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인간이다. 왜 당연한 말을 하느냐고? 참 아이러니하게 우린 꽤 오래전부터 이 자명한 사실 하나 이해 못 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으니까. 완벽히 이해하고 또 이해시키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당신은 혐오와 권태로 지리멸렬한 삶을 어떻게 이겨내고 있는가? 아마도 당신은 나와 같이 그저 고만고만한 이유로 행복하고, 나름의 사정으로 불행할 것이다.

불가능의 영역을 넘어 우리의 삶에서 동질의 연대를 가지는 것. 그로 인해 알 수 없는 안식과 치유를 경험하거나, 더 큰 불가능의 영역으로 뛰어넘어 가보는 것. 그것은 이해를 오롯이 경험하는 일이 될지 모르겠다. 또 이것으로 자신들의 삶을 재경험할 수도 있다. 모름지기 이해는 나를 이해하는 것부터 출발하니까. ‘난 어떤 사람이지?’라는 질문에 답을 내리기 어렵다면, 지금보다 어린 시절을 되짚어보는 것도 좋다. 소녀들은 어떻게 세상을 감각하고 이해했을까? 어떻게 이 어려운 허들을 뛰어넘어 어른이 된 걸까? 세 편의 영화에서 소녀들이 어떻게 세상을 감각하여 비로소 성장하는지 살펴보았다.

※ 영화 <레이디 버드> <판타스틱 소녀백서> <진저 앤 로사>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레이디 버드>, ‘이게 최선이면 어쩌지?’

캘리포니아 북부의 인구50만이 안되는 작은 도시 새크라멘토. 18살 ‘크리스틴’(시얼샤 로넌)에겐 뉴욕 마냥 쿨하고 세련되지 못한 촌스러운 고향이다. 가족 중 누구도 크리스틴을 이해하려는 사람은 없다. 그가 다니는 가톨릭 고등학교는 자유분방한 미국 학교와는 거리가 멀다. 선생님 중 다수가 수녀이고, 종교 계율처럼 지켜야 할 고리타분한 것도 참 많다. 한 마디로 ‘구리다’. 크리스틴 뜻대로 되지 않는 환경은 딱 ‘현실은 시궁창’인 격.

크리스틴은 자신에게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누구나 다른 사람을 꿈꿔본 적 있을 것이다. 특별한 재능이나 명석한 두뇌를 가진 스포트라이트 받는 삶 같은. 하지만 그는 풍족하지 못한 부모를 가졌고, 외모 중 어디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도 없다. 공부에 취미도 없고 특별한 재능도 없는 평범 그 자체인 크리스틴이 자신에게 준 것은 다름 아닌 이명(異名)이다. 스스로 만든 이름은 그의 소망을 담았다. ‘레이디 버드(Lady Bird)’,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것.

크리스틴의 심심한 일상에 MSG처럼 극적인 감정이 찾아온다. 하필이면 동네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 파란 저택이 첫사랑 ‘대니’(루카스 헤지스)의 할머니 댁이었는지. 평범한 구름도 아름다워 보이는 환각제, 바로 사랑이라! 모든 것이 운명이라 여겼던 감정을 키워가던 것도 잠시. 달콤했던 감각들도 날 특별하게 만들어 주진 못한다. 왜 항상 연애가 끝났을 때야 이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건지.

연인에게 차였을 때, 곁에서 함께 울어줄 사람 누구? 바로 친구, 오직 친구뿐

하지만 크리스틴은 오히려 더 본격적이 된다. 질투와 동경의 대상인 ‘제나’(오데야 러쉬)를 위해 선생님을 모욕하는 궂은 장난을 치거나, 미스터리하고 어딘가 쿨한 남자 ‘카일’(티모시 샬라메)에게 무작정 들이대기도 한다(그래, 대니는 좀 숙맥이었어).

그런데 좀 이상하다. 쿨해 보이고 싶어 던진 냉소적인 말에 남들이 상처받는가 하면 가난하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그 파란 저택이 우리 집이라는 거짓말까지. 이처럼 크리스틴은 거듭 무리수를 둔다. 뮤지컬 활동에도 흥미를 잃게 되고, 절친 ‘줄리’(비니 펠드스타인)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싸우고 만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던 크리스틴의 뇌리에 ‘이렇게까지 해서 내가 닿고 싶은 건 뭐지?’라는 생각이 스친다. 자신은 원래 전 남자친구가 성 정체성을 감당하느라 괴로워하는 모습에 자신에게 범한 모든 실수까지 용서하고 포용하는 ‘뜨거운 심장’을 품은 사람이었는데….

