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개봉한 영화 <우리의 20세기>는 자유롭고 순수했던 1979년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를 배경으로,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인생을 살아가는 다섯 남녀의 이야기를 그린다. 1970년대 끝자락의 공기를 감각적으로 재해석한 영상과 거의 모든 장면에 영감이 넘쳐나는 매력적인 비주얼로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커리어를 시작한 마이크 밀스가 각본, 감독을 맡아 음악, 의상, 소품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였다. 스타일리쉬한 연출을 보는 즐거움으로 가득한 영화 <우리의 20세기> 속, 인상적인 오브제 넷을 꼽았다.

 

1. 살렘 담배

제목대로 영화는 1979년 산타바바라에 사는 세 여성의 삶을 서사적 중심에 놓는다. 그중에서도 ‘도로시아’(아네트 베닝)는 이야기를 전개하고 주도하는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다. 감독은 도로시아라는 진취적인 여성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자신의 어머니가 실제 썼던 은팔찌를 착용하게 한다든가, 세련된 패션 감각을 나타내기 위해 버켄스탁을 신게 하는 등 여러 디테일에 정성을 쏟았다. 그중에서도 도로시아가 피우는 살렘 담배는 영화의 거의 매 장면 등장해 그의 일상과 함께한다. 살렘은 1956년에 처음 출시되어 지금은 단종된 필터형 멘솔 담배로, 흰색과 청록색을 적절하게 섞어 청량감을 강조한 케이스 디자인은 도로시아가 착용하는 모노톤 의상과 상반된 컬러감을 연출해 경쾌한 느낌을 준다.

<우리의 20세기> 스틸컷

1인 출판사 ‘딴짓의 세상’에서 <우리의 20세기>의 굿즈로 제작한 살렘 포토카드집. 영화 스틸 및 주요 대사를 담은 미니 포토카드 40매도 함께 수록했다. 현재 온라인판매는 종료된 상태 출처- ‘딴짓의 세상’ 홈페이지

 

2. 턴테이블 & 카세트 플레이어

<우리의 20세기> 스틸컷. ‘제이미’의 방에 놓인 카세트 플레이어

1979년은 펑크라는 서브 컬쳐가 언더그라운드에서 주류로 떠오르는 시기였고 로큰롤을 대체할 대중음악의 혁명이 시작될 때였다. 한때 주체적이고 선구적이었지만, 지금은 시대에 뒤처진 도로시아를 위해서는 험프리 보가트의 영화음악과 1930, 40년대 클래식이 자주 쓰였고, ‘애비’(그레타 거윅)와 ‘제이미’(루카스 제이드 주만)가 듣는 곡으로는 데이비드 보위, 토킹 헤즈, 블랙 플래그 등의 노래를 틀었다. 어쩌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을 음악이라 봐도 될 만큼, <우리의 20세기>에서 리듬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그만큼 영화 곳곳에 음악이 넘쳐흐르고, 이를 재생하는 카세트 플레이어, 턴테이블 같은 ‘구형’의 플레이어는 굳이 경험해보지 않아도 그 시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우리의 20세기> 스틸컷. 토킹헤즈의 음반을 재생하는 ‘윌리엄’(빌리 크루덥)

 

3. 도서

<우리의 20세기> 스틸컷

20세기에 책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또 다른 수단이었다. 그래서 극 중 주인공들이 읽는 책의 선정도 무척 중요했는데, 도로시아에게는 리차드 아담의 <워터십 다운>과 앨빈 토플러의 <미래 쇼크>를 읽게 했고, 줄리는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자기계발서 <아직도 가야 할 길>(모건 스콧 펙)의 한 구절을 영화 속에서 인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페미니즘적인 주제의식이 도드라진 이 영화에서 가장 직접 화면에 등장하는 건 애비가 제이미에게 추천하는 페미니즘 서적들이다. 제이미는 아침 식사 자리에서 애비가 페미니즘 수업에서 공부한 여러 책을 전해 받는데, 이는 <우리 몸, 우리 자신(Our Bodies, Ourselves)>, <자매애는 강하다(Sisterhood is Powerful)>, <오르가즘의 정치(The Politics of Orgasm)> 같은 클래식 격의 페미니즘 도서들이다.

<우리의 20세기> 스틸컷

 

4. 텔레비전

<우리의 20세기> 스틸컷

미국 사회에서 1979년은 과도기였다. 지미 카터 대통령의 마지막 임기가 시작된 해였고 이란에서는 이슬람 혁명과 함께 미 대사관 인질 사태가 일어났다. 값싼 에너지를 거의 마음대로 사용해 오던 미국인들은 석유 파동으로 에너지 위기에 대한 불안감에 빠졌다. 나라 전체가 불황이었다. 영화는 “많은 이들이 방탕한 삶과 소비를 숭배하지만, 무언가를 소유하고 소비하는 것은 의미를 향한 갈망을 만족시킬 수 없다”고 말하는 지미 카터의 ‘자신감의 위기(Crisis of Confidence)’ 연설 장면을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왔다. 그렇게 영화는 ‘텔레비전’이라는 직접적이고 명쾌한 오브제를 빌려 격변의 해였던 1979년의 불온한 공기를 효과적으로 담아낸다.

<우리의 20세기> 스틸컷. ‘도로시아’의 집 거실에 놓인 텔레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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