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낯설다. 익숙한 의미로부터 몇 걸음, 혹은 아주 멀리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에 몰입하다 보면 일상 세계에서의 상식, 지식, 논리로부터 한 발짝 떨어지는 낯선 기분을 경험하기도 한다. 내 체온으로 데워지지 않은 곳과 닿는 감촉을 우리는 ‘차갑다’고 느낀다. 따라서 시 읽기는 곧 시원한 일이기도 하다. 초여름에 읽기 좋은 시 3편을 소개한다.


(아래 음악을 틀어 놓고 감상하길 권한다.)

 

1. 푸르게 충만해지는, 김언 <있다>

우리는 보통 ‘나뭇잎이 푸르다’고 말한다. 반면 이 시의 나뭇잎은 ‘푸르고 있다’. 사실 우리가 눈치채지 못할 뿐 나뭇잎은 항상 ‘푸르고 있고, 가늘어 지고 있는’ 상태다. 아주 미세하지만 나뭇잎의 시간은 분명히 흐르고 있다. 이것이 우리와 다른 식물의 호흡법이다. 움직이는 대신 색을 더해 푸르러지는 방식.

마찬가지로 시간도 흐르는 것이 아니라, ‘흐르고 있다’. 온데간데없는 상태조차 시간 속에 ‘있다’. 없는 방식으로 있다. 완료를 뜻하는 ‘도착’의 상태도 우리가 그렇게 정했을 뿐, 실은 ‘도착해 있는’ 상태다.

이 시를 가만히 따라 읽다 보면 내면이 푸르다가, 짙푸르다가, 진푸르러진다. ‘있음’에 몰입하며 나뭇잎의 호흡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러면 더위가 한창 가늘다가 온데간데없어지고, 파릇한 내면이 부지런히 도착해 있을 것이다.

 

2. 시인이 내면에 깎아 내주는 사과, 이수명 <사과의 조건>

사과의 조건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빨갛고 구형이다’라고 답할 것이다. 사과를 깎는 일은 그 중 ‘빨간 조건’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이때 껍질이 깎인 사과와, 사과 껍질은 각각 사과라고 부를 수 있을까? 사과라 하기도, 아니라고 하기도 적당치 않다. 그래서 사과를 깎는 것은 ‘사과를 비롯하여 사과 아닌 곳에서 머무는 사과들이 서로 미끄러’지는 일이다.

‘사과’라는 말도 이와 같다. 단어 ‘사과’는 ‘실제 사과’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우연적인 조건이다. 또 ‘사과’를 말하더라도 누군가는 탐스럽게 익은 모습을, 누군가는 제사상 위에서 갈변된 모습을 떠올린다. 누군가는 잘못했을 때 하는 사과를 떠올릴 것이다. 그래서 ‘사과’라는 단어를 쓰는 것 역시 ‘사과 아닌 곳에서 머무는 사과들이 서로 미끄러’지는 일이다.

결국 사과라는 단어는 사과에 속해 있지만, 칼로 손쉽게 깎아 버릴 수 있는 껍질처럼 연약하고 얄팍한 조건이다. 우리의 언어는 이처럼 달콤한 과육과 씨앗이라는 실체에 닿지 못하는, 껍질처럼 떫고 쓴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래서 이 시를 끝까지 곱씹으면, ‘없는 지름’ 속에 덩그라니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서늘한 통찰이다.

 

3. 냉혹한 토르소의 시선, R.M.릴케 <고대 아폴로의 토르소>

토르소는 시간이 빚은 조형물이다. 긴 세월 동안 머리와 팔다리가 깎여나간 조각이기 때문이다. 대신 몸뚱이에 ‘한 가닥 미소’와 ‘뒤틀려 박힌 시선(관조)’가 응축돼 남게 되었다.

머리에 박혀 있던 두 눈의 시선은 좁은 시선이었다. 원근법에 매여 있는 데다 가시광선 빛깔과 앞·옆의 방향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 눈은 편견을 보기 일쑤다. 그 머리가 잘림으로써 몸 전체에 고르게 퍼진 시선이 될 수 있었다. 한편 팔과 다리는 우리를 어딘가로 이동하게 하고, 무언가를 쥐고 움직이게 한다. 밖으로 향하게 하는 기관이다. 하지만 정작 우리 몸은 소외되기 십상이다. 그 팔다리를 지워 버림으로써 몸뚱이 자체가 생명력을 얻고 꿈틀거리게 되었다.

시 말미, ‘거기엔 그대를 보지 않는 장소란 없으므로’라며 시선의 전복이 일어난다. 실은 우리가 토르소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라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시를 읽는 것도 시가 우리를 읽는 일일지도 모른다. 시인은 토르소처럼 온몸으로 밀고 나가 쓰는 자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의미 체계에서 팔, 다리와 같은 실용과 머리와 같은 계산을 깎아내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빚어진 작품이 우리에게 ‘너는 네 삶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차갑게 빛나는 토르소의 시선 앞에 얼어붙을 수밖에 없다. 시 전체 생김새도 어쩐지 토르소와 닮았다.

고대 아폴로의 토르소 Via ipernity

 

Writer

지리멸렬하게 써 왔고, 쓰고 싶습니다. 특히 지리멸렬한 이미지들에 대해 쓰고 싶습니다. 사진이나 미술 비평처럼 각 잡고 찍어낸 것이 아닌, 그 각이 잘라낸 이미지들에 대해. 어릴 적 앨범에 붙이기 전 오려냈던 현상 필름 자투리, 인스타그램 사진 편집 프레임이 잘라내는 변두리들과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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