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고 많은 일이 있었다. 너무나 많은 인상이 남아서 별 것인데도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안타까운 죽음이 있는 반면 왜 아직 살아있나 싶은 존재도 많았다. 한 달 한 달이 ‘11월 괴담’이고 카오스였다. 이런 한 해를 복기하는 건 괴로운 일이니 각자 구성진 술판에 쏟아내고, 우리는 암흑 속에 빛나던 별똥별들을 짚어본다. 아주 잠깐 빛났을지라도 누군가의 눈엔 진하게 잔상이 남았던 문화예술계의 인상적 움직임을 <인디포스트>의 시각으로 골랐다. 이번엔 음악이다. 

PICK! 인상적인 데뷔, 실리카겔

이들의 음악을 들어, 보았는가? 생경한 쉼표는 다섯 명의 멤버가 자유롭게 섞은 음향을 듣고, 두 명의 멤버가 소리를 공략하듯 쏘아 비추는 영상을 보았냐는 뜻이다. 소리와 영상을 동시에 완벽히 소화하는 실리카겔은 새롭게 선보인 정체성을 누구보다 강렬하게 내뿜었다. 올해 인디 레이블 ‘붕가붕가레코드’와 손을 잡았고, EBS <스페이스 공감> 헬로루키 대상을 차지한 밴드라면 명백한 기대주라는 이야기 아닐까. 작년 어느 날 미디어 퍼포먼스를 위해 모였던 이들은 자발적으로 만든 첫 EP앨범 <새삼스레 들이켜본 무중력 사슴의 다섯가지 시각>으로 사전적 의미의 데뷔를 이미 치렀다. 그러나 올해 완성한 정규 1집 <실리카겔>로 전에 없던 독보적인 시청각 세계를 완성해낸 바, 올해 가장 인상적인 데뷔로 굳게 꼽는다.

실리카겔 정규 1집 타이틀곡 '9' MV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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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CK! 인상적인 뮤지션, 이랑

이랑은 단편 영화를 찍었고, 웹 드라마를 연출했고, 음악을 만들며 노래를 부르는 동시에 만화를 그리고, 글을 썼다. 이 모든 자산을 기반으로 올해 그는 자신의 두 번째 음악 앨범 <신의 놀이>를 음원과 책을 결합한 방식으로 선보였다. 음반의 독특한 형태는 둘째 치고, 오랜만에 음악가로서 모습을 드러낸 이랑이 삶과 죽음처럼 묵직한 소재를 더없이 솔직하고 분명한 어조로 담아낸 음악은 대중들을 매료하기 충분했다. "한국에서 태어나 산다는 데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시나요”로 시작하는 노래가 이끌어내는 동의에 대해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국내와 거의 동시에 일본 레이블 Sweetdreamspress에서 발매한 일본판 <신의 놀이>도 현지 리스너들 사이 입소문이 자자해 금세 품절됐다. 지난 11월 도쿄와 간사이 지방 등지에서 여전히 솔직한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했을 이 한국인 예술가의 내년은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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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 인상적인 프로듀서, 그레이 

군산이 고향인 프로듀서 그레이(GREYA)가 서울로 거주지를 옮긴 게 작년 여름. 고속버스 2시간 30분 거리를 이동했을 뿐이지만, 서울로 온 그레이는 지난 1년 반 사이 확실히 많은 일을 했고, 그만큼 이름을 알렸다. 민제(Minje), 재키 와이(Jvcki Wai), 75A, 씨피카(CIFIKA)까지 총 4개의 앨범을 프로듀싱하고 발표하는 사이, Mnet <판스틸러>, EBS <스페이스 공감> 같은 음악 방송에 출연하거나 차진엽 같은 현대무용가의 공연에 음악감독으로 나섰다. 이태원 등지의 클럽, 음악 페스티벌, 여러 음악 송출 채널에서 디제이로 활약했고, <인디포스트>에 음악에 관한 글을 연재하기도 했다.([관련기사]) 취미 삼아 시작한 사진은 이제 브랜드의 룩북에 실리고, 전시 제의까지 들어올 정도다. 지금 그는 단순한 프로듀서가 아니라, 현대 대중예술 속에 들어간 전방위 아티스트다. 이런 왕성함이 오지랖으로 느껴진다면, 이 사람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그가 밴드 멤버이자 총 프로듀싱을 담당한 75A의 앨범은 사진가 박의령이 어떤 미화도 없이 윗옷을 벗은 75명의 여성을 촬영한 사진집에 음원 다운로드 코드 엽서를 추가한 방식으로 나왔다.([관련기사]) 이 작업에 관해 그레이는 “75A 앨범은 여성에 대한 잘못된 태도와 시선을 바르게 인식하려는 스스로와의 약속이자 선언문과 같다”고 말한다. 올해 3명의 여성 뮤지션과 함께 작업한 남성 프로듀서로서, 새롭게 각성한 생각을 앨범의 형태에 반영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음악은 어떤가. 그는 힙합부터 EDM까지 다양한 장르를 다루고 뮤지션에 맞는 스타일을 구축한다. 분위기를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구분하는 게 의미 없고, 국적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무궁무진한 공상에 빠지게 하며, 귀로 듣지만 온몸으로 듣는 것 같다. 정답이 없고 해석은 자유다. 낮에도 밤에도, 막히든 뚫리든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현대 음악’이다. “기존의 대중음악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장르와 주제의 음악을 제시하고 싶었다”는 그의 말처럼, 다양하지만 충실히 따라 올라가다 보면 ‘그레이’라는 하나의 뿌리가 느껴진다. 영국 <DAZED & CONFUSED>를 비롯한 다양한 해외 매체와 해외 아티스트들이 그레이를 더 자주 언급하는 이유다. 군산 시절부터 늘 주목받던 이 젊은 음악가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그는 곧 스물일곱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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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VCKI WAI <EXPOSURE>(2016) 음원 [바로가기
CIFIKA ‘My Ego’ MV [바로가기
CIFIKA ‘Intelligentsia’ MV [바로가기

