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어떤 영화들은 아드레날린을 자극하며 영화 안쪽의 세계로 관객을 끌어당긴다. 과학계는 아드레날린을 교감 신경의 흥분 상태에서 분비되는 물질로, 위기 상황에 처한 생물이 신체 능력을 일시적으로 향상시키는 물질로 정의하고 있다. 말하자면 몸의 다른 부분에 필요한 에너지를 가져다 쓰는 현상인데,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레이싱이나 험준한 산을 오르는 바이킹, 높은 언덕으로부터 급강하하는 스키 점프 등 극한의 상황에서 펼치는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이 바로 아드레날린에 중독돼 있다고 볼 수 있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스틸컷

그런데 이 아드레날린의 분비가 비단 스포츠를 즐기는 동안에만 촉진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영화들은 감상 자체만으로 아드레날린을 분비시킨다. 특정 환경에 놓인 인물들의 고군분투를 지켜보면서 우리는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고강도의 체험을 하는 듯한 착각에 이른다.
영화만 봤을 뿐인데 왠지 모르게 레벨업이라도 한 듯한 기분. 이런 영화들은 우리의 신체와 정신을 긴장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단단하게 무장시킨다. 땀 냄새 물씬 풍기는 이른바 아드레날린 분출 영화들. 많은 영화들 가운데 네 편만 소개한다.

 

 

조지 밀러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2015)


2015년, 전 세계의 관객들을 흥분으로 몰아넣었던 작품.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는 핵전쟁으로 멸망한 22세기의 어두운 미래, 한정된 물과 기름을 독차지한 ‘임모탄 조’(휴 키스-번)가 인류를 지배한다는 설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내와 딸을 잃고 사막을 떠돌던 ‘맥스’(톰 하디)는 납치돼 노예로 끌려가고, 사령관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는 임모탄의 폭정에 반발하여 인류 생존의 열쇠를 쥔 임모탄의 여인들을 탈취해 분노의 도로로 내달린다.

임모탄 조

<매스 맥스: 분노의 도로>는 감독 조지 밀러가 20년 만에 내놓은 <매드 맥스> 시리즈의 후속격으로 제작됐지만 전편을 보지 않아도 무리가 없다. 기타맨과 장대 신을 비롯해 쏟아지는 전례 없이 독창적인 이미지의 향연에 입을 다물기 힘들다. 반란을 이끈 수장 퓨리오사의 카리스마는, 퓨리오사를 그해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로 만들었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가 창조한 이미지와 신화는 21세기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전설로 영원히 회자될 것이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트레일러

 

 

장 마크 발레 <와일드>(2014)


미국 서부를 종단하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은 미국 3대 트레일 중 하나로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을 향하는, 총 거리 4,286km(2,666마일)의 장거리 코스다. 이 극한의 도보 하이킹에 나선 한 여성이 있다. 그의 이름은 ‘셰릴 스트레이드’(리즈 위더스푼). 삶의 유일한 희망이자 버팀목이었던 엄마 ‘바비’(로라 던)의 죽음 이후, 고통 속에 살아가던 셰릴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 PCT 종단길에 오른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으로 주목할 만한 감독의 대열에 오른 장 마크 발레의 2014년 작품. <와일드>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에 비교하면 줄거리도, 대사도 단조롭기 짝이 없는 영화다. 셰릴의 작은 체구를 더 초라하게 만드는 무지막지한 크기의 백팩. 몸집의 몇 배는 될 것 같은 백팩을 그는 짊어지고 걷는다. 또 걷는다. 묵묵히 견디는 그의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은 건 끝없이 걷는 고행길을 감상주의로 접근하지 않는 <와일드>의 태도 덕분일 것이다. 리즈 위더스푼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와일드> 트레일러

 

 

니콜라스 윈딩 레픈 <드라이브>(2011)


오직 드라이브에 삶의 의미를 두고 살아가던 한 남자(라이언 고슬링)와 그의 차가운 심장에 온기를 불어넣은 여인 ‘아이린’(캐리 멀리건). 새로운 삶의 의미가 된 아이린을 위험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드라이버는 비극적 사건에 휘말린다. 폭력과 치열한 사투를 벌이는 그의 순수한 집념이 그 자신의 냉혹한 본성을 일깨운다.


정과 동의 미학으로 묵묵히, 또 맹렬히 질주하는 영화. 고독한 남성의 순애보라는 흔해 빠진 얼개의 <드라이브>, 그러나 이 영화의 숨 막히는 스타일리시함에 많은 관객들이 열광을 보냈다. 오직 질주하는 쾌감밖에 모르던 남자의 서툰 사랑이 (감독의 시그니처인)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포개지며, 침묵과 눈빛으로 점철된 매혹의 긴장 상태에 관객을 몰아넣는다.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드라이브>는 할리우드 액션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2011년 칸영화제 감독상을 거머쥔다. 라이언 고슬링이 분한 이 남자의 전갈 무늬 점퍼를 탐낸 남성 관객의 수가 가히 적지 않았으리라 짐작해본다.

<드라이브> 트레일러

 

 

캐서린 비글로우 <허트 로커>(2008)


폭탄 테러로 연간 수천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이라크 바그다드에 절실한 사명을 띤 폭발물 제거반 EOD가 있다. 불의의 사고로 팀장(가이 피어스)을 잃은 EDO팀에 ‘제임스’(제레미 레너)가 새로 부임한다. 독단적이고 거침없는 제임스는 계속해서 팀원들을 위험천만한 상황에 빠뜨리며 극도의 긴장 속에 지내도록 만든다. 특수 방탄복을 입고 직접 폭발물을 제거해야 하는 일촉즉발의 공포와 매일같이 대면하는 대원들은 제임스의 무리한 임무 수행으로 갈등을 빚는다.


캐서린 비글로우의 <허트 로커>는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의 새로운 결을 제시한다. 매 순간 긴장과 두려움과 대결해야만 하는 폭탄제거반의 일상을 중계하는 <허트 로커>는 관념적으로서가 아닌 실재하는 전장으로 관객을 이동시킨다. 영화는 전쟁이 삶이 되고, 삶이 곧 전쟁에 포섭돼버린 군인들의 정신적 트라우마를 조명한다. 냉철함과 판단력으로 무장한 삶을 살던 군인이 정작 전장을 빠져나오자, 진열장에 놓인 여러 개의 시리얼 중 어떤 것도 고르지 못하는 장면이 이를 반증한다.

<허트 로커> 트레일러

 

메인 이미지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이미지 컷 via ‘Schmoes know’ 

 

 

Writer

예측 불가능하고 아이러니한 세상을 닮은 영화를 사랑한다. 우연이 이끄는 대로 지금에 도착한 필자가 납득하는 유일한 진리는 '영영 모를 삶'이라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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