크리스틴이 카일에게 “소중한 첫 경험을 망쳐버렸어”라고 따지는 대사는 크리스틴의 상황을 잘 말해준다. 한 번뿐인 첫 경험. 한 번뿐인 내 청춘. 한 번뿐인 내 인생. ‘Something Special’을 원하는 게 뭐 얼마나 잘못된 거라고. 그건 모두가 원하는 공통의 욕망이고, 단지 내가 조금 혼란스러워 그런 거라고.
뉴욕으로 ‘뜨고 싶은 꿈’은 간신히 가까이에 온다. 뉴욕에 위치한 대학의 대기자 명단에 오른 크리스틴. 보통 우리도 이렇지 않은가? 합격도 불합격도 아닌, 대기자. 특별히 잘난 것도 없고, 못난 것도 없는 삶.

크리스틴은 평소 좋아하던 수녀 선생님께 새크라멘토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아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을 듣는다. 새크라멘토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을 뿐이었는데, 그건 좋아하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고.
옷가게에서 크리스틴이 엄마에게 “이게 내 최고의 모습이면? (그래도 날 좋아해 줄 거야?)”라고 묻는 장면은 이 특별하지 못함이 환경 때문만은 아닐지 모른다는 깊은 불안감을 보여준다.
기실 자신에게 끝없이 추구한 억압은 두려움에서 출발한다. 훨훨 날아가고 싶은 레이디 버드는 스스로 덫을 만든 셈. 자유로운 새가 어떤 장소에서만 자유롭지 못하단 말이 이상하듯, 나답지 않은 내가 행복해질 거란 믿음도 모두 모순이다.

졸업 무도회가 재미없다며 가지 말자는 제나와 카일을 재끼고(!) 크리스틴은 줄리를 다시 찾는다. 나를 소중하게 여겨주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해지는걸.

크리스틴에겐 곧 꿈에 그린 뉴욕 생활이 펼쳐지지만 알 수 없는 공허함에 치닫는다. 그렇다. 인생은 어차피 거기서 거기다. 오히려 가까워서 보지 못했던 소중한 것을 깨닫는다. 아름다운 고향 풍경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온기…. 이쯤에서 크리스틴은 레이디 버드가 아닌 본명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진정한 이해는 일단 본연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아마도 누군가는 아직도 깨닫지 못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잘못은 아니다. 모든 것은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그 자체로 명백히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 말이다.

 

 

<판타스틱 소녀백서>, ‘그럴듯한 어른이 되는 것’

비슷하지만 좀 다른 케이스를 볼까. 캘리포니아의 교외. 막 고등학교 졸업식을 마친 ‘이니드’(도라 버치)와 ‘레베카’(스칼렛 요한슨)는 딱히 대학 입학이나 취업도 않고 잉여짓을 하며 일상을 보내는 낙오자 신세다. 사사건건 비꼬고 삐딱하게 보며 오늘도 어떤 장난을 칠까 궁리하는 게 이들의 주요 일과다.

광고지에 실린 여인을 찾는 문구를 보고 노총각 ‘시모어’(스티브 부세미)에게 접근하여 골탕 먹인다

그렇지만 이니드에 비해 레베카는 이러고 있는 것이 어쩐지 불안해 일자리를 찾는다. 게다가 한심하다고 생각했던 친구 녀석마저 녹색으로 염색하고 펑크룩을 입고 다니는 이니드를 더 한심하게 본다. 문제아가 뭐 어때서? 재미없는 어른들이 싫다고 한 적은 언제고!

지금은 운행하지 않는 버스를 언제나 기다리고 있는 정체 모를 노인

어느 날 이니드는 자신들이 놀리던 시모어에게 산 LP 곡에서 알 수 없는 연대를 느낀다. 어른의 세계에서 환대받지 못한 어른 시모어, 그는 뭔가 다르지 않을까?