 

PICK! 인상적인 재즈 뮤지션, 에스페란자 스폴딩

▲ 14살의 재즈 신동 조이 알렉산더, 84살의 재즈 레전드 웨인 쇼터와 함께 한 백악관 공연

신세대 재즈 싱어 겸 베이시스트인 에스페란자 스폴딩은 올해 ‘서울재즈페스티벌’에 참가해 국내 팬들에게 직접 새 앨범을 선보였다. 2012년에 이은 두번째 방한이다. 3월에 발표한 다섯 번째 스튜디오 앨범 <Emily’D + Evolution>은 그의 얼터 에고를 음악과 스토리로 풀어내 호평을 받았다. 생애 네 번의 그래미상에 이어 올해엔 MOBO(Music of Black Origin) 상까지 추가했다. 오바마 대통령 재임기간에 진행해온 공연 <Jazz at the White House>에도 여전한 단골 게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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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 인상적인 곡, 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 이화여대 강제진압 직전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는 학생들

공포와 두려움 앞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수단은 눈물 말고도 화, 웃음, 농담처럼 다양한 형태를 띤다. 소녀시대의 2007년 데뷔곡 '다시 만난 세계'는 개인적인 서사를 담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누군가는 자신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가사로 저항과 희망을 노래한다. 위 영상은 2016년 7월 30일, 이화여자대학교 미래라이프대학 신설에 반대하며 비폭력 시위를 벌이는 여대생들과 강제 진압을 앞둔 경찰 1,600명이 대치한 모습이다. 두렵고 떨리는 상황에서도 다 같이 노래를 부르며 저토록 의연하게, 평화롭게 시위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라. 이후 대학생들은 광화문 촛불 집회가 열릴 때도 행진하며 이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다시 들어보자.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라는 가사가 유독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PICK! 인상적인 앨범, 조동진 6집 <나무가 되어> 

1996년 발표한 5집 이후 무려 20년 만이다. 첫 번째 트랙 ‘그렇게 10년’에서 클라리넷, 플루트 같은 현악기 소리가 이어지다 조동진의 목소리가 들릴 무렵에야 '아, 그래. 이걸 기다렸지' 하고 안도의 미소가 흘러나온다. 시적인 가사와 멜로디, 나지막이 읊조리는 목소리는 변함없이 쓸쓸하고 아름답다. 마치 “표정 없는 기다란 하루”를 보내온 지난 시간을 어루만지는 듯하다. 오랜 세월 신중히 쌓아 올린 10개의 트랙은 한층 더 깊어진 감성으로 세상을 말한다. 젊고 푸르렀던 시절을 되돌아보는 '1970'이나 피아노 연주 위에 솔직한 고백을 담아낸 '천사'가 그러하다. 여기에 동생 조동익의 섬세한 편곡과 푸른곰팡이(전 하나음악) 소속 뮤지션 장필순, 오소영, 조동익, 박용준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있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저물어 갈 때쯤 찾아온 이 앨범을 가히 ‘보물’이라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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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 인상적인 가사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세월호 추모곡이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울려 퍼졌다. 제9차 촛불집회가 열린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어김없이 거리 위로 사람들의 함성과 노래가 이어졌다. 촛불을 들고 이 노래를 불러본 적이 있다면, 아니 입 밖으로 가사를 되내어 본 적 있다면 문득 가슴이 뜨거워지고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단 4줄의 가사지만 이만큼 지금 우리의 마음을 잘 대변하는 곡이 또 있을까. ‘어둠’과 ‘거짓’을 밝히려는 노력은 현재진행형이다. 국정 농단과 촛불 행진, 탄핵 결의안과 청문회, 이는 진실을 은폐하지 않으려 애쓴 마음이 모여 만든 기적이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진실을 두고 이 가사를 곱씹어본다. 

