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곽 아래 북정마을 ‘드로잉스페이스 살구’에서 이안리 개인전이 열리는 중이다. <네. 다섯 개의 거울(Yes. Five Mirrors)>이라는 전시 명은 거울이 전시 전반을 아우르는 무언가임을 암시하지만, 전시장에 거울은 없다. 대신 벽면 하나를 채울 정도의 커다란 연필 드로잉, 알루미늄을 입힌 전복 껍데기로 만든 모빌-악기, 손에 알맞게 쥐어지는 드로잉 도구들과 전시장에 설치한 짙은 보랏빛과 플래시 조명으로 좁은 공간을 꽉 채웠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문 표면에서 바닥까지 흩어진 은빛의 날카롭고 딱딱한 셀로판에는 물기가 송송 맺혔다. 검은 반점처럼 벽과 바닥에 놓인 작은 조각들, 벽과 천장, 창틀, 바닥에까지 설치한 다양한 종류의 작품이 관람자를 맞는다. 발밑을 조심하며 눈을 가까이 대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더 작은 조각들은 창틀과 선반, 바닥, 벽의 갈라진 틈새에서 얼굴을 내민다. 공간 뒤편에 마련한 좁은 테이블에 놓인 드로잉은 수십장이라 꽤 오랜 시간을 들여다보게 한다. 별다른 마감이 없는 이 드로잉들을 넘겨 보고, 흑연을 입힌 도구들을 손에 쥐어 보는 동안 당신의 손도 검게 물든다. 다섯 공간을 차지한 커다란 연필 드로잉들은 옅고 짙은 선들이 수개월에서 몇 년에 걸쳐 쌓여, 단단하고 매끄러운 표면을 얻었다. 몇 개의 검은 눈들이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마음이 들 때쯤 눈을 돌리면 전시장 구석 비파나무 곁에 작은 벤치 하나가 보인다. 거기에 앉아 작가가 전해주는 다섯 개의 이야기를 듣는다. 

다섯 개의 이야기

▲ 전복으로 만든 악기를 흔드는 퍼포먼스 중인 이안리

 

Mirror #1

마음이 태어난다. 마음은 병이 들어 늙어가고 가끔씩 거센 파도를 무릅쓰다가 죽기도 한다.

평생 돌에 미친 수석 할아버지도 결국 계곡물에 휩쓸려 가셨고, 캘리포니아 멘도시노 일대 해안에서 전복을 따던 아시아계 사람들도 매년 몇 명은 목숨을 잃는다고 한다. 어디에서나 잡을 수 없는 것들을 놓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저기 내 돌이 있다! 저기 내 전복도…”
그들의 눈이 반짝인다.
 

▲ 레지던시 과정 중 쇼윈도에 설치한 비파나무 잎

 

Mirror #2

살구에서 두 달간 레지던시를 하기로 했다.

비파나무 한 그루를 데려와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어쩐지 성실해질 것 같았다.  

수상함으로 시작된 현재진행형 분노의 시국, 갑자기 찾아온 추위와 이별, 분열되기 좋은 11월 요즘 사람들 입에선 이상한 무언가 뚝뚝 떨어지고, 전시장에 떨어진 광합성을 마친 비파나무 잎사귀에 나는 분노의 호치께스 심을 박아대고 있다. 

▲ <네. 다섯 개의 거울> 설치 장면

 

Mirror #3

미네랄, 아니말, 베제탈의 형태를 왔다 갔다 하며 그리겠다고 애쓰던 파리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에 와서 생계형 장사를 했고, 헌 집을 고쳐 지었다.

그리고 요즘 식물을 키운다. 건강염려증으로 그만두었던 연필그림도 천천히 다시 그리고 있다.

일 년에 한 장

네다섯 개의 마음이 어른거리는 하나

▲ <구석기 드로잉 도구>(2016)

 

Mirror #4

점점 가늘어지는데 두꺼워지는 가는 심, 굵은 심

손톱으로 깎다가 가위로 깎다가 칼로 깎다가 연필깎이로 깎는다.

피레네 산맥 어디쯤에 있다는 니오동굴 속에는

호모 사피엔스의 벽화가 700미터 좁고 긴 길에 그려져 있다고 한다.

연필깎이와 같은 동굴 속에서 구석기인에게 연필깎이를 드리는 상상을 한다. 

▲ <초록손>(2016) 설치 광경

 

Mirror #5

모난 달
갇힌 달
지친 달 

노란 참외
벌레 먹히는 중
멍든 바람 참외와 

바람 든
갈비뼈 

그 속에 숨어 산
빨간 게 한 마리

간장 붓고

삭힌다
삭힌다
삭힌다.

