ⓒEmily Carroll

에밀리 캐롤 공식 홈페이지 

 

 

Writer

언어를 뛰어넘어, 이야기에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마음속에 새로운 씨앗을 심어주고, 새로운 세계로의 통로가 되어주니까. 그래서 그림책에서부터 민담, 괴담, 문학, 영화까지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있다. 이렇게 모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중. 앞으로 직접 이야기를 만들기도 하며 더 풍성하고 가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나가기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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