 

PICK! 인상적인 국내 뮤직비디오, 태민 ‘Press Your Number’ 

2008년 SHINee(샤이니)로 데뷔해 귀여움을 뽐내던 소년은 어느덧 관능과 절도를 고루 갖춘 남자가 되었다. 태민(TAEMIN)은 2014년 첫 솔로 미니 앨범 <ACE>를, 올해 2월에는 정규 1집 <Press It>을 발표하며 샤이니와는 다른 차별화한 음악 스타일과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타이틀 곡 ‘Press Your Number’의 퍼포먼스 뮤직비디오는 그의 숨 막히는 비주얼과 퍼포먼스를 가장 담담하게 보여준다. 혼자서, 원테이크로, 4분 가까이 되는 뮤직비디오를 끌고 가는 이 남자를 보라. 흑인 백댄서 가운데서도 전혀 기죽지 않는 태민의 존재감은 ‘Drip Drop’ 뮤직비디오에서도 빛난다. 아이돌을 넘어 어엿한 아티스트로 성장한 그는 ‘SM의 특급 에이스’라 불릴 만하다. 

태민 ‘Drip Drop’ Performance Video [바로가기

 

PICK! 인상적인 해외 뮤직비디오, Solange 'Don't Touch My Hair'

감각적이고 자유롭다. 그의 몸짓과 표정을 따라가다 보면 꼼짝없이 시선을 빼앗겨 4분 30초를 내어주게 된다. 그간 뮤지션이라는 사실보다 ‘비욘세 동생’으로 더 많이 알려진 솔란지(solange)는 <Solo Star>(2003)와 <Sol-Angel & The Hadley St. Dreams>(2008)을 거치면서 더욱 농밀하고 유연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색을 찾았다. 마침내 정규 3집 <A Seat at the Table>(2016)은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며 이 시대 가장 현명하고 아름다운 여성 아티스트의 모습을 보여준다. 네오 소울, 펑키, 알앤비 장르가 뒤섞여 무겁고 천천히 흐르는 사운드 가운데 솔란지의 보컬이 매혹적으로 녹아 있는 'Don't Touch My Hair' 뮤직비디오를 보자. ‘머리(hair)’가 곧 내 ‘영혼(soul)’이고 ‘감정(feeling)’임을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은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독특한 개성을 느끼게 한다.

 

PICK! 인상적인 내한공연, 블러드오렌지

영국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데브 하인스(Dev Hynes) 즉, 블러드오렌지(Blood Orange)의 내한공연이 결정되었을 때, 한국의 젊은 음악가들과 멋쟁이들은 즉시 예매 준비에 착수했다.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프로듀서, 작가, 아티스트이자 솔란지(Solange), 칼리 래이 잽슨(Carly Rae Jepson) 등의 음악 작업 및 영화 <Palo Alto>의 음악 담당 같은 스펙을 굳이 몰라도, 그의 음악과 뮤직비디오를 일단 듣고 본다면 반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정평이 난 멜로디와 함의로 물든 가사, 세상 모든 모던을 다 모은 듯한 보깅댄스, 이게 시크라고 말하는 스트릿 패션, 장난기 없이 부드럽고 진중한 눈빛은 보는 이를 화면 앞에 정좌하게 만든다. 내한공연 또한 ‘멋이 흘러 넘쳤다’. 그가 최근 발표한 앨범 <Freetown Sound>의 수록곡 ‘Augustine’의 연주를 위해 처음 기타 줄을 튕기는 순간, 사람들은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뉴욕의 여름처럼 독특하고 아름다운 공기에 바로 취해버렸다.  

 

PICK! 인상적인 페스티벌, 서울인기

매일 최고 온도 기록을 갱신하던 8월의 어느 날 한강난지공원, “우리가 인기가 없지 ‘인기’가 없냐” 외치며 등장한 ‘서울인기페스티벌’은 우리나라에선 이미 상업적으로 고착화된 음악 페스티벌의 형식을 깨부순 새로운 축제였다. 사람의 기운을 뜻하는 ‘인기’를 자랑으로 여기는 음악가와 단체들이 모이니 자연스럽게 멋과 흥이 넘쳤고, 사람들은 무더위에도 어쩔 수 없이 난지공원으로 모여들었다. 남의 살이 내 몸에 닿을 일 없이 넉넉하고 자유로운 잔디밭에 드러누워 음악을 들으며 맥주를 마시다 잠드는 일, 경계 없이 파고드는 밴드의 음악과 더위에 지친 시체들도 일으키는 DJ의 스피커를 가장 가까이 만나는 일을 경험한 이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은다. “내년 서울인기는 언제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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