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emetery Entrance>(1825)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는 1774년 독일 발트 해안의 항구도시인 그라이프스발트(Greifswald)에서 10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으며 루터파 신자인 아버지의 엄격한 종교교육을 받았다. 그는 7살 때 어머니가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다음 해에는 누이가, 13살 때는 호수에서 얼음이 깨져 자신을 구하려던 동생이 익사하는 사고를 당했으며 뒤이어 또 다른 누이가 사망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런 가슴 아픈 경험이 그를 평생 우울증, 대인기피증, 자살 충동에 사로잡힌 내면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그의 작품 세계는 자연스레 고독, 우울함, 경건함으로 점철되었고 주로 대자연의 신비와 숭고함을 종교적으로 승화시켰다.
그는 미술학교에서 소묘를 배웠으며 20살인 1794년에는 덴마크의 코펜하겐 왕립미술학교에서 유학했다. 그의 회화가 인정을 받은 결정적 계기는 1810년 베를린의 아카데미 전시회에 출품된 <Monk by the Sea>(1809)과 <The Abbey in the Oakwood>(1808–10)을 빌헬름 황태자가 구입하면서부터다.

<Oak in the Snow>(1820)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1818)

카스파르의 가장 유명한 그림이다. 이 그림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때까지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사람의 뒷모습을 그린 데다, 대자연에 압도되며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뒷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보는 이에게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대하고 신비로운 자연 앞에 선 작은 인간의 모습은 보는 이에게 경건함마저 일으킨다. 후세의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준 작품이다.

<The Sea of Ice>(1824)

1930년대 나치가 정권을 잡은 후 그들은 카스파르의 작품을 북구 유럽적 특징을 구현한 작품으로 선전했다. 카스파르의 작품을 국수주의적 특징을 구현한 작품으로 간주한 나치의 오해로 인해서 그의 작품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한동안 기피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7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는 독일 낭만주의의 대표적 화가이며 국제적으로 중요한 화가라는 명성을 다시금 얻을 수 있게 되었다.

<Chalk Cliffs on Rugen>(1818)

카스파르는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경치와 고뇌를 담은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의 그림은 영국의 존 컨스터블이나 윌리엄 터너같이 아름다운 경치를 그냥 감상하기만 하면 되는 기존의 풍경화가 아니다. 그의 그림은 편안하기보다는 뭔가 생각하게 만들고, 인생의 풍파와 어려움을 겪고 난 뒤 회한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성숙한 인간의 고뇌와 번민을 느끼게 한다. 칸트 같은 독일 철학자의 진지함이 화가인 그에게서도 강하게 느껴진다.

<Monk by the Sea>(1809)
<The Abbey in the Oakwood>(1808–10)

독일 낭만주의 시인 쾨르너는 이러한 그림을 ‘죽은 자의 풍경화’라고 칭하였다. Albert Boime은 카스파르의 작품이 공포영화의 장면처럼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의 고딕풍에 등장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The Abbey in the Oakwood>를 보면, 황혼 무렵 앙상한 가지의 나무들이 서 있는 숲속 수도원의 폐허에서 고요한 장례식이 거행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그림에서 끝나지 않는 겨울과 황폐와 절망을 읽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이 그림에서 고비를 넘긴 겨울과 멀리 다가오고 있는 봄을 느낀다고 한다.

<The Cross on the Baltic>(1815)

위 작품은 전통적인 종교화의 상징들을 대체하려는 노력으로 그림 그림으로 그의 글에 따르면 산은 믿음, 나무는 희망, 석양의 빛은 그리스도 이전의 세계의 종말을 상징한다고 한다.

<Self-portrait>(1810-1820)
Carl Johann Baehr, <Caspar David Friedrich>(1836) 칼 요한 바에르가 그린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드레스덴에 있는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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