 

마음을 불러내기

▲ 연필 드로잉 <눈>(2010) 디테일 컷

 

이안리가 만든 모빌-악기는 알루미늄을 입힌 전복 껍데기와 스테인리스 그릇, 링을 섞어 매단 것이다. 바람보다는 사람의 손으로 흔들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것들이 만드는 소리는 쨍 울려 퍼지는 금속제 타악기와 털썩거림의 맞물림에 가깝다. 작가가 정영문의 책을 읽다 발견한 멘도시노 해안가에서 전복을 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떤 마음에 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면, 악기의 소리는 어떤 부름이다. 조개껍데기는 낯선 사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털썩거리는 소리는 우리가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으면서도 잊고 있던 기억이나 마음을 불러낸다. 알맹이가 사라진 무언가를 잔뜩 쥐고 귀 기울이던 시절은 대부분의 사람으로부터 멀어졌다. 전복을 따던 누군가도 빈 껍질을 찾으러 간 것은 아니었다. 멀리 있는 것, 갖고 싶은 것, 꽉 차 있는 것, 그리고 턱밑까지 차오른 마음과 열망. 쉽게 욕심이라고 치부하기 힘든 것. 바라는 마음과 가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 생각지 못한 곳에서 끝나고 흩어지는 것들. 영문도 모른 체 굳게 믿었지만 이미 균열이 일어난 상태. 

이안리가 그린 다섯 점의 연필 드로잉들은 그렇게 불려 나온 마음들을 형태로 그린 것이다. 이유를 찾는 마음은 검게 쌓였다. 종이 위에 그리기 시작한 연필의 선은 시간이 지날수록 겹쳐지며 금속처럼 광택이 흐르는, 단단해 보이는 면으로 바뀌었다. 가까이서 보면 숨 막히도록 미끄럽고, 멀리서 보면 툭 튀어나와 압도하는 거대한 형상이다. 하지만 손으로 문지르면 금방 망가지고 변형될 형태다. 검고 매끄러운 이 덩어리의 표면과 그 껍질이 벗겨진 연한 면을 지나면 안쪽의 열린 틈새로 시선이 향한다. 작가가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을 그린 이 그림들은 축적된 흑연의 겹으로 다시금 빈 곳을 지시한다. 그러나 저 검은 면 또한 도달해 본 적이 있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꽉 짜인 형상과 빈 곳 사이를 왕복하는 마음. 다시 한번, 욕심이라고 쉽게 치부하기 힘든 것, 턱밑까지 차오른 마음과 열망, 꽉 차 있는 마음과 손에 쥐고 싶었던 부드러운 알맹이의 기억을 되살려본다. 잡으려고 했던 것, 잡을 수 없었던 것, 계곡의 세찬 물살 아래 손짓하던, 돌이 아닌 그 무엇.
 

▲ <비파나무 모빌>과 조명 레이어드

 

이안리의 전시는 마치 작가의 작업실에 와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선 평면 드로잉과 흙, 모빌 같은 조각과 입체, 소리와 글, 설치, 퍼포먼스까지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또 전시 세팅과 작품 선정을 타인의 개입이나 번역 없이 직접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장을 살펴보며 작가가 찾아낸 작은 균열들, 이를테면 벽면의 갈라짐, 페인트의 벗겨짐, 벽돌이나 시멘트의 거친 질감과 못 자국, 구멍 따위 장소의 특정한 성격을 활용하거나 낱낱이 부각해서 공간 전체를 장악한다. 하지만 그 ‘장악’은 공간에 대해 작가가 표시하는 호감과 친밀함의 결과로, 위계보다는 우정에 가깝다. 공간을 섣불리 개조하거나 무언가 더하는 대신 부드럽고 섬세하게 대하는 태도다.

이런 섬세함은 그가 ‘초록손’이라고 이름 붙인 작은 오브제에서도 빛난다. 초록색으로 삐죽이 솟아 나온 작은 식물들은 모두 살아 있고, 그 자연스러운 형태를 알맞게 조정한 조명으로 비추어 벽면이나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역시 섬세한 감성으로 만들어진 모빌은 죽은 비파나무 잎을 드로잉하듯 스테이플러 심으로 박아 매단 작품이다. 스테이플러 심과 식물의 잎이라는 서로 충돌하는 물성이 결합하면서, 작가의 섬세함은 날카로운 서정을 만들어낸다. “사람들의 입에선 이상한 무언가 뚝뚝 떨어진”다는 견디기 힘듦에서 이어진 “분노의 호치께스 심을 박아대고 있다”는 강박적 행동은 생각지 못한 사물로 향한다. 분노의 심을 찍어 박는 대상은 무언가 살아있거나 구체적인 행위나 공격에 대한 정당함을 제공한 존재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죽어 떨어진 낙엽이다. 잔인한 마음과 공격적 행동이 전혀 무해한 결과를 낳았음에도, 보랏빛 조명을 받으며 축 늘어져 흔들리는 모빌은 기묘한 빛을 발산하며 분노한 마음의 흔적을 보여준다. 일상적 삶과 사물에 관해 쓴 조각글과 작업일기 일부를 무작위로 모아 낭독한 퍼포먼스도 그 연장선에 위치한다. 감정과 생각의 뒤섞임이 어떤 순간 발산하는 빛, 우연히 발견되고 맞춰지는 마음의 풍경이다. 전시를 보러 가서 어떤 거울을 보게 될지는 관람자에게 달렸다는 뻔한 말 대신 발밑을 조심하길 바란다는 경고를 조심스레 전하고자 한다. 

 

이안리 <네. 다섯 개의 거울> 전

일정 2016.12.9~2016.12.31, 17:00~21:00 
장소 드로잉스페이스 살구(서울시 성북구 성북로23길 91)
홈페이지 http://www.saalgoo.com 

 

Wri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