부족한 점수 때문에 미술 보충 수업을 듣게 된 이니드. 언제나 자신의 아이디어보다 더 좋은 작품을 내는 학생으로부터 자극받곤 시모어의 집에서 발견한 포스터를 과제로 낸다. 자칫 레이시즘으로 보일 수 있는 이 작품을 진지한 성찰로 투시한 이니드의 대답에 선생님은 매력을 느끼고 그에게 대학 추천서를 써준다.

시모어에게 알 수 없는 공통점을 느끼는 이니드는 그에게 여자를 알려주려 백방 노력한다

레베카도 알바를 하고, 이니드도 곧 알바에 뛰어들지만 이니드에게 딱딱한 사회생활은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결국 일을 그만두고 집에 있는 잡동사니를 팔며 푼돈을 번다. 이니드도 안다. 이런 식으로는 결코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걸.
그 사이 시모어에겐 정말 ‘어른 여자 애인’이 생겨버리고 레베카는 좀 더 일찍 사회생활을 했다고 어른 흉내를 내며 이니드에게 잔소리를 한다. 게다가 이니드는 졸업 전시회 참석하지 못하는데, 하필 이때 작품을 왜곡 해석한 사람들의 영향으로 미술 대학 진학도 실패하는 등 어느 하나 이니드 뜻대로 되는 게 없다.

자신을 한심하게 보는 레베카가 너무 멀어져 버린 것을 깨닫는 이니드

이제 이니드는 깨닫는다. 시모어를 영웅이라 여기며 좋아하게 된 것은 그가 어른들에겐 낙오자로 보일지 몰라도 자신만의 세계를 잃지 않은 순수하고 진국인 사람이기 때문. 그럴듯한 어른이길 기대하는 이 세상에서 자신만의 줏대를 지켜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러나 이니드는 사실 시모어조차 아직 엄마 말을 듣는 어설픈 어른이란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운행하지 않는 버스를 타고 떠난 노인을 목격한 뒤, 이니드는 그 버스를 타고 도시를 떠난다. 유령 같은 세계에서 이 유령 버스는 어쩐지 이니드의 환상처럼 느껴진다. 마치 이런 세계에서 이니드의 존재 자체가 환상이랄까? 나이만 들었다고 어른이길 종용하는 세상. 하지만 모든 어른마저, 아직은 아이 같은 삐딱한 구석을 이해받고 싶어한다. 좌절과 절망도 따뜻하게 품어줄 누군가가 필요한 소통 불가능한 세상에서 내 편이 어디에도 없다고 느낄 때, 낙오자면 뭐 어떠한가? 이런 나라도 사랑해줄 ‘나’는 언제든지 여기 있는데 말이다.

 

 

<진저 앤 로사>, ‘연대를 사랑하는 각자의 방식’

그럼 소녀들의 우정에 대해 더 살펴보자.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떨어지던 1945년, 런던. ‘진저’(엘르 패닝)와 ‘로사’(앨리스 잉글러트)는 같은 병원에서 같은 날 태어난 운명 같은 단짝! 부모가 친구를 욕하면 바들바들 떨면서 ‘엄마가 걔에 대해 알아!’라고 쏘아붙인다. ‘세상에 친구를 아는 건 나뿐. 그런 우리를 우리 외에 아무도 이해 못 해!’

