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터널 선샤인> 속 ‘클레멘타인’의 수시로 바뀌는 머리색은 판타지와 현실을 구분하는 숨은 장치로 기능한다

영화에서 총천연색의 헤어스타일만큼이나 캐릭터를 극적으로 표현하는 장치가 또 있을까.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3) 속 ‘엠마’의 푸른색 숏컷이나, <제5원소>(1997) 속 ‘리루’의 펑키한 오렌지빛 헤어, <이터널 선샤인>(2005) 속 ‘클레멘타인’의 심리상태에 따라 바뀌는 머리색 등은 영화를 보고 난 한참 뒤에도 하나의 각인처럼 뇌리에 선명히 남는다. 아래 ‘핑크색 머리’를 한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영화들을 모았다. 때로는 욕망을 드러내는 장치로, 때로는 고독을 숨기는 방패로 작용하는 영화 속 ‘핑크 헤어’에 주목해보자.

 

키워드 1. 욕망

<클로저>의 ‘앨리스’

<클로저>를 단지 로맨스 영화의 범주에 욱여넣기엔 어딘가 찝찝하다. 그것은 영화가 연인 사이의 질투와 배신, 이별과 파국의 상처로 얼룩진 사랑의 ‘불쾌한’ 민낯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고 묘사하기 때문이다. 전직 스트립 댄서 ‘앨리스’(나탈리 포트만)는 뉴욕을 떠나 런던에 도착한 첫날 부고전담 기자 ‘댄’(주드 로)을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얼마 가지 못해 댄은 사진작가 ‘안나’(줄리아 로버츠)를 만나 강한 끌림을 느낀다. 그러나 안나에게 이내 또 다른 연인 ‘래리’(클라이브 오웬)가 나타나고, 네 명은 얽히고설키며 서로 상처 주고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위선과 기만, 이기주의로 범벅된 ‘어른’들의 연애를 솔직하고 대담하게 그려내며 호평받은 이 영화에서 단연 주목해야 할 건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 변신이다. <클로저>를 통한 첫 성인연기 도전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깊은 그늘을 간직한 스트립 댄서로 분해 뇌리에 박힐 만한 강렬한 연기를 펼쳤다. 여러모로 화제를 낳았던 스트립쇼 장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시종 꼿꼿한 시선으로 래리를 쳐다보던 앨리스의 눈빛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한 상대에게 버림받은 앨리스는, 말없이 그를 떠나 스트립클럽에서 관능의 춤을 추며 스트리퍼로서의 진면모를 드러낸다. 희생하고 버려진 ‘초라한’ 여인에서, 자신의 욕망과 관능을 스스럼없이 들이미는 강인한 존재로 뒤바뀌는 순간이다.

<클로저> 예고편

 

키워드 2. 고독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샬롯’

‘밥 해리스’(빌 머레이)와 ‘샬롯’(스칼렛 요한슨)은 도쿄로 여행 온 미국인이다. 위스키 광고 촬영차 일본을 방문했지만 낯선 문화와 의사소통의 어려움으로 소외감을 느끼는 밥 해리스, 사진작가인 남편을 따라 역시 일본에 왔지만 외로움과 불확실한 앞날에 대해 번민하던 샬롯, 이 두 사람은 우연히 만나 7일 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며 특별한 감정을 쌓는다. 영화 속 도쿄라는 배경은 어쩌면 ‘삶의 무대’에서 자신의 역할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모든 이들의 씁쓸한 위치를 대변하는 장치일지 모른다. 그래서 말 안 통하는 낯선 도시의 공간은 소외감을 증폭시키고, 그로 인해 두 사람은 더욱 깊은 공감과 미묘한 감정의 끌림을 느낀다.


스칼렛 요한슨은 자기 삶의 갈피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결혼 2년 차 ‘샬롯’으로 분해 당시 열아홉 살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는 성숙한 연기를 보여줬다. 이 영화로 그는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과 뉴욕 및 보스톤의 평론가협회로부터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는데, 내면의 ‘외로움’을 깊이 있게 연기했다는 평을 얻었다. 극 중 내내 어떠한 결단도 내리지 못한 채 수동적인 모습으로만 일관하던 샬롯이 한순간 적극적으로 자신을 어필하는 장면이 있는데, 도쿄의 밤 문화를 만끽하며 찾아가는 가라오케 신이다. 샬롯은 그 짧은 몇 분 동안 세상과 부딪힐 준비가 안 된 ‘어린애’에서, 핑크색 가발을 쓰고 자유롭게 노래하고 춤추며 자신을 드러내는 매력적인 주인공이 된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가라오케 신. 프리텐더스의 곡 ‘Brass in Pocket’을 부르는 스칼렛 요한슨

 

키워드 3. 자유

<레이디 버드>의 ‘레이디 버드’

<레이디 버드>는 새크라멘토에 사는, 새크라멘토만큼이나 평범한 17살 소녀의 성장담을 그린다. 자기주장 강하고 당찬 성격을 지닌 그는 이름도 부모님이 지어준 ‘크리스틴’이라는 본명 대신, 자신에게 직접 지어준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으로 불리길 원한다. 자신의 특별함을 인정해주지 않는 엄마와는 사사건건 부딪칠 만큼 자신의 정체성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그에게, 핑크색으로 물들인 머리는 누군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봐 줬으면 하는 바람과 같은 것이다. 동시에 하루빨리 따분하고 지루한 도시에서 벗어나, 뉴욕에 있는 대학에 가서 자유롭고 화려하게 살기를 꿈꾸는 욕망도 함께 녹아 있다.

‘레이디 버드’를 연기한 시얼샤 로넌과 감독 그레타 거윅

결국 바람대로 뉴욕에 있는 대학에 입학해 꿈에 그리는 생활을 시작한 레이디 버드. 하지만 누구나 으레 자신의 정체성을 마주하는 순간이 오듯, 그 또한 문득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깨닫고 밀려드는 혼란을 느낀다. 이제껏 지켜내려 했던 ‘비범함’의 욕구가 실은 자신의 정체성을 애써 부정하며 얻어내려 했던 것임을 인지하고야 만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자신의 위치를 아는 사람만이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음을. 바로 이 지점에서 관객들은 씁쓸함과 동시에 꿈틀대는 희망을 본다.

<레이디 버드>는 그레타 거윅이 자신의 고교 시절을 반영한 자전적인 스토리를 바탕으로 완성한 영화다. 시얼샤 로넌이 그레타 거윅 감독의 페르소나이자 주인공 ‘레이디 버드’로 분해 더할 나위 없는 연기를 펼쳤다.

<레이디 버드>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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