철없는 귀여운 장난부터 어른스러운 모든 경험까지 함께하는 둘의 사이가 부러울 지경. 냉전 시대 이 관계는 더욱 애틋하다. 사실 두 사람은 참 많이 다르다. 철학적이고 진지한 진저는 남자들과 가벼운 만남을 잇는 로사를 점점 이해하기 힘들다. 마치 자신을 시험하는 일만 같다. 이런 장면은 친구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진저가 핵 집회, 시위 등에 참여하는 모습은 알 듯 말 듯 한 소녀의 심리를 잘 보여준다. ‘핵으로 세상이 끝날지도 몰라, 신이란 게 있을까?’라고 의심하던 진저는 로사를 따라 미사에 참여하며 죽음 앞에선 신을 믿게 될지 모른다고 느낀다. 또한 “아우슈비츠 이후 더 이상 서정시를 쓸 수 없다”는 말처럼 비인간적 세계에서 아름다운 시인이 되고픈 욕망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소녀의 혼돈 그 자체를 그린다. 비정상적이고 이질적인 감정들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차원의 것. 그것을 어떻게 어른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또 다른 것이 있다면 아빠에 대한 인식이다. 진저는 예술적이고 정치사상가인 아빠가 이상적인 어른이라 생각한다. 그의 어른스럽고 철학적인 세계관을 칭찬하는 아빠에게 인정받는 것이 진저의 가장 큰 기쁨. 그에 비해 엄마는 어딘가 우울하고 억척스럽게 느껴진다. 문학과 철학에 관심 많은 자신에게 가사 공부를 하라는 엄마에게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고 울부짖는 진저. 당최 왜 저렇게 되어버렸는지 엄마를 이해하려 한 적이 없다. 그러나 한때 예술에 남다른 재능을 가졌던 엄마는 진저를 가진 이후로 모든 걸 포기했다. 딸이 행복한 여성으로 살았으면 하는 엄마의 바람은 왜곡된 것이 아니다. 그저 여성들에게 그것밖에 안 되는 가능성만을 만들어 놓은 세상을 나무랄 수밖에.

로사는 어릴 때 곁을 떠나 아빠에 대한 인식은 부재하다. 돈 벌기 바쁜 엄마를 이해해보려 한 적도 없다. 이런 왜곡된 인식은 로사를 극단적으로 사랑에 의존하고 애착하는 소녀로 만들었다. 진저의 아빠 ‘롤랜드’(알렉산드로 니볼라)가 남자의 시선으로 로사를 바라볼 때 이 비이성적인 관계는 자기 파멸의 향연으로 흐른다.

한 번도 아빠의 존재를 느껴 본 적 없는 로사. 한 번도 아빠를 미워해본 적 없는 진저. 아빠의 존재를 남자로 받아들인 로사는 롤랜드와 부적절한 관계로 치닫는데, 진저는 이런 두 사람을 절대 미워할 수 없다. 오히려 이런 상처뿐인 관계에 남아 있으려 애를 쓴다.

진저는 이 세상에 자기 혼자 남은 것만 같다

롤랜드야말로 이기적이고 자기 멋대로인 어른이다. 그는 성인으로 누리고 싶은 착취와 자유는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어른으로서 책임과 부모의 역할은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또한 오히려 정작 세상이 깨어 있지 않다고 떳떳한 척 목소리를 내는 모순덩어리다. 롤랜드의 행동은 상징적인 권력을 이용한 폭력이라 할 수 있다. 절대적 위치에선 이해 감각이 떨어지는 걸까. 자유와 존중은 관계의 책임과 의무를 다했을 때 이뤄지는 것이 순리, 이 당연한 것도 어려워하니 어찌하느냔 말이다.

어른들이 “이 사실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 언제 세상이 끝날지 모른다”며 헛소리만 해댈 때 진저는 “다 내 탓이야”라고 자신을 탓하기만 한다. 로사의 임신을 알게 된 진저의 엄마는 자살을 시도한다. 이를 본 로사가 용서해달라 빌 때, 진저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스쳐 지나간다.

병원에서 진저는 엄마를 기다리며 로사에게 편지를 쓴다. 아빠에겐 ‘미래에 관한 시’를 쓴다고 하면서. 아빠는 늦은 사과를 하지만 진저는 대꾸 없이 글만 끄적인다.

‘… 이제 우리에겐 내일은 없을지 몰라. 공포와 슬픔 속에서도 난 이 세상을 사랑해. (중략)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널 사랑했다고 말할 거야. 우린 달라.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우리가 살아있다는 거야. (중략) 어쨌든 난 널 용서할 거란다.’

- 진저의 편지

진저는 모든 것을 포용한다. 자신을 상처 입힌 친구도 마찬가지로 피해자였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 우리는 살아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절망과 분노가 불가피했던 ‘피해자’들이 아니라 세상을 억압하는 더 큰 권력을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대는 그런 이해 속에서 안식과 치유를 준다. 그것이 우리의 힘이다.

 

 

Writer

나아가기 위해 씁니다. 그러나 가끔 뒤를 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